# 1
Prologue
눈을 뜨면 출근하고.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자고.
이 패턴을 계속 반복해 왔다.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편집자로 일한 지 어언 3년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입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먹고살 길을 모색해야 했었기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예전부터 판타지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해서 오랜 꿈이었던 편집자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과 많이 달랐다.
“시언아! 《자이언트 킹》 3권 마감, 어떻게 되어 가고 있냐! 원고는 들어왔어?”
“작가님께서 갑자기 하드가 맛이 가서 원고가 날아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시는데…….”
“얀마! 그 작가, 매번 대는 핑계가 그거잖아! 어떻게 둘러 대는 패턴이 전부 다 똑같냐? 너, 설마 그걸 진짜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부장님.”
“원고 안 주면 집이라도 찾아가란 말이야!”
“그게…… 그 작가님은 집으로 찾아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그럼 어쩌라고! 출간일이 바로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는데! 들어온 원고는 고작해야 2만 자뿐이잖아!”
“……죄송합니다.”
내가 부장님에게 할 말은 그저 ‘죄송합니다.’뿐이었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연락해 봤자 딱히 답이 생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같은 핑계만 반복해서 들려줄 뿐.
즉, 원고는 지금 당장 못 준다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다.
한쪽에서는 원고 받아 내라고 하지, 다른 한쪽에서는 원고 없다고 그러지…….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둘 다 꼴불견이다.
나도 작가가 핑계를 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작가와 얼굴 붉혀 봤자 없던 원고가 튀어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작가와 사이만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장에게 대판 깨진 덕분에 오늘도 난 강제 야근행이 결정되었다.
야근.
편집자가 되고 나서부터 야근하는 건 이제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자이언트 킹》 3권 원고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오늘도 내 일을 제대로 하질 못했다.
오늘 저녁에 당장 올려야 할 유료 연재 편수만 10여 편이 되어 간다.
그렇다고 그걸 교정 없이 통째로 올릴 수는 없다.
적어도 1교는 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교정한 후에 작가 수정 원고도 보내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이러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어.”
이 생활을 어떻게 3년이나 해 왔는지 신기할 정도다.
* * *
바깥에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회사로 들어왔을 때, 마침 퇴근하려던 여직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나한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어서 이런 행동을 보일 리는 전혀 없다.
이번에도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시언 씨. 편집부로 택배 와 있던데요?”
“택배요?”
“네, 보니까 책 같아요.”
“견본인가? 알았어요. 고마워요.”
“그럼 수고하세요.”
이로써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작은 택배 상자를 뜯어 봤다.
여직원의 말대로 책이었다. 그러나 견본은 아니었다.
“이건 뭐야?”
다섯 권으로 된 낡은 책이었다.
제목은 《델리피나 전기》.
책을 펼쳐 안에 있는 서지 정보를 확인했다.
그러나 출간 연도도, 출판사명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저자의 필명 하나뿐이었다.
“카인?”
처음 듣는 필명이다.
신인 작가인가?
아니, 신인 필명이 이렇게 오래된 책을 쓸 일은 없지 않겠나.
혹시 몰라서 부장님에게 확인을 받아 보기로 했다.
전화를 걸자, 근처에서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맞다, 오늘 작가님이랑 미팅 있다고 했지.’
미팅에 방해가 되지 않게 빠르게 용건을 묻기로 했다.
“부장님, 카인이라는 작가가 쓴 책이 택배로 왔는데……. 이거, 부장님이 개인적으로 주문한 책인가요?”
-아니, 모르는데. 그런 책 주문한 사람도 없을걸. 그거 말고 다른 용건은?
“없습니다만.”
-그럼 끊어. 나 바쁘니까.
“예, 죄송합니다.”
부장님이 주문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
편집부 직원 중에서도 주문한 이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배달지가 잘못 설정된 걸까?
일단 한번 읽어 보기로 했다.
가끔 자신의 옛 서적을 보내고서 이것을 리메이크로 다시 출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오는 작가들이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글은 미리 읽어 두는 편이 좋다.
그래야 부장님에게 이 책이 리메이크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바로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1권을 꺼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랄까, 재미가 너무 없다.
솔직히 10페이지 정도만 읽고 때려치울 뻔했다.
‘라스’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소설인데, 이야기가 너무 급전개고 상황 설명 묘사는 빈약한 데다가 개연성도 부족하다.
요즘 출판, 연재 시장에선 정말 안 먹힐 것만 같은 요소들이 팍팍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예의상 2권까지는 꾹 참고 읽었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안되겠네, 이거…….”
냉정하게 말해서 ‘안 팔리는 글’이다.
연락처를 알아내 보려 했지만, 어디에도 번호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음? 가만…….’
책 밑에 종이가 한 장 깔려 있다.
“여기 있었네, 번호.”
아주 심플하게 연락처만 딱 적혀 있었다.
‘어이구, 친절하기도 하셔라.’
일단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왜 이런 책을 보냈는지 그 의도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여보세요.
생각보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사뭇 놀랐다.
“예, 안녕하세요. 예민 출판사 강시언 대리라고 합니다. 혹시 카인 작가님이신가요?”
-예, 맞습니다만.
“《델리피나 전기》라는 책 보내셨죠? 저희 쪽에 작가님께서 보내 주신 책이 도착했더라고요. 혹시 왜 보내 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안 팔리는 작가라 해도 상대는 작가다.
정중하게 대하는 게 예의다.
인턴 과정 때부터 숱하게 들어 왔던 교육 내용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카인이란 작가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편집자님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네? 책에 대해서요?”
-예.
“음, 글쎄요.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좀 많이 있어요. 옛날 서적이라 그런지 윤문 과정도 거쳐야 하고, 유료 연재하고 전자책 출간을 원하시면 타이핑 작업도 해야 하고, 또…….”
-내용적인 부분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
리메이크라도 할 생각인가?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친절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초반부터 수정을 많이 봐야 할 거 같아요. 주인공…… 그러니까 ‘라스’라는 주인공이 기연을 접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한다든지 이런 거요. 그리고 도움을 주는 캐릭터들의 개성이 너무 없어요. 캐릭터성을 부각시키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대해서 따지면…….”
-편집자님이라면 올바르게 고칠 수 있습니까?
“올바르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편집자님에게 《델리피나 전기》를 맡기겠습니다. 부디 대륙의 운명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뚝.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델리피나를 맡긴다고? 이 책을 나한테 맡긴다는 소리인가?’
영문을 모르겠다.
* * *
이상한 전화를 받고 난 이후에 집으로 돌아와 바로 잠을 청했다.
씻을 시간도 없었다.
새벽 2시에 집에 왔는데, 씻을 시간이 어디 있나.
그럴 시간에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 두겠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뿌우우우우!
엄청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알람을 이런 소리로 설정해 뒀었나?’
천만에. 요즘 한창 유행하는 걸 그룹의 노래로 맞춰 놨었다. 이런 소리는 생판 듣도 보도 못했다.
소리에 눈이 절로 떠졌다.
그리고…….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목이 잘린 사람의 시체가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으아아아악!”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러 댔다.
몸이 무거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리얼했다.
청각, 후각, 시각, 촉각 그리고 입안에 느껴지는 피 맛, 미각까지 전부 다 살아 있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선임 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내게 소리쳤다.
“로인! 뭐 하고 있냐! 빨리 이쪽으로 와!”
“네? 로인요?”
저는 강시언인데요.
하지만 그렇게 태클을 걸기도 전에 전방에서 퍼져 나오는 엄청난 함성이 내게 위기감을 선사했다.
판타지 소설에서만 접했던 초록 피부의 덩치 큰 오크들이 나를, 아니 우리 인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아무리 꿈이라 해도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았다.
‘일단 살고 보자!’
생존 본능에 몸을 맡겼다.
나를 부른 선임 병사가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병사들이 방패를 들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곳이었다.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쿠웅!
묵직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풀 플레이트 갑옷을 두르고 몸을 날리는 날이 올 줄이야. 스턴트맨도 아니고 말이다.
몸을 피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이들이 낙하했다.
어디서 날아온 불덩이들인가 싶었는데, 뒤에서 로브를 걸친 자들이 하늘로 손을 뻗은 채로 서 있었다.
“저건 뭡니까?”
선임 병사에게 물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마법사 처음 보냐?”
“마법사요?”
“하! 이 녀석 봐라? 머리 부딪치더니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 * *
불구덩이 폭풍이 전장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를 향해 몰려오던 오크들은 불바다 지옥에서 전부 다 생을 마감했다.
정말 리얼한 가상현실이었다.
아니, 솔직히 가상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가 우리에게 외쳤다.
“진영을 다시 갖춘다! 마법 효과가 떨어질 때에 맞춰서 다시 진격할 테니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도록!”
또 저 지옥으로 간다고? 돌았네, 돌았어!
그보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나에게 말을 걸어 준 선임 병사를 찾아갔다.
“저기요.”
“저기? 이 새끼가 돌았나! 선임한테 ‘저기요.’는 무슨 ‘저기요.’야!”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하! 너, 진짜로 기억상실증이냐?”
“아무래도 그런 거 같습니다만.”
기억상실증은 개뿔. 그냥 그러는 척할 뿐이다.
선임 병사는 순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아주 기본적인 것을 알려 줬다.
“난 됐고. 네 이름은 뭔지 기억나냐?”
“모르겠는데요.”
“로인이다, 로인. 네 이름이나 잘 기억해 둬라.”
로인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다.
보아하니 내 몸도 아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아니, 소년의 육신이다.
선임 병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거울을 빌려 내 얼굴을 확인했다.
어린 티가 확 났다.
생긴 것으로 보아서는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제법 잘생겼다.
‘이 녀석, 여자들한테 인기 좀 있었겠는데?’
내가 내 외모에 스스로 빠져들 무렵, 선임 병사가 내 뒤통수를 팍! 하고 때렸다.
“뭐 하냐, 너.”
“얼굴에 뭐 묻었나 살펴보고 있었어요.”
“안 묻은 게 더 이상하겠다, 야. 아무튼 드디어 최종 결전이니까 마음 단단히 굳히고 있어라.”
“최종 결전이라니. 그게 뭡니까?”
“벨라시오닉을 쓰러뜨리는 거다. 마지막 단계야! 놈이 힘을 잃었을 때 총공격을 감행할 거다! 여기서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델리피나 대륙은 끝이야, 끝!”
“…….”
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델리피나.
익숙한 단어다.
어찌 잊으랴? 내가 불과 어제저녁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제목인데…….
카인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그 작자가 지은 책에 등장하는 대륙의 이름도 델리피나였다.
‘그런데 여기가 뭐? 델리피나라고?’
게다가 벨라시오닉이라는 존재도 나온다.
벨라시오닉은 《델리피나 전기》의 프롤로그에 언급되는 대규모 전투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그리고 최악의 전투.
벨라시오닉이라는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다.
신과 가장 가까운 생명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
그 존재가 바로 벨라시오닉이다.
벨라시오닉을 잡기 위해 49개국과 8개의 종족이 연합을 맺었다.
이 연합과 벨라시오닉이 부리는 몬스터 군단이 맞붙은 전쟁은 훗날 라바인 전투라 불리게 된다.
나는 지금, 이 라바인 전투에 강제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것도 소설 속에서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던 무명의 소년 병사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로 소설 속에 들어온 건가?
이런 미친!
나, 《델리피나 전기》 2권까지밖에 안 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