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300화 (300/301)

# 300

에필로그-2

#1

“저, 여기 혹시 무련천가 아니 제황이라는 사람...”

“아빠! 손님이요!”

동철이 머뭇거리며 제황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소녀는 대문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는 쏙 하니 사라져 버렸다. 문제는 그 호칭이다.

“아빠?”

“아빠?!”

누가 봐도 15살은 넘어 보이는 소녀가 제황이라는 이름에 대뜸 아빠라는 호칭을 가져다 붙이니 모두가 아연실색해진 것이다. 그들 중 가장 놀란 건 역시 동철이었다. 뭔가 좀더 물으려 했지만, 소녀는 ‘퐁’ 하고 사라진 후다. 그리고 잠시 후 대문을 열며 나타난 제황을 본 그는 제황의 달라진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동철이 왔냐?”

“너...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타난 이가 제황이라는 것은 알아봤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문제는 지금 눈앞에 있는 제황이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단순히 젊어진 것이 아니라 키도 좀 작아지고 얼굴도 젖살이 다시 올랐다.

마치 과거의 제황을 보는 느낌이다.

“뭐가?”

“너 왜 ... 이렇게...어려졌냐. 그...”

차마 더 이상 말을 못 잇는 동철의 표정을 바라보던 제황이 잠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는 혀를 차며 답했다.

“마누라가 요즘 취향이 변해서...”

“뭐? 그게 무슨...”

“그건 이야기가 좀 복잡해. 아무튼 들어와. 할아버지 오셨어요? 재수씨도 오랜만이고... 네가 제우고 네가 ... 음...얘는 누구지?”

“수아다. 너 산에 들어갈 때는 아직 뱃 속에 있었지.”

“아아, 그렇군. 일단 들어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널따란 마당이 나왔다. 마당이라기 보다는 거의 운동장만한 크기다.

넓적한 화강암들이 박힌 마당을 가로지르니 곧이어 안개 속에서 전각들이 드러났다. 제황은 그것들 중 가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제황이 권제에게 상석을 권한 후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보다 그분은 어디 가셨느냐?”

제황의 안사람이기에 항렬 상으로 따지면 권제의 며느리뻘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이기에 권제는 궁기에게 말을 높였다.

“애들 데리고 잠시 나갔습니다. 제가 불렀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애들...?”

제황의 대답에 뭔가 물으려 한 동철이지만 그의 입은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로 인해 막혔다.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했던 소녀다.

“아빠 손님상 봐왔어요.”

소녀는 몇 가지 과일과 차가 놓인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을 내려놓자 제황이 소녀를 향해 말했다.

“나연아. 인사드리렴. 이분들은...”

제황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자연스러운 부녀의 대화지만 제황이나 소녀나 그리 큰 나이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좀 이질적이다.

“안녕하세요. 첫째인 천나연입니다.”

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지금까지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궁금증을 드디어 폭발시킨 동철이 제황에게 물었다.

“제황아.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아니 그게...”

제황과 나연이라는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던 동철이 이내 머릿속에 솟구치는 물음들을 정리하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작년에 출산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아가씨가 널 아빠라고 부르잖아.”

“맞아. 내 딸”

“맞다고? 몇 살인데!”

“한 살”

“엉?”

“한 살이라고... 뭐 잘못됐어?”

“아니... 그게 뭐냐.”

너무 천연덕스럽게 답하니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면 자신이 미친놈 취급당할 것 같다. 그런데 제황이 또 그렇게 말하니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다. 제황의 안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제황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아니 막말로 이런 소녀 수십 명이 나타나서 제황에게 모두 아빠라고 말을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일행들 사이로 잠시 침묵이 오갔다.

지금 제황이 말한 것을 머리로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받아들여야 할 이유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들이닥쳤다.

왈칵!

첫째라는 나연이 조신하게 열고 들어온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우르르르...

“아빠!”

“아빠아!”

날 듯이 달려 들어온 다섯 소녀가 제황의 품에 안겼다.

“아빠 오늘 엄마가 다은이 때렸어! 다은이 아팠어!”

“아빠! 아빠! 내가 오늘 이거 잡았다! 봐봐! 맛있겠지?”

“아빠! 나 엄마한테 이거 배웠다?”

“아빠! 나 이제 엄마랑 나가는 거 싫어! 아빠랑 놀래! 놀이 놀이!”

왁자지껄하며 제황을 둘러싼 소녀들로 인해 일행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동철의 아들 딸인 제우와 수아는 엄마 품에 안겨 눈만 대롱대롱 뜬 채 그녀들 중 하나가 잡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가여운 토끼를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다.

“두리, 세리, 다은이, 주홍이, 나미 모두 아빠 손님한테 인사드리는 게 먼저 아니니.”

제황이 짐짓 엄한 얼굴로 그녀들에게 말했지만, 그녀들은 제황의 말을 한 귀로 흘렸는지 여전히 자신들의 말만 하기 바쁘다. 과거 지구를 들었다 놨다 하던 제황의 카리스마도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전부 나와!”

그때 방문 밖에서 위엄이 뚝뚝 떨어지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제황에게 달라붙어 있던 소녀들은 언제 자신들이 그랬냐는 듯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그리고 침묵... 마치 한 무리의 소떼라도 몰아친 기분이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신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그 여인은 당연하게도 제황의 하나밖에 없는 반쪽인 궁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는 궁기는 변한 것이 없다.

그녀가 들어오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 일행들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입을 여는 것은 동철과 권제였는데 제황과 궁기는 외부의 소식에 거의 무지했다. 그렇지만 곧 모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황의 핏줄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이다.

“고생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권제의 물음에 제황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이도 저도 요즘 애들 때문에 많이 바빠요.”

“그럴 것 같습니다.”

아직 머리로 이해가 된 건 아니지만 말 만한 처녀들이 제황에게 달라붙어 아빠를 입에 달고 사니 안 믿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전부...한 살이냐?”

동철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집안을 북적거리게 만들고 싶다고 했거든. 안사람이 고생 좀 했지.”

“그러냐.”

고생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역시 신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동철이다.

“그런데 한 살이라면서 저렇게 모두...”

동철이 뒷말을 흐렸다. 고작 한 살짜리들한테 조숙해 보인다고 이야기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저렇게 커보여도 실상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어.”

“그...그래. 고생했겠구나.”

궁기와 제황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동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말 만한 한살 짜리 처녀들 일곱이라니... 그동안 제황이 속세에 나오지 못한 이유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동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철이 오해한 부분이 있었다.

고작 일곱이라면 제황이나 궁기가 그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으리라.

와장창! 콰쾅!

문밖에서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대차게 깨지는 소리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그 소리에 눈을 끔벅이고 있자니 제황과 궁기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내가 할까?”

“아니 내가 갈게. 이놈에 자식들을 그냥...! 잠시 자리를...”

조신하게 고갤 숙인 궁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뿐사뿐 문을 닫고 사라지자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해진 일행들이 모두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순간...모두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멍하니 운동장 한가운데서 펼쳐진 대난투극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곳에는 제황을 닮은 소년 열 두엇과 궁기를 닮은 소녀 열댓명이 뒤엉켜 박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특이한 것은 모두 말은 없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대난투극이랄까? 게다가 싸우는 폼도 막싸움이 아니다. 무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서로 나누는 손속이 장난이 아니다.

특히 한 남자아이는 권제의 무적권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걸 본 권제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너무나 완벽한 동작과 자연스러운 기의 수발... 자신의 밑에서 수십 년을 배운 대사부들이나 보일 완숙미가 보인다.

“모두! 동작 그만!!!”

두 팔을 걷어붙인 궁기가 전각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외치자 싸우던 모두가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우뚝 멈췄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모두 한결같은 공포다.

“어...엄마...”

“엄마가...”

“이열 횡대!”

차차차착!

그녀의 외침에 싸우던 모두가 번개같이 날아와 그녀의 앞에 이열횡대로 모여든다. 가장 첫 번째 자리가 비어 있는데 그 자리는 공중에서 뿅하고 나타난 첫째인 나연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던 궁기가 그녀를 바라본다.

고작해야 몇 초 먼저 태어났다고 첫째라면서 온갖 얌전을 떨지만 그녀도 만만치 않은 망나니다.

“나연! 싸운 이유가 뭐야!”

이유를 물은 건 첫째인 나연에게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앞 열에 서 있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소녀가 손에 든 핏덩어리를 마구 휘두르며 외친다.

분을 참지 못했는지 얼굴이 시뻘겋다.

“남자애들이 토끼 뺏으려고 했어!”

“누가!”

“두리가!”

그녀의 고자질에 두리라는 소년이 외쳤다.

“약 올리니까 그렇지! 우리 놔두고 자기들끼리 엄마랑 소풍 갔으면서!”

“그건 너희끼리 싸워서 외출금지 당한 것 때문이잖아!”

“너! 이씨!”

“흥! 너희 아까 집 밖으로 나가서 손님들 몰래 훔쳐본 거 일러버릴꺼야!”

“야야! 쳐쳐!”

“엄마! 저것 봐! 으아아앙!”

울고 때쓰고 고함치고 싸우고 난장판이 따로 없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에 손을 올린 궁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쳤다.

“모두 시끄러! 뭘 잘했다고 울려고 그래! 그리고 두리 너!”

궁기가 한차례 일장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동철이 그의 뒤에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제황에게 물었다.

“쟤들도... 다 한 살이냐?”

“응.”

“모두 몇...?”

“스물...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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