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98화 (298/301)

# 298

함정에 걸린 맹수

#1

쾅! 쾅쾅쾅!!! 콰콰쾅!!

연이어 터지는 폭음 소리와 검고 붉은 빛줄기가 교차하는 속, 고작 굴절되어 날아가는 빛무리에도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일어난다. 제황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큭!”

“좀 더 버텨봐!”

쏘아져 날아가는 제황의 등 뒤에 나타난 룰러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황의 칼날과 같은 팔꿈치 공격과 그를 뒤따르는 붉은 화살 한 대가 그를 노렸지만 그 화살은 룰러의 손에 붙잡혀 파삭하고 박살나 버렸다.

“이게 끝인가!”

룰러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히 속도가 빨라지거나 그 신력이 강력해져서가 아니었다.

이전이었다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전투를 어느 정도 조율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저돌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처음 맞았던 복부에는 아직도 구멍이 뚫려 있다.

뱃속을 한번 뒤집어 놓은 것을 모자라 주위에 어린 검은 기운이 그의 재생을 방해하고 있다.

퍼퍼퍽!!!

“큭!”

“하하하!”

등을 얻어맞은 제황이 몸을 회전시키며 반격의 발을 뻗었지만 룰러는 광소를 터뜨리며 그 발을 그대로 잡았다. 그의 전신으로 검은 뇌전이 솟아오르자 제황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으지직!

뼈와 근육이 꺾여 들어가는 기음과 함께 제황의 다리가 섬뜩하게 비틀어졌다. 비명을 들을 새도 없이 다리를 붙잡은 룰러가 그를 곧장 땅으로 내동댕이쳤다. 마치 대포의 포탄처럼 날아가 쳐박히는 제황이다.

콰아아앙!!!

츠츠츠츳...

룰러의 두 손에 검은 에너지가 뭉쳐 들었다. 대기가 일그러지며 모여드는 힘의 양을 반증한다. 응축과 회전을 반복하던 그것이 이윽고 기다란 창으로 변화했다.

“이것도 먹어라!”

그는 그것을 주저 없이 제황이 처박힌 땅으로 집어 던졌다. 부딪힌 순간 소리는 없었다. 순간 발생한 막대한 압력이 진공상태를 만들며 폭음 소리까지 집어 삼키는 수준... 부딪히는 순간 발생한 거대한 폭발이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쿠르르르...

공중에 뜬 룰러는 오만한 표정으로 발밑을 바라봤다.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엉망으로 망가져 쓰러진 제황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피했는지 그의 옆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상태는 충분히 심각했다.

쌍신합일을 통해 이뤘던 변신도 풀린 상태다. 아물어가던 복부는 다시 피가 터져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고 흉하게 부러진 다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

“큭큭, 크하하하하!”

룰러는 참을 수 없는지 배를 붙잡고 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지구의 최강자를 꺾은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다크어스의 지배자이자 신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본질은 끊임없이 전쟁과 전투를 갈망하는 전쟁기계였다. 한참을 승자의 포효를 내지르던 그는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렇지만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군.”

본체의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지구 정복을 위해 아끼고 아꼈던 힘들까지 모조리 끌어다 쓴 덕분에 다크어스로 돌아가 이제 그는 한동안 다시 힘을 비축해야 한다. 전투는 승리했지만, 원대한 뜻은 꺾였다. 지구의 최강자인 저놈이 노렸던 것이 이것이라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눈가를 실룩인 그가 손을 들었다.

“상으로 네놈은 확실히 소멸시켜주지.”

또다시  검은 기운으로 만들어진 긴 창을 뽑아 들고 땅에 휴지처럼 구겨져 있는 제황을 향해 겨눴다. 이제 이 한방으로 놈은 끝이다. 그가 서슴없이 창을 던지려 할 때다.

“설마 벌써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비틀비틀 일어나는 제황을 보며 그는 손을 멈췄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그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이 깨끗하게 나아버렸다. 그뿐일까?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마나의 기세가 그의 두 눈에 담긴다.

“너... 힘을 숨기고 있었군.”

#2

궁기가 보유한 신화중 이런 것이 있다.

-진실을 가리는 힘[SS급]

주로 제황이 타인의 말의 진위여부를 가릴 필요가 있을 때 궁기에게 부탁하는 신화다.

무려 SS급 신화를 거짓말 탐지기 따위로나 쓰지만, 진실을 가리는 힘이라는 신화의 진짜 능력은 현실이 일어난 진실을 거짓으로 조작해 버린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단순히 이목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인과의 법칙을 속여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 한계는 분명했다. 무려 SS급에 달하는 신화 답게 소모되는 신력도 막대해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 소유자와 관련된 진실 정도는 왜곡이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룰러 또한 신이기에 지금 제황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금세 간파했지만, 그것이 뭘 뜻하는지 알기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의도가 뭐지?”

룰러는 공격을 중단했다.

전의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신의 힘으로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 내제된 신력이 많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최후에는 자신의 승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전투하는 내내 들던 조바심의 실체를 확인해야겠다.

룰러의 물음에 제황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무슨 의도?”

“네 녀석이 시간을 끄는 이유 말이다. 설마 차원이 닫히면 내가 이 지구에 갇혀 오도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의 말에 제황은 피식 웃었다.

룰러가 제황을 파악하는 만큼 제황도 룰러를 파악하고 있다.

신위로만 따지면 거의 동등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할 만한 존재다.

저 정도의 신이라면 차원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제황은 신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상당한 힘을 소모했기에 불가능하지만, 그 자신이 룰러에게 당한다면 어차피 지구는 양 떼사이에 사자를 풀어놓은 꼴이 되리라.

그럼에도 제황이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적에게 떠벌릴 이유도 없다.

전투에서 말은 불필요하다. 오로지 생사를 가르는 결과만 있을 뿐이다.

“설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가?”

제황이 천천히 전투자세 취했다. 그러자 룰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내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말과 함께 룰러의 손이 제황을 향해 뻗었다. 동시에 그를 짓눌러오는 엄청난 압력! 제황이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5m의 땅이 움푹 꺼져버렸다.

“수만 년을 싸워오며 난 그보다 많은 상대가 가진 힘을 내 것으로 흡수해왔다. 그들이 가졌던 힘들은 나조차도 모두 기억하기 귀찮을 정도로 많은 능력들이지. 그리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슈슈슉...

“큭...”

제황의  두 무릎이 꿇려지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굴욕적인 자세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는 엄청난 압력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룰러의 몸 주위로 수십 대의 검은 화살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네 능력 따위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윽”

룰러의 몸 주위에 떠 자신을 노리고 있는 화살들을 바라보며 제황이 신음성을 삼켰다.

승자의 여유마냥 그것을 바라보며 룰러가 말했다.

“네가 뭘 기다리는지는 단지 내 궁금증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아니 이제는 그것도 별로 알고 싶지 않군.”

룰러는 이제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죽...?”

땅바닥을 비비적거리고 있는 제황을 향해 마지막 손짓을 하려던 룰러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넌 누구!?”

퍼어어어어엉!!!

“커억!”

그러나 그는 마지막 말도 맺지 못한 채 그대로 날아가 단단한 화강암바위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수 개의 바위가 박살나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커억... 이게 ...무슨...”

룰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당한 너무나도 충격적인 공격에 몸의 제어가 되지 않는다.

상대의 공격은 신의 힘이나 마나 따위는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물리력이었다.

문제는 그 물리력이 너무나도 강력하다는 것! 그의 몸을 두른 수십겹의 방어체계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그는 눈을 들어 자신을 두들긴 존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은색의 짧은 단발을 한 하얀피부의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을 두들겼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녀린 팔을 가볍게 돌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넌 누구냐!”

그의 외침에 땅에 쓰러져 있던 제황을 일으켜 세워주던 그녀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바벨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걸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하나?! 너 같은 존재는 지구에 없었다!”

룰러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를 연구했다.

방법이야 많았다. 차원을 넘어간 그의 권속들이 정보를 모아오기도 하고 다크어스를 침범한 인간들을 잡아다가 정보를 파악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모으고 모은 정보 속에 저런 존재는 없었다. 저렇게 강력한 물리력을 지닌 존재는 말이다. 그의 물음에 바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죠.”

“??”

“난 당신이 말하는 다크어스의 존재니까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안되긴요? 그동안 저를 지겹게도 괴롭히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 저 바벨을 잊다니 너무 섭섭하네요.”

“바벨?”

룰러는 뇌리를 스쳐가는 하나의 단어에 주목했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 아주 깊은 곳에나 존재할 그런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명석한 룰러의 두뇌는 모든 상황을 파악해 냈다.

“큭, 기다리던 게 저것이었나? 크···. 제대로 외통수를 맞았군.”

조금 전 공격력을 감안할 때 사실상 자신이 저 둘을 이기기는 요원해 보인다. 좀 더 힘을 사용하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판단을 마친 룰러는 다크어스게이트가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이기기 위해서는 다크어스로 돌아가 힘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어엇...”

다크어스 게이트의 반투명한 너울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지구에 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룰러가 게이트를 바라볼 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황이 말했다.

“게이트는 이미 너와 한창 싸울 때 막아놨지.”

“!!”

제황의 말에 룰러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제황 딴에도 속이느라 고생한 부분이다. 게이트로부터 다크어스의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룰러가 파고들었다면 꽤 난감했으리라.

“내가 시간을 끈 이유를 물었나?”

“...”

제황의 말에 룰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굳이 그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제황이 무한고에서 꺼낸 비천궁과 비천격을 꺼내 땅에 꽂았다. 그리고...

촤아아아!

두 신물로부터 뻗어 올라간 붉은 빛이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산 곳곳에서 솟구쳐 오른 푸르고 검은 빛과 하늘에서 만나 하나가 되었다.

슈우우...

그리고 세 개의 빛이 맞물린 하늘에서부터 장막처럼 감싸여오는 황금빛 서기가 백두산 전체를 감싸버린다.

“네놈을 확실히 잡을 덫이 필요했거든. 후... 백린이 좀 늦었군.”

“끄으으...”

순간 룰러는 지금껏 맹렬히 쏟아져 들어오던 신력들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원흉은 지금 이 산 전체를 두른 황금빛의 장막이다. 성산을 수호하는 세 개 가문... 무련천가, 천주백가, 창룡신가의 힘으로 발동하는 백두산에 잠든 고대의 절진이 천년의 시간을 격해 이곳에 나타나 다크어스의 지배자 룰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놈!!!”

룰러의 몸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이 지금껏 보였던 그 어떤 순간보다 강렬했지만, 제황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것은 고작  덫에서 빠져나가려는 맹수의 발버둥일 뿐이다. 제황의 몸에 다시금 쌍신합일의 신화가 발현했다. 그 또한 지금부터는 전심전력으로 룰러를 상대할 생각이다.

-이제 끝이네.

-응.

-마지막까지 힘내자.

-당연하지! 그동안 당한 걸 갚아줄 시간인걸?!

그의 영원한 반쪽인 궁기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며 제황은 룰러를 바라봤다.

이제 진짜 모두 끝낼 때다.

“하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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