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96화 (296/301)

# 296

쌍신합일...그리고-1

#1

“크읏...”

룰러는 감전이라도 당한 듯 우뚝 멈췄다.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확실히 알 수 있다. 놈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의 방해를 뚫고 이렇게 빨리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유일하게 그에게 상대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든 첫 상대다.

룰러는 섬뜩함이라는 감정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놈은 그가 지금까지 싸운 모든 적들의 데이터와 비교할 때 가장 골치 아프고 상대하기 힘든 놈이었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 노련한 사냥꾼이며 전력을 꽁꽁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그 상대가 상대이기에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와의 본격적 전투에 신중 하려 했다.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배치했다. 최대한 힘을 빼놓고 상대를 뒤흔들어 놓은 뒤 전투를 치루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지구로 귀환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어긋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제황 같은 놈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이미 대비하고 있던 룰러였다.

“빠르군.”

“운이 좋았다.”

지금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재수 없는 대답이다.

‘빌어먹을...’

부우우욱! 파아앗!!! 퍼어엉!

검은구체가 급격히 확장됨과 동시에 폭발했다.

실제로 폭발한 것은 아니다.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는 표현이 적당하리라. 그것들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는 기괴한 형태의 존재가 나타났다. 덩치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물론 검은 구체에 대비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뿐이지 그 전장은 이미 100미터를 훌쩍 뛰어넘어 있다. 온통 시커먼 그것은 사족보행의 짐승을 닮았는데 등에는 인간의 모양과 비슷한 수십 개의 팔이 달려 있다.

드드득... 퍼어엉!

피륙을 지닌 존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룰러가 땅을 박찼다. 그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땅이 폭발하듯 흩날리고 음속을 아득히 돌파한다. 한참이 떨어진 곳에 나타난 룰러는 아직 완전히 구성되지 않은 외골격을 완성해 나갔다. 단순한 곤충의 외골격이 아닌 촘촘한 비늘로 촘촘히 짜여진 외골격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의 방어체계다.

그 무엇보다 단단하며 무엇보다 탄력 있고 또한 재생력이 강하다.

투투툭...

등부위가 둘로 갈라지며 딱지날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투명한 색의 네 쌍의 날개가 나타났다. 얼핏 연약해 보이는 날개지만 다크어스에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의 피부보다 단단하다. 다리 외에 위로 뻗은 수십 개의 손은 물리공격용이 아니다.

그는 마도시대의 고대 마법에도 능통했다.

그가 상대했던 존재들은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들도 다수 존재했고 그들의 장점 또한 모두 흡수했다. 그들의 세포 속에 심어진 마법회로들을 모두 흡수하는 한편 마도지식의 흡수를 통해 고대마법까지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이 손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되는 부분은 마치 드래곤의 그것을 닮아있다. 검은 피부에 여섯 개의 뿔이 달린 그것의 입에는 불길한 색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본연의 전투형태다.

가장 완벽한 방어력과 공격력을 지녔으며 모든 계통 공격에 대응할 수 있다.

준비를 끝내자 룰러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큰 고비는 넘겼다.

변신을 할 때가 가장 취약한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를 육안으로 확인한 순간 그는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기보다는 조금 전까지 공격당하고 있던 궁기의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고생했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궁기는 툴툴거리며 제황의 품에 안겼다.

그녀 자신이 제황의 당부를 어기고 대뜸 나서기는 했지만, 투정 부리기 바쁘다.

“몸은 괜찮아?”

“이게 괜찮아 보여? 아까 옆구리도 뚫렸어!”

칭얼거리며 더듬더듬 옆구리를 보여줬지만,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다. 그렇지만 아프다는 듯 연신 주무르자 제황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룰러의 입장에서는 참 아니꼽기 이를데 없다. 자신도 그녀에게 두들겨 맞은 건 마찬가지다.

“내가 혼내줄게.”

“당연하지. 저 변태 같은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저 더러운 촉수 휘두르면서 자신과 하나가 되자고 하는데 소름이 돋아 죽을 뻔했어. 감히 누구를 넘봐!”

“그래그래. 잘 참았어.”

제황이 머리를 슥슥 매만져주자 궁기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의 손길을 느낀다.

룰러가 보기에는 참으로 같잖은 장면이다.

“당한 건 돌려줘야겠지?”

“당연하지!”

“들어와.”

“응!”

궁기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제황과 하나가 된 것이다.

이제 이곳은 궁기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다. 제황 또한 궁기와 함께 할 때 가장 마음이 안정이 된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제황이 고개를 돌려 룰러를 바라본다.

잠시간의 대치...

둘 사이에 대화는 없다. 룰러가 제황에 대해 경계했던 만큼 제황도 룰러의 모든 것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둘은 서로 닮았다.

“재수없는 놈”

그것이 둘의 결론이다. 둘은 일단 전사라기보다는 전략가다.

이길 수 있는 전투를 만들고 마무리 지으려 한다.

힘과 기량으로 힘껏 부딪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 승리를 만들어가는 타입이다.

주고받은 것이 있는 만큼 서로간에 대화는 필요 없다. 서로 얼마나 준비가 철저했느냐만이 승부를 가른다.

그리고 제황은 아직 룰러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 많다.

-그거 한번 써보자.

-설마 그거? 으으음

제황의 말에 궁기가 잠시 망설인다.

제황이 말한 그것은 완성했을 때 기분이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좀 기분이 이상할 뿐이다. 그렇지만 저 룰러를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좋아.

궁기의 허락이 떨어졌다.

제황은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와 후드를 벗어던졌다. 이제부터 이것은 필요가 없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최대한 가벼운 몸이 되었다.

그리고 제황은 천천히 자신의 신화를 깨웠다.

궁기의 주인[S급]

궁기와 신의 이름으로 이어졌다는 증표다. 둘이 영원히 하나라는 뜻, 궁기 또한 자신의 신화를 꺼내들었다.

궁신의 동반자[S급]

영혼 한자락까지 공유한다는 궁기의 증표다.

두 개의 신화가 일깨워졌다. 그 시작은 둘이었지만 그 뜻은 하나를 지향하는 두 개의 신화가 나란히 섰다. 그리고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했다. 인세에 다시 없을 기사, 그리고 새로운 신화가 천천히 떠오른다.

쌍신합일[SSS급]

두 신화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두 신이 하나로 이어진다.

투툭...투투툭...

제황의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붉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의 두 귀가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올라섰다. 송곳니가 길게 자라나며 두 눈이 길게 찢어진다. 마치 엘어스의 수인족과 비슷한 모양새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진정한 변화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쌍신합일이라는 신화는 단순히 일더하기일이 아니다.

둘의 모든 장점들이 합쳐짐과 동시에 둘의 신성마저도 하나가 된다. 이것이 궁기가 이 모습을 싫어하는 이유다. 이전이 단순히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쌍신합일을 이룬 합일체에서는 둘의 생각까지 하나가 된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둘의 신화까지도 모두 사용가능하다.

말 그대로 전혀 다른 상위의 신이 또 하나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었다. 둘 다 조금 더 강해질 방안을 강구하다가 이전에 궁기가 제황에게 걸었던 ‘화신체’ 라는 버프를 업그레이드 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다. 제황의 신격이 궁기와 비등하게 올라서면서 화신체가 소용이 없게 되었기에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을 개량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둘의 신화가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단순히 둘이 하나가 되는 수준이지만 두 신이 하나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제황의 상태창에 SSS급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엄청난 상승이다.

제황의 변화에 룰러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퍼어어어엉!!!

순간이동하듯 나타난 제황의 몸이 룰러의 측면을 노린다.

내지른 제황의 주먹에 궁기의 붉은 강기가 서렸다.

수배로 증폭되어진 그것은 룰러는 감히 얕잡아 볼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몸집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그것을 피해내지만,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콰콰!!!

순식간에 수십 번의 주먹이 내질러지는데 그 하나하나가 궁기의 필살기와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피해내며 룰러의 몸도 변화가 일어났다. 껍데기 사이가 꾸물거리더니 기습과도 같은 수십 줄기의 촉수들이 뿜어져 제황을 공격을 방어해낸다.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지며 붉은강기를 막아간다.

그것을 본 제황의 눈이 꿈틀한다. 궁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길게 뻗어진 촉수들이 룰러의 몸을 호위하듯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재미있는 수법을 쓰는군. 놀아주지.”

제황의 몸 주위로 공기가 이지러지며 화살이 생성되었다. 바벨탑을 탐험하며 몬스터들을 싹쓸이했던 그것이다. 문제는 그 숫자다.

하나 둘 여섯 열 스물 마흔 백! 이백!

화살이 분열하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수백 개가 제황의 몸을 호위하듯 둥둥 떠 있다.

제황은 룰러를 향해 다시금 돌진해 들어갔다. 촉수들이 제황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이번에는 제황의 몸을 둘러싼 수백 개의 화살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요격해 버렸다. 아니 숫자는 이쪽이 더 우세하다.

화살은 단순히 요격이나 방어만이 아닌 다양한 수단으로 쓰여졌다.

순식간에 다섯 개의 화살을 밟은 제황의 몸이 순간이동 하듯 룰러의 등에 나타났다.

급격한 속도의 완급조절이 만들어 낸 찰나의 빈틈으로 제황의 주먹이 꽂혔다.

퍼어어어어엉!!!

룰러의 외골격에 제황의 주먹이 찍혔다.

단순히 명중시키는 것이 아닌 그대로 박혀 들어갔고 거기서부터 제황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학살의신[SS급]

심판하는 자[S급]

제황의 신화가 그의 주먹에 머금어지고...

모든 것을 베는 힘[S급]

모든 것을 물어뜯는 이빨[A급]

요괴를 잡아먹는 위장[A급]

궁기의 신화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지지직! 퍼퍼퍼퍼퍼펑!!!

단 일격이었을 뿐이지만 그 일격으로 주먹이 파고든 주변에 모든 것을 씹어먹으며 소멸시켜 버렸다.

“크아아아악!”

룰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뺐다.

룰러 또한 신이기에 신성이 깃든 육체였고 평범한 마나는 그의 몸에 흠집조차 줄 수 없다.

그렇지만 방금 몸을 쑤시고 들어온 적대적인 신화들은 그의 신성을 탐욕스럽게 물어뜯고 소멸시켜 버렸다.

덩치의 차이 자체가 다르기에 룰러의 한걸음도 큰 차이를 만든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룰러다. 뼈아픈 일격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 상처는 이미 아물어가고 있다. 그러나 룰러의 속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억지로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지독하군.’

회복을 위해 투입한 신력까지 게걸스럽게 소멸시키는 바람에 필요 이상의 신력을 소모해야 했다. 껍데기는 복구가 끝났지만, 고통은 여전하다. 같은 신격을 지닌 존재의 공격이기에 상처가 더욱 오래간다.

“크큭, 꽤 아프군.”

그러나 룰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놈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전투스타일을 지녔다는 것을 상정했을 때 작은 약점이라도 보이면 집요하게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전투에 있어 자신의 정보를 최대한 감추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  일격을 제대로 꽂았지만 영 반응이 신통치 않다고 느낀 건지 제황이 자신의 주먹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인다.

‘좋아.’

의도가 먹혔다고 생각한 룰러가 반격을 준비했다.

반전을 주기 위해 밑밥은 오래전에 깔아두었다. 그것이 반격을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기에는 조금 아깝지만 일생일대의 대적을 마주한 룰러는 지금 그것을 아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퍼서석!

기습적으로 땅에서 솟구친 검은 기운이 멈춰선 제황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제황이 나타나는 순간 구체를 찢으며 사방으로 토해놓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룰러를 감싸고 있던 껍데기가 아니다. 그 하나하나 또한 룰러의 분신과도 같다. 땅속에 잠복해 있던 그것들이 튀어나와 검은 기운에 휩싸인 제황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쾅!!!!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