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최후의 전투-3
#1
쿠르르릉
게이트가 있던 곳 주변반경 500m가 쑥대밭이 되었고 그 전면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되었다.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깨끗이 쓸려나갔고 궁기만이 홀로 승자라도 되는 듯 공중에 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상 그녀는 지금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어디지.’
빗나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실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룰러 또한 피하기 보다는 막아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룰러의 종적도 놓쳤다. 가루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게 파여있는 크레이터가 그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궁기는 그대로 몸을 뽑아 공중으로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울려오는 맹렬한 경고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곳으로 흑색의 바람이 휘젓고 지나갔다. 아니 흑색의 바람이 아니다. 너무나도 빨라 음속마저도 돌파한 한 가닥의 촉수다.
위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가공할 속도의 촉수들이 그녀가 위치한 공간을 헤집고 지나갔다.
뜻밖의 기습에 끝내 옆구리를 두들겨 맞았고 공중에서 비틀하는 순간 먹이를 낚아채는 구렁이처럼 한가닥 촉수가 그녀의 옆구리에 사정없이 쑤셔 박혔다.
“크허어엉!”
콰아앙!
땅에 떨어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서둘러 본체를 해제했다. 옆구리에 꽂혀 있던 촉수가 뽑혀 나간다. 그녀가 본체를 해제한 이유는 그 촉수가 찰나의 순간 그녀의 마나를 흡수해갔기 때문이다. 아니 마나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근원정보와 신성까지 흡수하려 했다.
계속해서 본체를 유지하려 무리하게 버텼다면 종국에는 모조리 뽑혀 나갔을 것이다.
“헉헉...”
옆구리를 부여잡은 궁기가 뒤로 비칠비칠 물러났다. 그녀의 전면으로 검은 구체가 스르륵 하고 생겨났다. 마치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나타난 그것이 그녀를 비웃는 것 같다.
“마음에 드나? 투명화라는 스킬이다.”
검은 구체의 한가운데가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인간의 형체를 지닌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뚜벅뚜벅 걸어 나온 존재의 얼굴을 확인한 궁기의 눈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놈은 재수 없게 그녀의 주인인 제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드득
“감히 누구의 얼굴을 흉내내느냐.”
궁기가 이를 갈며 외치자 룰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음, 이거 별로인가? 난 단지 이놈이 지구의 최강자이기에 따라해 봤을 뿐이다.”
“너 따위가 흉내 낼 존재가 아니다.”
그녀의 말에 룰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런가. 뭐 그런데 내가 네 말에 따를 이유는 없는 것 같군.”
룰러가 씨익 하고 미소를 짓는다.
“넌 나와 곧 하나가 될 테니까.”
“헛소리!”
가벼운 도발이지만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궁기가 소리쳤다.
“죽어!”
채챙!!!
그녀의 양팔 위로 붉은 강기가 씌워졌다.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녀의 두 손이 열십자로 교차했다.
‘십육절참살강’
과거 저스틴포인트에서 오크를 상대로 보였던 것보다 수배 아니 수십 배 더 거대하고 촘촘한 강기의 장막이 생겨나 룰러를 덮쳐들었다.
그녀의 두 손에서 시작된 참격은 대지에 수십 줄기의 고랑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선 룰러는 물러서지 않고 두 손을 교차하는 것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의 몸에는 흠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것도 막아봐!”
공중에서 내리꽂히며 그녀의 뒤로 당겨진 주먹으로 수십 개의 붉은 강기가 교차하며 맹렬히 회전했고 그 속으로 폭풍과 같은 기세가 담겼다.
‘패천일원참살강!’
처음이 초광역기라면 후자는 단일개체에 가할 수 있는 인간형태의 궁기가 가진 최강의 기술이다. 스녀의 주먹에서 뻗어나간 강기의 기둥이 룰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닿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그녀의 신성이 담긴 절정의 대인공격! 룰러는 미처 그것을 생각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울려 주기도 힘들군.”
강기가 닿기도 전에 룰러의 얼굴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동시에 그 형체가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궁기의 패천일원참살강은 애꿎은 땅을 강타했고 검은 구체로부터 뽑혀 나온 촉수들이 그녀를 순식간에 포위해버렸다.
“큭...”
궁기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피할 곳이 사라졌다. 몇 가닥의 촉수가 그녀를 희롱하듯 주위를 유영한다.
“이렇게 멍청하다니 실망이야. 이런 흔한 덫에도 넘어가다니”
검은 구체 한 부분에서 불쑥 튀어나온 룰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어!!!”
궁기의 전신이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룰러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불쌍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자신의 위기를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수천 가닥의 촉수가 일제히 궁기를 향해 꽂혀 들어갔다. 피할 곳은 없다.
그러나 룰러가 상황파악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궁기의 머릿속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오히려 외통수를 맞는 건 룰러다.
“지금...”
-알겠습니다.
둘이 있는 하늘 위로 붉은빛이 반짝했다. 그리고...
지이이이이잉!!!
엄청난 양의 열에너지가 룰러의 본체를 강타했다.
대기권 밖에서 쏘아대는 위성레이저 폭격이다. 하나가 아니다. 공중으로부터 내리꽂히는 레이저 포격은 무려 아홉! 그것이 룰러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두들겨 댔다. 다크홀은 제황에게 자신들이 가진 잠재력을 아낌없이 뽐냈다. 미국방부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쏘아올린 모든 레이저위성을 모두 제황에게 배팅한 것이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룰러에게 대단한 타격은 입히지 못하지만, 찰나의 시간을 번 궁기가 품에서 한자루의 총을 꺼냈다. 전면에 엠플이 달린 기묘한 총이다.
타앙!!!
퍼어억!
쏘아진 총알은 그대로 구체의 중심 룰러의 가슴에 작렬했다.
보라색의 액체가 담긴 일종의 주사총이다.
회심의 일격을 먹인 궁기는 전신에 강기를 두른 채 촉수의 벽을 뚫고 탈출했다.
룰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궁기가 허리에 손을 얹고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맛이 어떠냐!”
“큭, 이게 뭐지?”
룰러가 자신의 가슴에 박힌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엠플 내에 있던 액체는 이미 모두 주입된 상태다.
“너랑 비슷한 놈을 만드는 작자들이 가지고 있던 특제살충제지.”
“살충제? 큭...”
고개를 갸웃하던 룰러가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를 감싸고 있던 구체들이 마구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경련이 일어나며 촉수들도 힘을 잃고 흙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미국애들이 가진 너 같은 종류에 대한 연구자료가 한가득이더라. 한 방 먹일 물건 있을까하고 물어봤더니 대뜸 그걸 주더군.”
예전 엘이 미국에서 깽판을 칠 때 미국이 꺼내든 비밀무기 중 하나가 변이체들이었다.
비록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룰러의 기본 메커니즘을 공유하는 그것에 착안해 미국 쪽에 룰러를 상대한 무기에 대해 문의를 했고 미국에서는 유사시에 변이체들을 단숨에 삭제시켜버릴 수 있는 액체를 무적성에 제공했다.
“크으윽!”
검은 구체 곳곳이 검은 먼지가 되어 부스스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독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독 같은 것에 당할 룰러가 아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독보다 치명적이다.
“끊임없이 흡수하며 진화하는 변이체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공략하는 약이라고 하더라. 뭐라더라 암세포를 기반으로 하여 진화의 엔진을 무한복사시켜버린다는데 뭐 내가 그런 복잡한 걸 기억할 필요는 없고 어때! 맛이!”
“크흑..”
꿀룩꿀룩...
검은 구체는 마치 보이지 않는 불에 타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먼지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워낙 그 크기가 거대하여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것은 조금씩 가속되어 갔다.
“뭐해? 놀아!”
궁기가 손에 든 무전기에 대고 외치자 절도있는 대답이 들려왔다.
-무차별 폭격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츳!
지이이이이잉!!!
하늘로부터 다시금 시작된 레이저 포격이 룰러의 곳곳을 두들겨 댔다.
한 방 먹였다고 방심하지 않는다. 제황을 닮아 알뜰하고 효율적인 전투를 지향하는 궁기는 레이저위성이 놀려두지 않았다.
궁기는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그녀 또한 다시금 본체로 돌아가려는 것...그러나 그 시도는 룰러의 웃음소리로 인해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크윽...크...크...크하하하하하!!!”
룰러의 광소를 터뜨렸다.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는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하는 중이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역시 지구를 택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어.”
슈우욱...
그 말과 함께 둥근 구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며 구체를 감싸는 외부가 단단하게 변해갔다. 그 단 한 순간의 변화로 위성레이저의 열은 더 룰러에게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그 어떤 열에너지도 방어해내는 외골격이다.
푸슉...푹...푸푸푹...
구체의 밑으로 수십 개의 날카로운 곤충 다리가 솟아났다. 마치 거미의 그것처럼 생긴 그 다리에는 칼날 같은 털이 수북하게 솟아났다.
“그리고...”
룰러는 가슴에 박힌 엠플을 뽑아 바닥에 툭 던졌다.
“그리 영양가 있지는 않았지만, 꽤 재미있었다. 의도적으로 열성의 변이DNA를 주입하는 공격 따위는 이미 과거 수만 번이나 지겹게 당해본 것이지. 이런 원시적인 시도 따위 의도는 좋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아.”
룰러의 몸이 서서히 구체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공격해 보지. 더 놀기 지겹거든.”
룰러의 몸이 완전히 사라져 머리만 남는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버텨봐!”
쫘아아악!!!
구체의 위로 수십 가닥의 촉수가 뻗어 올라왔다. 이전에 보여줬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양. 문제는 숫자다. 그 촉수들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퍼어어어엉!!!
“크으윽!”
보이지도 않는 뭔가에 두들겨 맞아 궁기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콰앙!!!
궁기의 몸이 바위에 박혀 들었다.
평범한 존재라면 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곧장 몸을 뽑아 그곳에서 벗어났지만 룰러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쉬쉬쉬쉬쉬쉭! 퍼퍼퍼퍼퍼퍼펑!!!
“크으으으윽!!!”
촉수는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졌다.
음속 따위는 아득이 초월할 그야말로 극초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열 개의 촉수가 상하좌우를 마구잡이로 두들기자 궁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서서 버티는 것뿐이었다. 회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나마 신성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최대한 버티고는 있지만 촉수가, 닿을 때마다 보호막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다.
“얌전히 잡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까고 있네!”
“으하하하!”
룰러의 광기 서린 웃음소리와 함께 촉수가 더욱 빠르게 그녀를 두들겨댔다. 궁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방어막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그녀의 몸을 간신히 덮을 크기까지 줄어들어 버렸다.
푸푸푹...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러지던 촉수들이 그대로 궁기의 방어막으로 박혀 들었다. 그녀의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이내 머리부분이 드릴과 같이 변해 그녀의 방어막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쿠쿵...쿠쿵...쿠쿵...
룰러의 본체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치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둔 것처럼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쫘아아아악!
단두대의 그것과 같은 날카로운 면을 지닌 수십 개의 촉수들이 뽑혀 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궁기의 눈에는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가닥 미소마저 지은 채 룰러에게 말했다.
“나 건드리면 우리 제황이가 많이 화낸다?”
“크하하, 그런가? 그런데 어쩌지? 놈이 이곳까지 오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내가 왜 이 오지로 왔다고 생각하나. 녀석들의 텔레포트 마법 능력을 믿나 본데 마도 지식은 나도 뒤지지 않는다. 텔레포트라는 것은 한번 갔던 곳에 한하지. 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난 없을 것이다. 아. 혹시 나중에 마주칠지도 모르니 놈에게 남길 말은 없나? 놈이 넘어오면 내가 전해주지.”
룰러의 조롱을 섞어 궁기에게 말했다.
그러나 궁기는 오히려 그 말에 파안대소하며 답했다.
하필 이곳을 목적지로 삼은 놈이 불쌍할 뿐이다.
“그냥 직접 말해. 변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