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92화 (292/301)

# 292

수싸움-2

#1

다른 일행들은 한가한 가운데 그나마 바쁜 것은 백린이었다.

지금 백린은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단 그 대화가 머릿속으로 나눈다는 것이 특징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여자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한 백린이다.

웬 뜬금없는 설명이냐고 묻겠지만 이 여성은 충분히 들을 자격이 된다.

-바벨양?

-제 본래 이름은 아니지만, 어차피 발음하기 힘드시니 어쩔 수 없네요. 아, 그 이름도 나쁘지 않군요. 바벨양이라...

-고대인의 언어는 아무래도 발음이 힘들더군요. 바벨양께서는 한글을 잘하시네요.

-제게는 쉬운 일이에요. 게다가 당시에도 유사언어는 존재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글이라는 것이 좀 더 원형에 가깝다고 할까요? 그러니...

-흠흠, 그보다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그녀는 뭔가 말을 길게 하기를 좋아했다.

상당한 세월동안 혼자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백린은 그 말을 끊었다.

-아. 네. 대략 3시간 정도 걸리겠네요. 차원장치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가용 에너지가 50% 이상 되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제 몸이 너무 난장판이 돼서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제 몸을 좀먹던 것들을 모두 청소해 주셨으니 3시간 후면 가능할 거에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오랜만에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지성체를 만났는데 고작 3시간밖에 볼 수 없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그녀의 말에 백린은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다. 아니 존재라고 부르기도 모호하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이 고대인의 던전 자체 아니 그녀의 말로는 ‘바벨탑’ 이라고 부르는 곳을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차원을 분리하기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은 고대인들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총아라고 했다. 차원분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최대 10만가량의 고대인들이 살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이 갖춰졌던 일종의 쉘터였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 노후화가 되고 룰러가 쑤셔 박은 변이체들로 인해 조금씩 부서져 오래전 제 기능을 상실했지만, 제황 일행이 찾아와 차원장치를 가동하고 일부나마 복구했기에 그녀를 깨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가 깨어남에 따라 차원장치의 재가동이 더욱 빨라졌기에 일행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흠흠, 저도 참 안타깝네요. 마음 같아서는 바벨양에게 지구를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죠.

조금은 빈말이지만 굳이 그녀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백린이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에요.

-예? 어떤...

-저는 마도기술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고차원의 합성 영혼이에요. 이 바벨탑의 심장부에는 제 합성영혼이 담긴 그릇이 있고요. 어차피 저는 이곳에 상주할 이들을 케어하기 위해 설치된 거라서 제가 없어도 기본기능으로 충분히 돌아갈 거에요.

-바벨양의 말은...

백린이 조금 떨떠름함을 담아 말했다.

그녀의 말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불길한 예감에 도장을 찍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예. 예상하시는 그게 맞아요.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세요.

-으음.

바벨의 말에 백린은 갈등했다.

이것은 자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절하려니 그녀가 변덕이라도 부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니 그녀를 지구로 데려갔을 때 발생할 일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없다.

그녀가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볼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눈치가 빠르다.

한창 고민하던 백린이 제황이게 말했다.

일단 이 팀의 리더는 제황이니까.

“제황. 그... 바벨양이 말이야.”

바벨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이미 말해뒀었다.

“??”

“이곳을 나갈 때 자신도 함께 나가면 안 되겠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제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백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설명을 하자니 이 융통성 없는 놈이 단숨에 ‘안 돼’라도 말할까 조바심이 난다.

자신 또한 굳이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바벨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가 신중한 단어선택에 고민하고 있을 때...

쿠쿠쿠...

갑자기 바닥에 얕은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

일행 중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역시 제황이었다.

“강한 놈들이다.”

제황은 그의 감각에 감지되는 존재들의 강대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과 함께 느껴지는 맹렬한 적의를 띤 존재들이다. 문제는 그 숫자다.

“엄청나군.”

제황은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조차도 지금 나타난 존재들은 모두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존재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파악한 엘과 알, 백린 또한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그들이 엘어스에서 신성을 지닌 존재들이며 초월자들이라도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제약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다가오는 것들은 보유한 마나를 측량할 수조차 없다.

신이 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인 것이다.

“한 방 먹었군.”

제황은 자책했다.

명백한 변수계산 실패다. 룰러가 설마 이 차원장치 자체를 공격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이정도의 역량을 지니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물론 룰러는 차원장치 자체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황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룰러도 차원장치가 이 바벨탑 자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내릴 수 있는 명령이었다.

“제황!”

제황을 바라보며 알과 엘이 외쳤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제황은 항상 수월하게 뛰어넘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제황도 외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심각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며 모두의 얼굴이 따라 굳어진다.

“...”

“제길...궁기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궁기와 함께였다면 어느 정도 방법을 찾겠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복잡한 표정의 일행들이 강력한 존재들의 출현에 대응책을 생각할 때였다. 전에 없이 딱딱한 바벨의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대군주급 변이체 124개체 접근 확인합니다. 충돌까지 앞으로 10초...대변이체방어체제로 긴급전환합니다. 쉴터 내의 모든 거주민들께서는 충격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위이이잉! 철컹!

알림과 함께 차원장치가 있는 광장이 변하기 시작했다.

차원장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알들의 상부가 열리며 동시에 알의 내부로부터 솟아난 하얀 빛이 일제히 기둥을 향해 쏘아졌다. 기둥 내부의 빛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한다.

“바벨양! 이게 무슨 뭡니까!”

백린이 외쳤다.

“변이체들을 상대하기 위해 요새모드를 가동했습니다. 대부분의 공격수단이 노후화되어서 사용불가능하기에 부득이하게 차원에너지를 이용한 차원병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차원에너지라면 설마 차원안정화작업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방어를 위한 포트를 개방합니다!”

바벨탑은 단순한 쉘터가 아니었다.

이곳은 고대인들이 만든 최후의 도피처이자 최강의 요새였다.

당연하게도 차원분리가 실패했을 때를 상정하여 건설한 곳이다.

경우에 따라 지구 자체를 생명체가 절대 살 수 없는 곳으로까지 만들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습을 일부 보이려 한다.

“아니! 그렇다면!”

바벨의 대답에 백린이 뭐라 물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차원 왜곡 방벽 발동!”

우우웅! 지이이이이잉!!!

쿠쿠쿠쿠!!!

“으윽!”

광장 전체를 울리는 맹렬한 진동과 소음에 백린은 무의식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쿠쿠쿠쿠...콰콰콰콰! 쾅쾅쾅쾅!!!

그 소리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흔들리다 못해 찢어지는 충격이다.

“차원분절파동포 발사!”

기둥에서 뿜어지는 빛이 전에 없이 환하게 빛났다.

맨눈으로 바라봤다가는 두 눈이 멀 지경이다. 동시에 마치 영혼을 때리는 것 같은 힘을 지닌 비명소리들이 일행 전부를 덮쳤다.

“크아아아아아!!!”

하나가 아닌 수백이 내지르는 지옥 유부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소리다.

공간이 마구 진동한다.

쿠쿠쿠...드드득

진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것이 사라졌을 때 제황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그 수많은 살의들의 주인들이... 거대한 존재감들이 꿈이라도 되는 마냥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환각이나 장난이라면 정말 지독한 짓이다.

그 짧은 찰나 제황은 정말 최후의 최후 수단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단 10초 만에 종결된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혼란에 싸여 있을 때 조금은 후련해 보이는 바벨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대군주급 변이체 124개체 소멸확인... 대변이체방어체제 해제 들어갑니다.”

“모, 모두 처리한 겁니까?”

백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의 말과 지금 상황을 생각할 때 저 강대한 것들을 처리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벨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이런 힘을 지녔음에도 지구를 세 개의 차원으로 분리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말이다.

“소모 차원에너지 7%입니다. 백린 미안하지만 약 20분가량 차원안정화작업이 지연될 것 같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바벨양 이런 힘을 지녔는데 어째서 고대인들은 차원을 분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 겁니까?”

백린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원 에너지라는 것을 다루는 것도 신기한데 그것을 무기로까지 활용할 줄 안다.

물론 차원을 분리할 기술을 지녔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별 것 아닙니다. 감히 제게 무식하게 돌격한 저들이 멍청한 것이지요. 변이체들이 두려운 점은 평범한 동식물이나 흙 공기까지 오염시키는 능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들을 모두 정화시키기에는 늦어버렸기에 차원의 분리를 택한 것입니다. 또한 바벨탑은 고대 마도기술의 정수이기는 하지만 행성 자체를 모두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 당사자가 별거 아니라고 말하니 백린으로서는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 저를 지구로 데려가 주시는 것은 어떻게 되셨나요?”

“아, 그...그건...”

뭔지 모르게 압박감이 묻어나는 바벨의 목소리다.

백린이 대답을 고심하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현재 상황에 대한 모든 정리가 끝난 제황이 말했다.

“허락합니다. 차원안정화가 끝나는데로 백린이 안내해 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그릇을 분리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백린이 뭐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제황은 눈짓으로 그의 입을 막고는 바벨에게 말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예?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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