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수싸움-1
#1
“넓군.”
문을 열고 들어서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광장과 같은 장소였다. 중앙을 중심으로 높이 1미터 가량의 둥근 알과 같은 모양의 구체 수만 개가 둥글게 늘어서 있다. 마치 고대의 신전과 같은 기괴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런 곳이다.
“저것인가.”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차원장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 그 알들의 배치된 원형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으니까.
그것은 단순한 기둥이 아니었다. 유리처럼 투명해 보이는 그 내부에는 하얀 빛무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갖가지 기계들과 금속판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그 규모도 워낙 대단해서 어둠의 장막 끄트머리까지 늘어서 있다.
일행은 그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막상 목적지에는 도착했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바로 이전까지 엄청난 몬스터들과 싸운 그들이었다. 오히려 이곳을 가만둔다는 것이 넌센스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 기둥에 완전히 다가서기까지 의외로 막아서거나 공격하는 존재는 없었다.
다가갈수록 기둥이 커진다. 이윽고 그 앞에 멈춰선 그들은 잠시 그 거대한 크기에 말없이 감상했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이 엄청난 크기의 용도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을 조작해 차원장치를 깨워야 한다.
일행 중 고대어가 가능한 것은 자신뿐이지만 가능하다뿐이지 이런 장치들을 사용하는 방법은 모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황이 백린이 책임질 것이라 말을 했지만, 솔직히 엘은 그를 불신하는 형편이었다. 고대인의 말 또한 자신이 통역해 줘야 하지 않던가. 마법을 통해 고대어에 대한 지식을 주입해 봤자 자신보다 나아 보이지 않는다.
백린은 아무 대꾸 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자신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원시인에게 컴퓨터를 조작해서 게임을 해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영화에서 보면 외계인과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데 외계인 프로그램으로 바이러스를 집어넣어 그림까지 띄우는 허황한 장면이 나오지만 미안하게도 여기는 현실이다. 그런 짓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이, 백린 너 이걸 쓸 수는 있냐?”
오만상을 찌푸린 엘이 백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 대답 없는 백린. 그녀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던 백린이 나직이 대꾸했다.
“생각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좀 닥쳐.”
“뭐야?!”
백린의 말에 엘의 눈썹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애당초 드래곤이기에 인내심 따위는 키우지 않는 그녀다.
만약 제황이 곁에 없었다면 진즉에 저 입만 산 인간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물론 백린 또한 제황을 믿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차원을 막아버리면 다시 만나지도 않을 용생들 아닌가.
“방법은 간단하지.”
“그게 뭔데!”
그녀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할 때 백린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이걸 만진 놈들을 불러내면 그만 아닌가.”
“음? 어떻게?”
엘이 물었지만, 백린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무한고에서 준비해 왔던 것들을 꺼내 차원장치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백 장의 부적이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넓어 보이는 그것들을 꼼꼼히 붙인 그는 무한고에서 항아리 하나를 꺼냈다. 낡아 금이 간 검은 색의 허름한 항아리다.
“망자의 항아리... 네가 가지고 있었나?”
“그래.”
그것을 본 알이 인상을 찌푸리며 백린에게 물었다.
이것은 과거 엘어스에 존재했던 고대의 악신을 신봉했던 암흑교단의 신물이었다. 아니 본래는 그 과거부터 존재했지만, 그들로 인해 유명해진 물건이다. 용도는 간단했다. 이 항아리의 주인은 영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그것이 살아있던 죽어있던 혹은 과거든지 말이다. 그들은 그 물건을 이용해 상고시대의 강력한 존재들을 현대에 불러와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이 영면에 든 드래곤 조차 깨우려 들었을 때 엘과 알이 나서서 그들을 멸망시켰다.
“어디서 찾았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물러서.”
백린의 지시에 모두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항아리를 부적 중앙에 둔 백린이 눈을 감았다.
“나모사만다발타남계마하파사발라사로나이야살타타도미...”
쿠쿠쿠쿠...
네 개의 기둥이 백린의 사방을 호위하듯 일어났다. 천주백가 특유의 비술이다.
사방의 힘을 끌어들여 술자를 보호함과 동시에 비술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동시에 안정화시킨다.
“달타얼다지목흘저이사다사바하라마!”
백린의 두 손이 빠르게 교차하며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을 지은 그의 손이 항아리의 위로 내려앉았다.
“망자를 부르는 건 술법상으로 보면 최하위에 해당하는 조잡한 방법일 뿐이지. 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면 그 영혼이 흩어져도 수백 번은 흩어졌을 시간이야.”
백린의 손에 검은 기운이 뭉클하고 피어올랐다.
“딱히 망자를 부른다고 해도 별 쓸모는 없다. 단순히 전투 따위에나 효용이 있을 뿐이지.”
스스스슥...
차원장치에 붙은 부적들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하나가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도 있는 듯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다.
“저들은 일종의 사념의 집합이다. 이곳 차원장치와 연관된 모든 존재들의 사념... 그리고 이 망자의 항아리는 그것들에게 일시적으로 물리력을 부여하지.”
이제는 광장을 가득 채운 반투명한 존재들은 각자 자신들의 몸을 둘러보기 여념 없다.
망자의 항아리를 집어든 백린이 외쳤다.
“망자의 항아리의 주인으로서 외친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그 존재들은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백린을 바라봤다.
“차원장치를 재가동시켜라! 차원 분리를 시작한다!”
“...”
백린이 외쳤지만 그 존재들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백린을 멍하니 주시할 뿐이다.
머리를 벅벅 긁은 백린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엘에게 말했다.
“통역 좀 부탁해. 헤헤.”
조금 전의 오만한 표정은 어디가고 놀라울 정도로 비굴한 백린이다.
#2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가 있던 곳에 룰러가 섰다.
그의 뒤로는 온갖 몬스터들이 그들의 주인을 향해 몸을 숙이고 있다.
“죽여 주시옵소서.”
“아니다.”
본래대로라면 이곳에 있는 게이트를 통과하여 일찌감치 지구를 침범하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지구를 공격한 뒤 룰러가 뒤따라 게이트를 넘는 것이 본래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게이트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게이트가 있던 자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양의 흙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와 딱딱하게 굳어 있다. 룰러가 그것을 손으로 매만졌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게이트를 빠르게 굳는 바위를 이용해 폐쇄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권속들에게는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도를 자랑했다.
룰러의 손에서도 잘 부서지지 않는다.
불도 얼음도 강산도 소용없다. 강력한 발톱을 지닌 상위의 존재들이 나서서야 어느 정도 부서뜨렸지만 그래서는 그들 주인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도 놈의 짓인가.”
룰러가 씁쓸히 말했다.
만져보니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룰러는 그것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먹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을 입안에 넣고 몇 번 되새김질하던 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속에 녹아있는 맛 속에서 그는 어렵지 않게 그 원재료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마나가 머물렀던 생명체의 흔적이라니...”
흡수를 통해 상대의 모든 것을 훔칠 수 있는 룰러였다.
그의 판단에 이 거무튀튀한 것은 고농도의 유기물복합체였다. 문제는 단순한 유기물복합체가 아니라는 것.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강대한 몬스터들로 만들어진 유기물복합체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함께 첨가된 어떤 물질로 인해 아주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이다.
룰러는 다크어스 전역에 그의 의지를 일으켰다.
고작 육체를 바꿨다고 그 신위의 주인이 바뀌지는 않는다.
-지구와 엘어스로 통하는 모든 게이트를 점검하라.
잠시 후 들려오는 권속들은 보고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는 모조리 막혔다라.”
엘어스로 통하는 게이트는 아니지만,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는 하나같이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지금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외통수다. 놈은 룰러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지배자시여. 차라리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불멸의군주가 룰러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나 룰러는 그 말을 모두 듣지 않은 채 피식 웃을 뿐이다.
“목적지를 엘어스로 변경하거나 혹은 엘어스에서 지구로 향하자는 거겠지?”
“예.”
불멸의군주의 말은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굳이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룰러는 그 의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 게이트로 나간다.”
“예?”
룰러의 말에 불멸의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일을 계획한 놈이 그걸 생각지 못했을까? 놈도 분명 그것을 알 것이다.”
룰러는 이 일을 계획했다고 생각되는 한 인간을 떠올렸다.
자신의 계획을 이정도까지 간파했다면 그 이후의 일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놈이 뭔가 다른 조치를 취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불멸의 군주가 물었다. 그러나 룰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큭.”
룰러는 정말 오랜만에 분노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육체로 의식을 옮긴 대가다. 신적인 존재가 된 후 잊고 살았던 감정이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사실 권태라는 의미로 다가왔던 이 다크어스에서 벗어날 생각을 한 것은 감정이라는 것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다.
분노는 해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피할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놈의 의도를 그대로 따라 줄 생각도 없다.
“몰락자 놈들을 풀어라.”
“예? 놈들을 어째서...”
룰러의 말에 불멸의군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몰락자라는 것은 과거 룰러에 의해 패배한 존재들을 말한다.
수백 수천 년에 걸쳐 룰러와 싸웠던 존재들... 룰러에 의해 존재조차 지워져 다크어스 가장 심연에 가둬놨던 그 존재들이다. 비록 룰러에 의해 구속되기는 했지만, 그 하나하나의 힘은 가공하다는 말로 부족한 존재들이다. 개중에는 룰러보다 강력했던 존재들도 있었다.
“놈들은 룰러님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당연하다.”
과거에도 복속시키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뜻에 따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힘으로 눌러놨을 뿐이다.
물론 따르던 따르지 않던 상관없다.
“놈들에게 엘어스와 지구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고 해.”
“엘어스라면 모르지만, 지구는 지배자께서 가실 곳 아닙니까. 행여 놈들이 그 곳에서...”
룰러의 뜻을 알아들은 불멸의군주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지배자는 지금 그들을 이용해 게이트를 뚫으려는 것이다. 불멸의 군주가 걱정하는 것은 지배자가 지구에서 그 존재들과 맞닥뜨리는 경우다. 지배자님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찬 그 존재들을 이곳이 아닌 지구에서 만난다는 것은 그에게도 좋지 못한 일일 테니까.
“크크, 그놈들을 상대할 것은 내가 아니다.”
“예?”
“놈들에게 조건을 붙여라. 차원장치가 있는 장소로 향하는 모든 길을 부숴버리라고 말이다.”
차원장치를 건드릴 수는 없다. 잘못 건드리면 차원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다. 그곳에 가둬버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불멸의군주가 사라진 후 룰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장난질을 친 벌은 받아야겠지.”
#3
수백의 반투명한 존재들이 광장을 바삐 돌아다니고 있다.
단순한 움직임은 아니다. 어떤 존재들은 기둥 주위를 날아다니고 또 어떤 존재들은 기둥 주변에 붙은 금속판등에 붙어 연신 뭔가를 조작 중이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기둥에 붙은 금속판들이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수만 년이 흘러서 그런지 몇몇 곳에서는 작은 폭발이 일거나 스파크가 튀었지만 그때마다 반투명한 존재들이 달라붙어 금세 정상적으로 복구시켰다.
제황 일행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광장 한편에 있는 돌의자에 앉아 그들이 움직이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백린이 없었다면 아마 수백 년이 지나도 이 장치를 움직일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