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최후의웃는자-2
#1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단순히 몰려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온갖 악의와 살의로 점철된 공포의 벽이 밀려오고 있다. 쉬운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9티어에서 10티어 가량의 마나를 품은 그런 것들이었다.
우우우우웅...
위이이이이!!
슈우우우...
엘과 알 그리고 백린의 두 손이 번쩍거리며 빛났다.
셋 모두 이미 그들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강의 수법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셋의 손이 앞으로 펼쳐진 순간 태양보다 찬란한 빛무리가 돌진하는 몬스터들을 향해 폭격해 들어갔다.
콰아아아아!!! 쿠우우우!!!!
셋이 쏟아낸 최고의 공격은 몬스터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공격에 몬스터들은 말 그대로 원자단위로 녹여버리고 있다. 시전자를 보호하는 마법의 힘이 아니라면 드래곤들 조차도 인간의 형상으로는 견딜 수 없는 초고열의 지옥이 펼쳐졌다.
노도와 같이 쏟아져 들어가는 마법에서 발생한 빛으로 인해 49층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컥!”
한창 최강의 화염술법을 펼치던 백린이 빛속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는 놀라 기혈이 엉켜 술법이 풀려 버렸다. 차라리 어둠으로 인해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광경이다. 49층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반적인 통로 따위가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이 있는 거대한 홀이었다. 지름 20미터는 너끈할 기둥 수천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그런 곳이다.
공간의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문제는 ... 그 모든 공간을 거대한 몬스터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들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드래곤에 버금가는 신위를 지닌 존재들이다.
엘과 알의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들이 밀어내고 있는 것은 고작 몬스터들의 일부일 뿐이다. 저 뒤에는 더욱 강력한 것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잔뜩 도사리고 있다. 마치 그들을 조롱하듯 오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엘! 잠시만 맡아줘. 본체로 현신한다!”
“알았어! 네가 끝나면 나도 본체로 돌아가지!”
이전까지는 공간의 협소함으로 본체를 꺼낼 수는 없지만, 이곳이라면 꺼낼 수 있다. 아니 꺼낼 수 없더라도 꺼내야 한다. 본체 상태라고 해도 저것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까딱하면 이계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알의 눈이 천천히 드래곤의 가느다란 파충류의 동공으로 변해갈 때다.
“모두 내가 신호하면 공격을 멈추고 뒤로 빠져.”
그때였다. 공격에 동참하지 않고 몬스터들을 응시하던 제황이 무한고에서 비천궁을 꺼내들며 말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어조다.
“미쳤냐!”
땀을 뻘뻘 흘리며 흐트러진 기혈을 정리하던 백린이 외쳤다. 저것들은 단순한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저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가 그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들이다. 그것들과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의식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그런데 오히려 물러나란다.
드래곤들 조차 본체를 현신하려 하는데 공격을 멈추고 뒤로 빠지라니 자살희망자가 아니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존재가 제황이다. 그는 절대 허투루 말을 하는 법이 없다.
“할 수 있나?”
엘이 외쳤다. 그녀로서도 이 상황을 이 인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황은 단호했다.
“난 헛소리는 하지 않는다.”
그의 담담한 대답에 엘은 알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제황에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차례 어깨를 턴 제황이 자세를 잡았다.
정석적인 탄궁의 자세다. 마치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루틴을 밟듯 자세를 잡으며 짧게 심호흡을 한다. 수만 아니 수백만 번을 취했던 기본자세다.
쓸데없는 동작 같지만, 그것은 제황이 지금 그만큼 신중하다는 방증이다.
“여기서 붙잡혀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되도록 넘지 않으려 했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상황이다.
궁기가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한번 뛰어넘으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 인간의 육체에 강제적으로 한정시킨 신으로서의 능력의 봉인을 풀어내는 짓이다.
제황의 전신으로 붉은 오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마치 그의 온몸을 태울 듯 일어난 그 붉은 오러가 제황의 신체 중심을 향해 모여들고 다시금 정수리를 향해 집결했다. 그것들이 뭉치고 뭉친다. 그리고 잠시 후...
퍼어어어어엉!!!
제황을 몸을 휘감으며 붉은서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강대한 존재들이 오만하게 서있던 자세를 풀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제황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내 이름은...”
위이이이....
“난....”
파팍! 파파팍!!!
“나는!!!”
휘이이이이잉!!!
그 모든 기운이 한점으로 뭉쳐 비천궁으로 모여들었다.
“소멸을 명하는 자! 모든 것을 꿰뚫는 자! 학살의 신! 제황이다!”
그의 신명이 정해지는 순간이다.
#2
까마득히 깊은 지하임에도 한 줄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다.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는 던전의 벽은 거대한 발톱이 긁고 지나간 듯 수천 개의 기다란 고랑이 파여 있었다.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공간을 가득 채운 그 고랑들은 모두 하나의 시작점을 지니고 있었고 그 끝을 따라가면 한 남자가 손에 활을 쥔 채 서 있다.
그는 말없이 손에 들린 활의 시위를 매만졌다.
시위에는 아무 이상 없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버릇과 같았다.
비천궁을 무한고에 집어넣은 후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뒤로부터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놀라기도 지겨워. 엘...어쩌다가 저런 괴물이랑 얽힌 거야?”
“그러게? 나도 그때의 나와 마주친다면 어떻게든 저런 괴물이랑 엮이지 말라고 하소연했을 거야. 아니, 덕분에 우리가 살았으니 운이 좋은 건가.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완전히 얼었군.”
엘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백린을 눈짓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백린이 엘을 노려본다.
“뭘봐.”
“아니다.”
백린이 눈을 돌렸다.
지금 저들이 얌전한 이유는 오직 제황 때문이다.
제황이 없으면 무슨짓을 저지를지 감도 잡히지 않는 게 드래곤이다.
물론 엘과 알 또한 속으로는 무척이나 놀란 중이다.
체면 때문에 애써 참고는 있지만, 저 앞에 서 있는 괴물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단순한 공포를 뛰어넘어 생명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삶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소멸시킬 그런 위험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대체 저런 신위를 지니면서도 아직까지 인간을 유지하는지 신비로울 지경이야.”
단 한 점의 관용도 없는 철저한 죽음만이 가득한 위험한 신성이다.
그런데 그 신성의 주인은 아직까지도 인간이라는 껍질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인성조차도 멀쩡해 보인다.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그 감정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곧 선악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강함을 지니고서도 인간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가지.”
“그, 그래.”
제황의 담백한 한마디에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전투는 끝났다. 그 단 한 번의 공격... 아니 신의 역사라고 하는 편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공격이 끝난 순간... 그 거대한 공동안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들 넷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학살의 신이 내린 자비에 모두 깨끗이 소멸해 버렸다.
공동을 걷는 그들을 발걸음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하나의 문 앞에 섰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때 한점 타지 않은 금속성의 문이다. 겉면에는 여러 가지 고대어들이 쓰여 있었다.
“차원력장 관리소... 관계자외 출입금지라...”
고대어를 해석한 엘이 손가락으로 문 곳곳을 톡톡 두들겼다.
흔한 손잡이 하나 없기에 힘으로 밀어보기도 하고, 당겨보기도 하지만 문은 요지부동이다.
“마법적 처리는 보이지 않는데”
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마법학에 있어서만큼은 알을 뛰어넘는 지식을 지닌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로서도 이 문을 열 방법은 요원하다. 역시 힘으로 부셔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백린이 나섰다.
“내가 해보지.”
“해봐.”
위대한 드래곤인 자신조차 방법이 보이지 않는데 고작 인간 따위가 해결하겠다는 소리에 엘은 조금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러났다. 그런데 막상 다가간 백린은 문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의 편린”
백린이 손을 한번 흔들자 문으로부터 반짝이는 빛가루가 생겨나더니 이내 하나로 뭉쳐 들었다. 그것은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 앞에 선 그것이 조금은 낯선 음성으로 말했다.
“이락쿠쉬-트”
그러자 문이 지이잉 하고 옆으로 밀려나는 환영이 생겨났다. 잠시 후 빛무리들이 사라지고 백린은 문을 향해 말했다.
“이락쿠쉬-트”
쉬이익...
그러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문이 옆으로 지이잉 하고 열린다.
어깨를 으쓱한 백린이 멍찐 표정의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락쿠쉬-트 가 무슨 뜻이지?”
“열어. 라는 뜻이다.”
“별 것 아니었군.”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그 말을 듣는 엘의 귀에는 ‘드래곤 주제에 그것도 모르냐’ 는 뜻으로 들린다. 물론 아까 일에 대한 백린의 소소한복수다.
“들어가자. 시간없어.”
그러나 엘은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제황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것
그 뒤를 백린이 따라 들어가자 엘이 씩씩거리며 따라들어갔고 알이 어깨를 으쓱한 후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2
“오랜만에 걸어보는군.”
룰러는 두 발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촉을 감상하며 걸어갔다.
“역시 지구로 가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내가 녀석의 지구를 택한 것이다.”
본디 룰러는 엘어스와 지구 둘 사이에서 고민했다.
세 개의 차원 중 마나의 축복이 가장 강력한 엘어스와 마법과는 다른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구는 둘 다 색다른 매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제황을 만난 후 그는 최종 목적지를 지구로 택했다. 그만한 힘의 존재를 키워낼 역량이 있는 세계라는 것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준비는 완벽하겠지?”
“예. 놈들이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놈들이 건드리는 그 차원 장치의 조금만 비틀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는 고대인들의 정수를 가지신 지배자님과 저만이 알고 있으니까요.”
고대인의 정수
그것은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종합정보시스템이었다.
지구인들은 그것을 세이브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좀 더 직관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말했다.
“핏덩이, 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으시더라도 제 주인은 당신뿐입니다.”
“후후, 낯간지럽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아.”
룰러는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다.
지금 몸에 완전히 적응해야 한다.
아무리 룰러라도 시간은 공평하다. 하물며 이렇게 약하디 약한 신체로 갈아탄 상태이니만큼 급하더라도 신중을 더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은 이내 하나의 돌발적인 변수로 인해 변하고야 말았다.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이런...”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아무래도 그놈을 과소평가한 모양이군.”
“예? 아닛!!!”
불멸의 군주 또한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들이라면 최소한 발목은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잠시도 아닌 찰나에 불과한 그 시간에 그들 모두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 말은 단 하나 그들 모두가 일순간에 지워져 버렸다는 뜻이다.
그곳에 배치한 이들은 다크어스 존재들 중 2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 20%전력을 단숨에 쓸어버릴 능력이라니..
나머지는 지금 각 다크어스 게이트 앞에 집결해 있는 상황...
“느긋한 꼴을 못보는군.”
룰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