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89화 (289/301)

# 289

최후의웃는자-1

#1

백린은 지금 기분이 조금 안좋았다.

물론 던전 진행은 무척이나 스무스하고 리드미컬하다.

산보를 나온 것일까? 걱정한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석재 같아 보이지만 겉면이 우툴두툴한 벽으로 된 길고 긴 통로다.

그가 즐겨 보는 만화책에서 묘사한 그것들을 보면 그냥 신기한 장식품이 가득한 중세풍의 복도를 연상하겠지만 빛 한점 없는 길고 긴 복도를 빛도 아닌 야간시 술법에 의지해 걷는다는 건 공포영화 뺨칠 지경으로 두렵다. 흔한 용사물 따위를 보면 던전을 제집보다 편안하게 보는 표현이 나오는데 전부 개소리다.

던전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두려운 곳이다.

슈슝... 파파파팡!!!

“꾸륵! 꺽꺽!”

파파팡!

대체 드래곤들은 왜 데려온 것일까.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달리는 중이다. 너희는 왜 안 싸우냐고 물으니 답변이 가관이다.

“이곳에서 우리 신위는 한정되어 있어서 사용하기 곤란해. 팔팔한 쪽이 해줘야지.”

공들여 데려온 저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알차게 써먹어야 할 텐데 제황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정작 본인인 제황 또한 아무런 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 중간 휴식 따위도 필요 없어 보인다.

괴물이다. 단 한 사람의 존재로 난이도가 이렇게 떨어진다니.

언제 저렇게 강해진 것일까.

제황과 치룬 마지막 전투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였다.

언젠가는 닿을만한 경지라고 생각했었다. 술법의 힘은 무한하니까.

그런데 그때의 제황과 지금의 저 괴물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었다.

모든 것은 저 앞에 떠 있는 한 대의 화살이 다 하고 있다.

극한의 효율성이 저런 것일까?

대체 화살이 무슨 짓을 하면 저런 괴이한 파괴력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던전에서 희생당하고 그의 오른손으로 재활용당한 두억시니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저건 어떻게 만드는 거냐?”

“음, 학살자라는 신화와 활의 주인이라는 신화에 내 의지를 실체로 구현한 다음 마나를 조금 섞...”

“크윽”

신화라니... 무슨 소린지 아예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그로서는 까마득히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다.

백린이 신경질을 부리자 제황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전면을 바라봤다.

마음속을 슬쩍 들여다보니 날로 먹는 것 같은 상황에 심통이 난 듯 보이지만 제황도 나름 꽤 신경 써서 만들어낸 회심의 한 수였다.

과거에 봤던 어떤 영화에서 화살을 무기로 사용하는 어떤 이의 기술을 모티브로 한 것인데 차이점이라면 화살을 조종하는 것은 제황의 의지라는 것 그리고 화살을 맞은 상대는 단순히 구멍 하나 뚫리는 것이 아닌 고속도로를 개통해 버린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내부에 응축된 멸살의 의지를 통해 그 존재의 모든 재생력을 제로로 수렴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

최대의 효율을 위해 그 사정거리는 고작해야 50m 조차가 고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좁고 긴 통로가 아니라면 그 쓰임새가 한정된다.

그러나 백린이 보기에는 저만큼 사기적인 기술이 또 없었다. 이런 던전에서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해 보인다.

그때였다. 제황이 뒤를 돌아보며 백린에게 말했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백린의 반문에 그러자 제황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냥 말해라. 네 표정에 한심함이 드러나니까.”

백린이 불퉁한 표정으로 답하자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야! 자식아! 어른이 말을 하면!”

백린이 소리쳤지만, 제황은 들은채도 하지 않고 달릴 뿐이다.

물론 백린을 무시하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백린에게는 말할 수 없다. 이곳에 들어온 이들 중 가장 약한 백린은 룰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 일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그에게 알릴 수는 없다.

아니 지금은 알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백린이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두고 있었다.

백린은 제황이 준비한 함정 중 하나니까.

“이제 거의 끝이군.”

이 던전은 지하로만 생겼다고 생겼다고 치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 모습은 마치 지하에 있는 피라미드 같은 느낌이다.

첫 일 층으로부터 층이 내려갈수록 계속해서 넓어졌다.

대략 47층 정도에서는 거의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하나의 생태계가 완성된 그런 곳 말이다. 어떻게 이런 밀폐된 세계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백린이 기사바퀴라고 말한 그것들은 정말 지겹도록 많고 다양했다.

아니 많다는 영역을 떠나서 그것들은 이 던전에서 일종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분명 치명적일 정도로 원시적이고 서로 일상적으로 잡아먹는 것 같지만, 일단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구성 요소인 계급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최하층의 기사바퀴는 1층이나 20층 정도에서 봤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줬다.

“크레렉!”

양팔이 날카로운 칼로 이루어진 기사바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다.

물론 제황의 입장에서는 한숨 나올 공격 속도이기에 화살을 날렸지만, 그 기사바퀴는 순간 빠르게 가속하며 그것을 피해 제황에게까지 도달했다.

스팡!

공기를 두들기는 파공음과 함께 그 칼이 제황의 목을 노려온다. 가볍게 목을 돌리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낸 제황의 손이 기사바퀴의 가슴에 닿았다.

퍽! 퍼퍼퍼퍽!! 퍽!

기사바퀴의 내부로부터 뭔가 터지는 소음이 들리더니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제황이 이렇게 직접 손을 써서 놈을 처리한 것은 놈의 체액이 극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귀찮군.”

제황은 늘어진 그것을 옆으로 던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가끔 이런 특이개체가 나타나면 그 뒤를 따라 엄청난 숫자의 작은 기사바퀴들이 달려든다.

마치 어미의 복수라고 하겠다는 듯 달려드는 그것들은 덩치는 작지만 그 위험성만 따지면 10티어급 몬스터 못지않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밀리면 그냥 몬스터 쓰나미에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

이때만큼은 제황도 이전보다는 좀 더 주의하여 적들을 상대했다. 무려 화살을 하나 더 만들어내 적들을 상대했다. 게다가 복도의 모양들도 그들을 돕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이렇게 변하는 것일까.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기에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는 백린의 장담만큼 던전은 튼튼했다. 그러나 그 위로 쌓이는 오물과 먼지들이 문제였다. 아래로 침잠되는 듯 흘러넘친 그것들은 마치 하수구의 그것처럼 끈적끈적하고 역한 냄새를 풍겼다. 환기구 따위도 보이지 않으니 솔직히 보통의 인간은 이 던전에 살거나 한다는 건 미친짓이나 마찬가지리라.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 여긴 너무 불결하군.”

코를 막은 알이 앞으로 나섰고 제황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물러섰다.

알이 가슴 앞으로 손을 들어올리자 붉은 마나로 이루어진 둥근 구가 생겨났다. 그 구를 바라보며 알이 입을 빠르게 읊조릴 때마다 구는 계속해서 회전하며 색이 진해진다.

“무시무시하군.”

백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안에 뭉친 마나의 양이 백린이 생각하는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알이 그 붉은 구를 앞으로 내밀자 구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얌전한 움직임에 백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할 때 드디어 변화를 일으켰다.

파팟...파파팟!

요란한 번쩍임과 함께 붉은 구가 복도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동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구체는 말그대로 던전통로를 청소하며 나아갔다. 구체가 통과한 곳은 마치 처음 던전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었다는 듯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다.

“꾸에에엑! 꺄아아!”

게다가 저것은 살아있는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빨아들였다. 제황 일행을 습격하기 위해 은신해 있던 몬스터들 까지 차별없이 흡수하여 먹어 치워버렸다.

“공간왜곡을 통해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 본래라면 던전의 벽까지 먹어치우겠지만 고대인들의 기술이란 참 대단하군.”

‘난 네가 더 무섭다.’

백린은 속으로 생각한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만약 이런 던전에서 저런 공격을 마주한다면 자신은 찍소리 없이 죽어야 한다.

“냄새도 좀 가셨군. 그건 그렇고 쳐다보는 시선이 따갑군.”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은 알이 제황에게 말했고 제황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노골적이야. 그리고 가깝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 말이다.

약 이틀이 걸려 마침내 그들은 49층에 도달했다.

백린을 제외한 셋은 거의 신적인 존재들이기에 휴식은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제황은 주위에 떠다니고 있던 화살들을 없애버렸다.

지금 전방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나의 기운은 이런 화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49층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 대체 어떤 기술로 만들어졌는지 조차 이해하기 힘든 그런 공간 안에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모양의 온갖 몬스터들이 계단을 내려온 이들을 향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제황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다.

마치 룰러와 같은...

“이번에는 우리도 싸워야 겠군.”

엘과 알, 백린이 몸을 풀며 제황의 곁에 섰다. 그야말로 엘어스와 지구, 그리고 다크어스의 최강들이 격돌하는 순간이다.

#2

검디 검은 공간... 꿈틀거리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치 알과 같은 모양의 회백색 고치였다. 잠시 후 그 회백색 피막이 찢어진다.

드드득...드득... 투투툭...

고치의 중앙을 찢고 처음 나온 것은 하얀 손이었다.

밖으로 튀어나온 그 손은 고치를 좌우로 벌렸고 잠시 후 그 손의 주인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큭...커억...”

그것은 꿈틀거리는 바닥에 떨어져 마구 꿈틀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벌려지며 그 안에서 하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헉헉...우욱”

한참을 토하던 그것은 고통스러운지 한참을 비비적거리더니 서서히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몸과 손발을 둘러보고 있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한 개의 코 그리고 입...

“이런 몸은 오랜만이군.”

그리고 그것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믿을 수 없게도 조금은 어눌한 인간의 언어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손으로 슥 매만지고는 고개를 흔든다.

“춥군. 아. 털이 없지.”

말하는 순간 그의 머리로부터 검고 긴 머리카락이 마치 시간을 빨리 감은 듯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얀 빛이 일어나 그의 몸을 덮으며 더러운 몸이 깨끗이 정화하고 몸 위에 내려앉아 서서히 옷의 형태로 변해 그의 몸을 감쌌다.

“정말 오랜만이군.”

그는 그를 감싼 옷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가장 최근에 만났던 인간의 복식대로 창조한 것이다.

뭔가를 걸친다는 것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익숙해져야 한다.

“지배자시여.”

그때였다. 공간 전체가 꿈틀거리더니 곧이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바닥으로부터 이어진 그것은 큼지막한 입 하나만을 지니고 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언제든 말씀하시면 지상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좋아.”

“함께 가져가실 것들입니다.”

입이 쩍 벌어지더니 갖가지 물건들이 쏟아졌다.

과거 다크어스를 찾았던 헌터들의 물건들이다.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보관상태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것들을 하나 둘 챙기고 있을 때 그 존재가 말했다.

“다시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니, 녀석들이 차원을 완전히 막아버리면 아마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단정적으로 답했다.

“아쉽군요.”

“아쉽다라.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너희들은 너무 강해. 이런 하등한 신체로는 너희들을 전부 제어할 수 없으니 문을 틀어막는 수밖에 없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배자님을 호종할 시종 하나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쯧, 핏덩이녀석 핑계가 좋구나.”

“핏덩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불멸의 군주라고 불러줄까?”

까마득한 오래전 룰러는 그를 핏덩이라 불렀다.

아마 룰러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존재가 그일 것이다.

당시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긴 했지만, 지금은 수억의 존재들을 통치하는 군주... 그렇지만 그는 룰러에게 핏덩이라 불린 게 기분 좋은지 꿈틀거림으로 그 즐거움을 표현했다.

“징그럽다.”

“그게 뭡니까?”

“그냥 인간들의 표현 중 하나다.”

“좋은 뜻은 아닌 것 같군요.”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그건 그렇고 ... 음”

불멸의 군주와 잡담을 나누던 룰러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진행이 빠르군. 벌써 끝에 도달했나.”

“예. 아마 곧 군주들과 부딪힐 것 같습니다.”

“그래.”

룰러는 씁쓸함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부감이 느껴지는 감정이다. 인간체로 이식되었기에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

“다 죽겠군. 놈은 무자비한 학살자니까.”

“예.”

핏덩이의 고저 없는 그 대답이 방안을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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