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원정 준비-2
#1
-지배자시여. 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좋다. 지금부터 너와 너의 권속들에게 맡기노라.
-맡겨 주십시오.
-이 일의 생명은 언제나 말했듯 침묵이다.
-당연합니다. 저 그림자의 군주... 지배자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가라.
-예.
명령을 끝으로 룰러는 전세계에 뻗어 있는 모든 감각의 길을 폐쇄했다.
그러자 찾아온 정적
과거에는 이 정적이 미치도록 싫었다. 다크어스의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위치가 되었을 때 이 자리가 이렇게 지루한 자리일지는 그도 상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가. 그들에게 패퇴한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렇게 수천 아니 수만 년에 걸쳐 반목과 멸망을 반복하던 다크어스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의 기쁨은 너무 자주 꺼내 써서 감흥조차 없다.
생각 같아서는 망각을 이루고 싶고 또 그럴 능력이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다운그레이드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단순히 희망일 뿐이다.
‘이짓도 지겹군.’
그는 그의 한없이 크고 넓은 정신 속으로 침잠했다.
수만 년간 언제나 해오던 것들이다. 이 정신의 공간 속에서 그는 자유로웠으니까.
한 푸른 형체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룰러가 든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실험체, 넌 이제부터 기나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이렇게 길 줄은 몰랐소. 창조주여.’
그의 말에 룰러는 감각기로 느껴지는 그의 감정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창조주이다. 아니 어찌 보면 그는 죽음을 거부하게 만들어 준 악마이기도 하리라.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화하거라. 네 안에 무한의 씨앗이 발아하는 날 세상이 너를 향해 조아릴 것이다. 그 머저리들은 너를 우리 문명이 영속할 도구 따위로 보고 있지만 난 안다. 너만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 가치조차 이제 내게는 의미가 없구려.’
고작 이 작은 상자 안에 넣은 이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몸뚱이에 무엇을 그리 바랄까.
그의 손에서 벗어난 그는 참으로 많은 이들을 거쳤다. 고통스러웠지만 창조주가 그에게 맡긴 유일한 사명이 있기에 그는 참고 견뎠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의 지상과제였다. 고작해야 머리 좋은 포유류 정도의 지성밖에 갖추지 못했던 자신이니까.
진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흡수하고 학습했다.
자신과 비슷한 개체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보다 우월한 정신과 육체를 구축한 개체들도 많았지만, 그는 매 순간순간 끊임없이 시험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했다. 날이 갈수록 지성이 완성되고 육체가 강건해져 갔다.
이 사실을 알려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노쇠한 창조주는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강해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창조한 이가 그에게 부여한 유일한 과제였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계 전쟁이 있었다. 하늘과 땅이 수차례 뒤집히는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또한 생물병기로 전쟁에 투입되었다. 본래 목적은 생명의 영속성을 연구할 생명 연장의 수단이었던 그였는데 어느 순간 보니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고 있다.
죽음에 가까운 피해를 보며 걸레 조각이 되어서도 다시금 수거당하고 배양되어 새로운 몸으로 진화하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의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흡수당할 뻔한 적도 수십 번···. 아니 흡수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지켜냈다. 그리고 다시 그 몸을 차지하기 위해 이를 갈고 노력했다. 그렇게 살아남고 또 강해졌다.
그에게도 기연과 같은 일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높은 산 정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다 죽어가는 특이 개체를 하나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개체로부터 엄청난 것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이면에 가려진 비의이자 초월자로 향하는 단서 한조각이었다.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
마도과학의 총아와도 같은 그에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이면의 세계는 신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그 힘으로 상대를 하나하나 굴복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적측에서도 그와 비슷한 생물병기들이 속속 개발되기는 했지만 오리지널인 그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렇게 싸우고 싸운 끝에 그를 무기로 사용했던 이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를 가만두지는 않았다.
“명령이다. 넌 잠들어야 한다. 네 존재는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아.”
“농담이 과하군. 그러게 잘 때 약은 작작 처먹으라고 했지?”
“빌어먹을! 그냥 얌전히 잠들어! 지금 밖에는 널 소멸시키려는 놈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다고!”
“뭐?!!!!”
“내가 어떻게든 네 코어를 숨겨줄 테니 닥치고...아악!”
“헉! 멍청이! 왜그래! 이... 이럴수가... 제길! 다 죽여버리겠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명령에 반항했다.
그렇게 다시금 수백 년을 싸웠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그는 전쟁두뇌는 계속해서 진화되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점점 전세가 역전되어 가기 시작하자 그들은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자세한 것은 그도 잘 모른다.
어느 날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뿐...
대륙 곳곳으로 보낸 그의 권속들은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과 생명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왔다. 그들이 살았던 도시는 존재했지만 생명체들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그 후로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저들 중 마도에 극에 이른 존재들이 모여 차원을 분리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을 이길 수 없으니 그냥 차원이라는 감옥에 가둬버린 것이다. 뭐 좋게 생각하면 도망친 거지만...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저들이 사라지고 100여년이 흘렀을 때 그는 자신의 진화가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진화하여 발전하는 것이 숙명이 그에게 있어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인간 비스무리 한 것을 만들려 시도까지 해봤을까.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다.
자신 외에 다른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것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비슷한 건 만들어 내기는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대인들이 남기고 간 그 던전에 모조리 쑤셔 넣었고 말이다.
그 자신의 몸을 인간과 비슷하게 완성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다였다.
끊임없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발전일 뿐 다른 개체의 것을 약탈한다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수만 년이 지나고 분리되었던 차원이 일부나마 열렸을 때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저들이 만들어 놓고 간 던전을 부수지 않고 기다린 것은 행여 그 일로 인해 차원이 영영 막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진즉에 부셔버렸을 것...
인간들이 자신의 영토를 다크어스라 부르며 침투해 들어왔을 때 그는 그들을 참으로 극진히 대접했다. 저들이 레이드하기 편하도록 권속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약한 것들을 특별히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것들을 만들어 보냈음에도 인간들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뿐일까. 기본적으로 다크어스는 저들에게 너무나도 살기 힘든 환경이었다. 수 만 년에 독립적인 생태계가 만들어진 다크어스는 저들이 생존하는데 너무 극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지성체들을 수없이 만들어 냈다.
본래는 함께 경험을 공유할 존재를 만들기 위해 자유의지를 부여했는데 차원이 열리자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라는 한계 안에 만들어진 것들이기에 흡수조차도 쓸모없는 무능한 것들...
게다가 이것들을 지구나 엘어스라는 곳으로 끌고가는 순간...그곳은 멸망이다.
룰러는 하나의 야심찬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큰 규모이기 때문에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는 그것을 끝끝내 완성해냈다.
그리고 이제 완성의 끝이 다가온다.
“후후, 고대인의 던전으로 어서 오거라.”
그는 지구에서 건너온 절대자를 떠올렸다.
그 강력하고도 강력한 존재 말이다.
지구에는 분명 그런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계획의 핵심은 바로 그였다.
그가 던전을 클리어하고 차원의 분리를 마무리 하는 순간...
그의 계획은 완성되는 것이다.
#2
제황은 커다란 석탑 앞에 섰다. 저번에 왔을 때는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석탑에는 고대인들이 새겨놓은 듯한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던전의 위험성을 갖가지 모양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던전의 대략적 구조와 가장 지하에 있는 특이한 모양의 거대한 방이 보인다.
그것들을 바라보던 제황이 곁에 서 있는 백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있는 것이 차원안정화장치가 있는 곳이 맞나??”
“당연한 거 아닌가?”
백린이 석탑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으로는 50개로 나뉘어 있고 가장 마지막에 가장 큰 방이 보인다. 백린은 그 방 가운데 그려진 세 개의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내가 연구한 고대어들을 보자면 이 두글씨는 분명 차원 이라는 글씨와 장치라는 뜻이야.”
“가운데 것은?”
“뭐 ‘안정화’ 라는 뜻이겠지.”
주먹구구식의 대답에 제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그들의 뒤에 조용히 서있던 엘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뜻은 다르지만 여기가 맞아.”
“너 읽을 수 있나?”
제황의 물음에 엘이 입술을 삐죽이며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드래곤이다.”
마치 그것이 답에 대한 진실을 보장하는 프리패스라는 듯 말한다.
그러나 고작 드래곤이라는 것 따위로 믿어 줄 제황이 아니다.
“흠...”
알이 엘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신용해도 좋다. 엘은 한때 엘어스 전체를 지배하며 고대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낙으로 살았으니까. 우리 차원이 왜 엘어스라고 불리는지는 알겠지.”
알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라면 신용이 간다.
백린 또한 눈을 크게 뜨며 드래곤들을 바라본다.
“그럼 혹시 다른 글씨도 보이나?”
“이 던전이 생겨난 이유는 어떤 극악한 악마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되어 있어.”
“그래?
악마라고 하는 존재는 아마 룰러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제대로 찾아온 셈...
“그럼 들어가 볼까?”
제황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를 막고 있었을 문 따위는 오래전에 사라진 검은 공간이 그의 앞에 있다.
“어? 그냥 들어가?”
백린이 당황하여 말했다.
이미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이곳의 무서움을 생각하며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들어가면?”
“그 궁기라도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백린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게도 궁기는 지금 자신과 함께 있지 않았다.
아니 아예 다크어스에 함께 오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주 중대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곳은 룰러의 땅이니까.
피식 웃으며 제황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으로 한 대의 화살이 생겨난다.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는 그 화살을 보며 백린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화살에 놀란 것이 아니다. 이 화살을 ‘창조’ 해낸 제황에게 놀란 것이다. 술법사로서 신의 영역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백린은 ‘창조’ 가 어떤 영역인지 알고 있었다. 흔히 강기 따위를 이용해 화살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감각은 그것은 에너지보존의 법칙 따위는 무시한 창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자.”
제황의 말에 백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누구를 데려왔는지 깨달은 것이다.
지구최강, 재앙의 학살자, 살아있는 전투의 신으로 불리는 제황이다.
그조차 실패한다면 이 지구에는 이곳을 돌파할 이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