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87화 (287/301)

# 287

원정 준비-1

#1

물론 그것은 제황의 입장일 뿐 엘은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이야기가 본래의 예정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원래 예정은 선신과 악신인 엘과 알이 신화에 끼어들 생각이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선신과 악신의 가호 아래 나타난 고대의 용사라는 이야기를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그 신화가 자신들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과 알의 하위 신화로 만들어 놓으려 했는데 자신들과 거의 동등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궁기는 본래 신수였다. 그것도 호랑이의 신수, 수인족들의 왕족들이 고양이 새끼들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궁기에게 매우 빠르게 감화되어 버렸다.

궁기가 슬쩍 눈짓 한 번 할 때마다 기쁨에 겨워 꼬리를 파들파들 떠는 수인족의 여왕이 얼마나 눈꼴시던가.

문제는 차라리 이 정도면 낫다는 것이다. 궁기에 대한 신화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문제는 알 쪽의 신위의 피해가 심각했다. 고작 무기 하나 같은 거 쓴다는 (엘의 입장에서는) 이유 하나로 그들은 제황을 고대 드라쿤의 신 ‘드라고나’ 라고 착각해 버렸다.

물론 제황이 전설에 나올 법한 위용으로 몬스터들을 몰살시켰다지만 자신도 방심하지만 않았으면 가능했을 짓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은 그것에 대해 불만 한마디 못 뱉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저 사나운 암고양이가 은연중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어디 가서 좀 쉬어.”

“흥.”

“흥?”

“아, 아니야.”

괜히 자존심 세운다고 콧방귀 한 번 뀌었다가 궁기가 쌍심지를 짓자 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그녀는 궁기가 두려웠다. 싸운다 치자. 차라리 불에 타죽거나 제황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게 낫다.

산채로 뜯어먹힌다니···. 그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엘은 알이 뜯어먹히는 것을 라이브로 보면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 버렸다. 살아있는 채로 배가 찢기고 내장이 뜯기고 드래곤하트가 부서졌다. 드래곤도 생명이다. 두려운 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황보다 그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궁기가 더욱 두려웠다.

엘이 슬그머니 사라지자 궁기가 칭찬을 바라는 듯 제황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린다.

“휴...”

제황은 못 말리겠다는 듯 궁기의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심령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녀의 생각은 익히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제황은 굳이 나서지 않았지만, 궁기는 그렇지 않은 눈치다.

궁기는 챙길 수 있을 때 챙기자는 주의다.

“어차피 차원을 막아버리면 다시 안 올 곳인데 굳이 이럴 필요 있어?”

제황이 말했다.

“모르는 소리 설령 이곳에서 신 행세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한 번 훑어보는 것만도 이득이야. 이걸 왜 포기해? 네가 그걸 차근차근 흡수하는데, 저게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이러는 거야.”

그녀의 턱짓에 제황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몸으로 흡수되고 있는 낯선 신위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제황은 상태창을 열었다. 과거 세이브에 접속되어있는 상태였다면 지금 이 현상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정보가 출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세이브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니 제황 본인이 직접 건드려야 한다.

“잊혀진 신성이 부활하는 경우도 있어?”

제황이 궁기에게 물었다. 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궁기가 제황보다 선배다. 제황의 물음에 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한번 써진 기록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가 엘어스 뿐만 아니라 지구에도 있다는 거군.”

“응, 그런데 굳이 지구에서 그럴 필요는 없잖아. 지금 네가 지구에서 확립한 신위만 해도 거의 주신급이야. 일부러 잊힌 신위 따위를 찾아 일깨울 필요는 없어. 괜히 복잡하기만 하고... 물론 그걸 흡수함으로 네 신위의 격이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려.”

“그건 그렇군.”

궁기의 명쾌한 대답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야 시간이 썩으면 한 번 찾아볼 일이다. 궁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직감일 뿐이지만 그 드라고나라는 신위 만만치 않은 크기 같아. 어쩌면 지금의 너보다 훨씬 높은 격을 지녔던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일단은 그걸 분석하고 수습하는 것만 신경 써. 얻는 게 있을 거야.”

“그래.”

어리광부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의젓한 선배처럼 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은 흡수되어 들어오고 있는 그것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근원을 분석하고 수치화 할 수 있는 것은 수치화하고 수치화 할 수 없는 것은 비슷한 성질의 것들을 가져다가 붙인다. 아직 신위라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근래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얼마 걸리지 않아 그럭저럭

볼만한 것이 상태창에 추가되었다.

신위:드라고나 –

신위 복구 6%

신위 흡수 1%

뒤에 숫자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고작 6%일 뿐이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흡수 양은 꽤 만족스럽다.

마치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다. 탐색이 완료되면 꽤 재미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좀 머물러야겠어.”

제황이 궁기에게 자신의 상태창을 공유해주었다.

그걸 보자 궁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네. 뭐 며칠 정도는 괜찮겠지.”

그 후로 약 이틀 후 제황은 ‘드라고나’ 라는 잊혀진 신의 신위를 모두 흡수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신위라기보다는 사라진 신의 잔재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신위의 주체가 되는 대상은 이미 소멸해버렸기에 제황이 그것을 계승하지 않는 이상 드라고나가 부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을 들인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엘어스의 장기체류가 필요한 부분이었기에 과감히 포기했다.

그 후 일은 꽤 빠르게 진행되었다.

드라고나든 고대의 용사든 원하고자 하는 신성을 얻었기에 곧바로 알의 회복작업에 착수했고 얼마 있지 않아 알이라는 레드드래곤은 곧 깨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본 궁기에게 으르렁거렸다가 야무지게 두들겨 맞을 뻔한 건 소소한 에피소드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렇게 넷이 모이자 제황은 지금까지 파악한 바를 모두에게 공유했다.

엘이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만 알은 솔직히 이번이 처음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베황의 말을 모두 들은 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결론은 공략을 빨리 진행해야 한다는 거군.”

“그래.”

알은 의외로 꽤 진중한 성격이었다.

대략 둘의 성격을 보면 엘이 사고를 치거나 일을 벌이면 알은 뒤에서 느긋하게 수습을 하는 역할이다. 순수 전투력만 따진다면 알이 엘보다 확실히 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만약 당시 전투에서 궁기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기습하지 않았으면 꽤 고생했을 것이다.

“역시 방관하는 건 옳지 않았어.”

알이 엘을 바라보며 말하자 엘의 볼을 부풀리며 답했다.

“너랑 같이 다크어스에 갔을 때는 그런 놈이 없었잖아. 같이 합의하고서는...”

“그땐 그랬지.”

엘의 말에 알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다크어스에 갔었나?”

“당연하지 않나. 지구도 갔었고 다크어스도 갔었다. 결론은 합쳐져도 실보다는 득이 클 것 같다는 것이었지. 다크어스 쪽 몬스터들이 성가셔 보이기는 했지만 뭐 자신 있었으니까.”

알이 어깨를 으쓱한다.

차원이 하나가 되면 차원의 격이 올라가고 봉인되었던 저들의 고대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드래곤들은 그것을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늘로부터 운석을 끌어들여 땅으로 떨어뜨리는 마법이라던가, 혹은 세계의 인과율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마법 혹은 차원을 관통하는 마법 따위 말이다.

그렇지만 막연하게 믿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기로 한 그들은 제황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뭐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황과 맺은 주종의 맹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할 일이다.

지구로 돌아오자 꽤 많은 일들이 제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역시 그가 엘어스로 가기 전 백린에게 맡겨놨던 일이었다.

백린은 제황의 말을 꽤 성실하게 이행했고 효과는 무척 좋았다. 고작 일주일이면 충분했다니 일을 시킨 제황이 떨떠름할 지경이다.

“한 이 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구를 준전투태세를 만들어놨군.”

“네가 준 마나석의 영향이 컸지.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가 없으니 한 방씩 터뜨려주니까 더  이상 망설이지 않더군.”

백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닌 백린이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제황도 꽤 골치 아플 것이다. 한편인 게 참으로 다행이다.

UN긴급총회가 소집되었고 다크어스에 대한 총력전이 총회에 참석한 모든국가들의 만장일치로 결의되었다. 역시 대가리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법. 이로써 제황이 다크어스에서 던전을 공략할 동안 지구에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해 대응할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황이 이렇게 지구의 방비에 신경을 쓰는 것은 룰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사전에 차단해 버리기 위해서다.

총력전이라는 것은 모든 헌터들을 지구 방어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가진 모든 무기의사용에 대한 제약이 사라지는데. 만들어진 지 백여 년 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상 최강이자 최악의 무기로 불리는 무기 핵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차원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로 다크어스를 완전히 갈아버릴 정도의 핵을 투사하지는 못하지만, 그보다 작은 소규모 전술핵은 펑펑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되도록 지구 쪽에는 피해가 적게 사용돼야 한다. 핵이라는 것은 쏘는 이든 맞는 이든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이번 일은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다.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큰 것은 룰러의 보유한 힘과 수단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룰러도 다크어스에서는 완전한 절대자다.

던전을 얌전히 공략하게 둘리가 없다.

아니 공략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 던전 조차 함정일 수 있다는 게 제황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최악의 상황인 던전의 공략 실패를 경우의 수에 넣어야 한다. 물론 제황도 그에 대한 개인적인 대비책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언제나 만약의 경우는 있는 법이고 제황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막을 것이다.

#2

“무련천가 78대손 천제황 조상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사당에 들어선 제황은 경건하게 절을 한 후 손수 제단과 위패를 정성스레 닦았다.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매일같이 하던 일이었지만 근 몇 년 만에 돌아온 사당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본가의 관리는 심 노인께 부탁드렸지만, 이 사당만큼은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궁기산을 두르는 대단위 복지 단지가 건설되어 있지만, 본래 그 목적은 본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향로에 경건한 자세로 향을 꽂았다. 다시 한번 절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궁기가 서성거리고 있다.

“그냥 무련천궁단으로 한 번 쭉 불러내면 안 돼?”

귀찮게 뭐하러 여기까지 오느냐고 내내 툴툴대던 궁기다. 궁기산은 그녀에게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 가득한 곳이니까.

제황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분들 부를 때마다 영성이 소모되셔. 가뜩이나 저번에 소환했을 때 영성을 많이들 사용하셔서 이제 부르면 위험해.”

“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제황의 말에 궁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그런 그것을 굳이 따질 필요 있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제황의 생각이니 존중해 주는 것이다. 제황은 발끝으로 땅을 차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왜?”

“부모님 산소 가서 며느리 소개시켜 드려야지.”

제황의 담담한 대답에 궁기의 볼이 빨갛게 변했다.

“흠...흠흠...그렇지.”

볼이 붉어진 궁기는 제황의 손에 이끌려 본가 뒤에 있는 산소로 향했다.

산소는 심노인의 손에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새 자라난 풀을 조금 뽑은 제황은 무한고에서 부모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들을 꺼내 놓았다.

궁기와 함께 절을 올리며 부모님의 묘를 향해 ‘제 안사람 될 사람입니다.’ 하니 궁기의 붉어졌던 볼이 더욱 빨갛게 변한다. 절을 한 제황은 산소 앞에 앉아 멍하니 무련천가의 본가건물을 바라본다.

문득 궁기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산에 나타난 몬스터와 싸우다가 반죽음이 되었던 일...

비몽사몽하며 사당에 간신히 기어들어 갔던 일···. 정신을 차려보니 사당 안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불구가 되었던 몸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을 고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 그 미녀는 자신의 옆을 사랑하는 이의 자격으로 지키고 있다.

나중에 다크어스에서 돌아오면 이 여인과 이곳에서 함께 살 것이다. 이 본가를 지키며 말이다.

“쓸쓸할까.”

고작 둘 뿐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많이 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이곳은 너무 넓다.

“궁기”

“응?”

“우리 열심히 낳자.”

“응? 응?! 뭐...뭘?”

“우리 아이들로 저곳을 가득 채우고 싶어.”

제황이 다짐하듯 말하자 궁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여전히 부끄러움은 궁기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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