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드라쿤-3
#1
제황이 초반에 힘쓰기를 자제했던 일종의 간보기였다. 우두머리 몬스터가 가진 역량 파악을 해야 차후 전투를 준비할 수 있다.
모든 전투는 계획을 수반한다. 큰 힘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힘에 취해 무작정 퍼붓는 짓은 하지 않는다. 최대한 정보를 끌어 모은 뒤 적이 가진 힘의 역량과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최대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또한 제황과 별개로 정보를 모아 주는 궁기가 심상치 않은 말을 한 것도 한몫했다.
-저놈 지금 가진 능력이 저 드라쿤 이라는 것들이 사용하는 마나 운용 방법이 비슷해.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한데? 어쩌면 지금 저놈은 드라쿤들의 어떤 능력을 훔친 상태일지도 몰라.
-훔쳐? 학습을 한다고? 몬스터가?
-가능성일 뿐이지.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그리고 저 녀석이 가능하다면 룰러 녀석도 가능하겠지.
-그건 정말 별로군.
상대의 능력을 훔친다고 하니 룰러와의 일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몬스터들을 순차적으로 보내 그의 능력을 측정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직접 나타나 대화를 통해 심리를 파악하려고도 했다. 그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정보라는 것에 대해 매우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어쩌면 벌써 제황의 능력 한 두 개는 훔쳤을지도 모른다.
츠츠츠츳...
-뭐, 일단은 놈을 완전히 처리한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동감
발밑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하얀 광선에 제황이 눈썹을 모았다.
궁기가 기민하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적중했을 것이다.
“좀 성가시네.”
궁기와 함께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며 제황은 제황은 그의 통상전투지침을 조금 수정했다. 어차피 전투라는 것은 항상 돌발변수가 존재한다.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응 또한 훌륭한 승리의 밑받침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감한 투자였고 제황은 그만한 투자를 할 자금이 충분하고도 넘쳐났다.
-압도적인 공격력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봐야겠군. 올라가자.
-그래.
제황의 말에 따라 궁기가 빠르게 치솟았다. 그리고 한계까지 치솟았을 때 몸을 꺾으며 다시금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서포트만 부탁해.
-알았어. 놓는다!
타탁!
궁기가 잡고 있던 제황을 놓았다.
궁기의 속도 그대로 빠른 자유낙하를 시작하던 제황이 화살 하나를 먹인 채 비천궁의 시위를 당겼다. 잠시 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제황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응집되고 응집되고 응집된다. 한계까지 응집된 그 마나가 폭발 직전의 한계까지 집약되자 그것들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확장을 시작했다.
목표는 시선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몬스터!
“충격을 주위로 분산시켜 냈다면 반대로 주위의 모든 것이 공격당할 때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구나.”
비천궁의 시위를 한계까지 끌어당긴 제황이 그의 시선에 표적이 된 우두머리 몬스터를 쓸어보며 쥐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퉁...
쏘아내는 소리는 너무나 미약했다.
마치 작은 풀잎 하나가 바람에 쓸려 이리저리 흘러 다니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투투투투트트트트트트콰콰콰콰쾅!!!!
조금 전의 감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지를 찢어발길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주위로 동심원을 이루며 터져 나갔다. 그 소리가 워낙 거대하여 지상에서 펼쳐지는 처절한 요새전투의 소음까지 지워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그 소리 또한 시작이었을 뿐이다. 잠시 후 벌어질 엄청난 대참사의 전주곡 말이다.
투콰콰콰콰콱!!!
우두머리몬스터를 중심으로 하여 수백 수천 갈래의 붉은 광선이 지상을 향해 폭사해 들어갔다.
순간 전장 한가운데 지름 700m 의 둥근 원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려 모든 것을 파괴해갔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평등했다.
오로지 고통과 비명과 파괴만이 반복될 뿐이다.
덩치가 크던 작던 그 파괴의 광선들을 무자비하게 쑤셔 박혔다. 공격이 대상이 된 것은 우두머리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크롸라라락!”
놈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이전의 그 방어막이 나타나 공격들을 막아가기 시작했다.
하얀 스파크가 일어날 때마다 충격이 사방으로 퍼진다. 스파크가 튀길 때마다 7티어 8티어 몬스터들은 죽임을 당했지만 좀 더 상위의 티어를 지닌 몬스터들은 어찌어찌 우두머리와 함께 버티고 있다.
츠츠츠츠...
제황의 2차 공격이 끝나자 몬스터들 사이에는 거대한 빈공간이 생겨났다. 몇몇 초고위 몬스터들을 제외한 모든 몬스터들이 떼몰살을 당한 것이다.
“호오, 이 정도는 버틴단 말이지.”
지상으로 쏘아낸 공격의 반작용으로 공중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던 제황의 입 꼬리가 실룩였다.
상대에 대한 두 번째 실험은 무사히 통과했다. 물론 아직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이것도 한번 견뎌봐라”
츠파파파팟!
다시금 붉은 서기가 폭발하듯 확장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좀 더 커다랗다. 그것을 좀 더 빠르고 세련되게 뭉쳐낸 제황의 온몸으로 붉은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황의 몸은 주위의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 마나의 폭풍이 공간의 일그러짐을 만들어 낼 지경이다.
-난 조금 쉬어야 겠다.
제황의 머릿속으로 엘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힐끔 쳐다보니 온몸이 노릇노릇하게 익어버린 붉은 드래곤이 요새를 넘어가고 있다. 하얀빛기둥 속에는 우두머리 몬스터의 신위가 담겨 있었다. 그것에 상당시간 노출되었으니 꽤 힘이 빠졌으리라.
게다가 제황이 본격적으로 마나를 흡수해대기 시작하자 엘로서는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기 힘들었다.
잠시 후...
콰콰콰콰콰콰콰각!!!
세 번째 붉은 광선이 전장을 휩쓸었다.
두 번째보다 좀 더 강렬한 그것은 이번에는 두 번째 공격보다 좀 더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공격을 당한 우두머리 몬스터가 주위에 있는 몬스터들을 좀 더 자신의 주위로 포진시켰기 때문이다.
나름 딴에는 좀 더 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지만 덕분에 지휘를 받는 몬스터들은 붉은 광선의 과녁이 되어야 했다.
퍼퍼퍼퍼퍼퍼펑!!!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몬스터들은 많았지만 그것들은 지금 저 악마의 공격을 몸으로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투툭...투투툭...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또다시 떼 몰살을 당했다. 이제는 요새로 달려드는 몬스터들도 거의 없다. 우두머리 몬스터는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권속들을 주변으로 끌어 모았다. 한쪽 눈에 피를 질질 흘리는 우두머리에게는 더 이상 투쟁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압도적이다 못해 질려버릴 대량학살극이 어서 빨리 끝나고 다크어스로 귀환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 이것도 견뎌?”
세 번째 공격은 제황이 신위를 매우 경제적으로 사용한 광역공격이었다.
다크어스에서 했던 비경제적인 광역공격에 비하면 사용량은 약 50% 수준이다. 그런데 우두머리 몬스터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제황의 안색이 굳어진다.
저런 우두머리 몬스터는 다크어스에 최소 십여 마리는 존재할 것이다.
만약 저런 것들이 한꺼번에 뭉쳐서 덤빈다면 궁기와 함께한다고 해도 꽤 고전하리라.
“좋아.”
고개를 끄덕인 제황은 다시금 힘을 모았다.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할 때다.
그는 신위를 최대한 밀어 넣었다. 동시에 새롭게 얻은 신화도 꺼내 들었다.
‘학살의 신[SS급]’
후우우우욱!!!
모여든 마나에 오직 살육과 파괴의 의지만이 담겼다.
신의 의지는 곧 힘이다.
-궁기 찾아줘.
-좋아!
궁기의 신화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몬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의 흐름을 쫓기 시작했다. 다크어스에서 했던 그것이다. 이번에는 딱히 공간의 한정을 두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윽고 모든 흐름의 근원들이 제황의 눈에 조준되었을 때 제황이 비천궁의 시위를 놓았다.
“죽어라.”
#2
“아, 아아...”
창공을 올려다본 드라쿤의 여왕 레아는 비틀하고 주저앉을 뻔 했다.
피가 튀고 살이 부셔지는 전장 한가운데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족들의 비명이 난무하던 그런 곳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황홀함을 동반한 쾌락의 카타르시스 뿐이다.
아름답다. 단순한 그 한마디의 정의밖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전쟁에 미학이 있다면 저것이야 말로 신의 작품이리라.
그렇다. 그는 신이었다.
감히 눈이 부셔 쳐다볼 수 없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를 찬양하고 싶은 심정이다.
활을 들고 하늘에서 나타난 신은 드라쿤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에게 무자비한 살육의 은총을 선사했다. 저 몬스터들을 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살기와 광기로만 충만하여 드라쿤들을 최후의 요새로 밀어붙였지만, 공격했던 저들의 눈에는 이미 대항의지 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녀는 과거 오래전 읽었던 드라쿤 역사서의 숨겨진 페이지를 떠올렸다.
악신 알이 있기보다 훨씬 오래 전 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을 때 드라쿤들이 믿었던 그러나 시간 속에 잊혀야 했던 드라쿤들의 진정한 신..
‘드라고나’
“드라고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셨도다.”
한손에는 활을 한손에는 불꽃을 들어 선악을 심판한다는 드라쿤들의 잊혀진 고대신이다.
공교롭게도 드라쿤들의 주무기는 활과 마법이었고 저 신 또한 활을 이용해 엄청난 몬스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수천 년간 섬겨왔던 알이 있었지만 알도 따지고보면 새롭게 등장했던 이종족의 신이었다. 저 드라고나이야말로 드라쿤들의 진정한 신이라는 생각이 레아의 가슴속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츠츠츠츠츠츠츠츳....
“아, 아아아... 드라고나시여.”
비틀거리던 레아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하늘 위에는 너무나도 눈부신 붉은 태양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는 것조차 모르는지 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동시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의 폭발이 있었다.
잠시 후 빛의 폭발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녀는 기절할 것 같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드라고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드라고나? 드라고나...드라고나! 우리의 신!”
몬스터의 공격에 두들겨 맞아 산 너머로 떨어진 ‘알’ 따위(?) 보다 훨씬 강력하고 종족 정서에도 잘 맞는 새로운 고대신께서 부활해 버렸다.
보라. 들으라. 이곳에 드라고나의 역사하심이 계시다.
그분의 화살이 적들을 모두 주살하셨도다. 태양과 함께 나타난 그분께서 드라쿤들을 구원하셨도다.
#3
드라쿤의 여왕 레아는 제황의 앞에 엎드렸다.
요새를 따라나온 수천의 드라쿤들과 요새 내부와 지하에 숨어있던 드라쿤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제황을 향해 엎드린다. 그 숫자만 족히 수십만은 될 것 같다.
“위대하신 드라고나시여.”
그녀의 선창에 그들 모두가 그녀를 따라 제황을 향해 외친다.
제황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 드라고나와 관련된 신화를 보면 드라고나는 여러 생명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드래곤이나 고대인의 형상을 취할 때도 있었고 토종 드라쿤의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제황의 모습이 그들을 침략한 지구인과 같다고 해도 그들은 별로 상관치 않았다.
그는 최후의 요새에서 적들을 쓸어버린 신이다.
-드라고나가 뭐지?
-고대에 드라쿤들이 숭배했던 저들의 토착신이다.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있었군. 젠장
엘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
사실 엘과 알이 선신과 악신으로 나뉘어 엘어스를 지배한 건 고작해야(?) 몇 천 년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들 전에는 어엿하게 섬기던 신들이 있었다. 엘과 알의 흉계로 인해 그들이 모두 잊혔던 그것들이 자신들이 데려온 이 인간에 의해 부활했으니 차후 분명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뭐 나쁘지 않네. 호호호. 얼굴 풀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나타난 궁기가 제황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엘에게 말했다.
궁기의 눈빛을 보는 순간 엘이 찔끔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헛짓거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궁기가 듬뿍 담아 날리자 엘이 깨갱한 것이다.
궁기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제황이 생명체들에게 찬양받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엘이 본래 원했던 모양새는 아니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알을 다시금 되살리기 위한 것이니 엘로서도 나쁘지는 않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