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드라쿤-2
#1
“방어마법시설들은 이미 붕괴되기 직전이군.”
엘이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요새를 통째로 감싸는 둥근 막이 허공중에 간헐적으로 번쩍거리다가 사라진다.
요새의 밑으로는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그 숫자는 이미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10티어 11티어로 보이는 초대형 몬스터들이 있으니 6티어에서 7티어 몬스터는 오히려 너무나 작게 보인다.
확실히 지구와는 다른 양상이다. 지구가 수많은 헌터들을 통해 게이트마다 최첨단 무기로 각개격파를 한다면 드라쿤들은 마치 중세시대의 그것처럼 성벽을 이용해 방어전을 치루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돌산의 중턱을 타고 흐르는 성벽의 거대한 요철들이 있다. 수 겹? 아니 수십 겹의 요철들이 이층 삼층으로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자색의 피부를 지닌 드라쿤들이 마법과 활을 날리고 있었다. 돌산의 내부를 파서 만든 요새의 성벽은 그 폭만도 약 2킬로미터 가량 되어 보인다. 말 그대로 일천의 병력으로 십만의 병력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천혜의 요새였다.
“쉬-테-나-다!”
불꽃의 폭포가 쏟아지고...
“마-타-쉬하-악-스!”
얼음창이 날아간다.
쉬이익! 쉭쉭!!!
장관인 것은 활을 쏘는 이들이었다.
수천에 이르는 드라쿤들이 붉고 푸른 빛의 화살을 쏘아대자 화려한 빛의 궤적이 몬스터들에게 적중했고 그대로 폭발했다.
콰과과과과광!
눈을 현란하게 하는 불꽃과 얼음의 폭발이 다크어스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찢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삐이이이잇!
드라쿤들이 올라탄 와이번 수십이 일제히 내리꽂히며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바위를 떨어뜨렸다. 산 정상에서는 고위급의 궁사와 마법사들이 뭉쳐있는지 연신 거대한 화염덩어리를 내던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7티어나 8티어 몬스터들은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것들을 다른 몬스터들이 짓밟아 죽어 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몬스터들이 더럽게 많다는 것이다.
잠시 빈자리가 생기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른 놈들이 들어차 있다.
콰콰콰광!!!
요새 벽에 무식하게 들이받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벽을 찍고 기어오르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있다. 초강산으로 보이는 브레스를 뿜어내는 놈에서부터 화염을 뿜어 원거리 공격을 가하는 놈들까지 즐비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라쿤들의 요새 자체가 이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는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평지에서 저것들을 상대했다면 드라쿤들은 절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몬스터들의 가운데 고고하게 서 있는 우두머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크기는 대략 200미터 가량으로 다른 놈들보다 크지 않다. 비만으로 보일 정도로 비대한 몸을 지닌 그것은 비늘로 뒤덮인 곰과 같은 형상이었다. 다른 점은 온몸을 뿔이 뒤덮고 있다는 것과 가슴과 어깨가 과도하게 부풀어 있으며 그 머리는 마치 악어를 닮았다는 것이다. 잠시 후 그것의 목이 부풀기 시작하자 드라쿤들은 난리가 났다.
“또 온다!”
“알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막아라!”
번역되어 들어온 드라쿤들의 처절한 외침이 까마득한 공중에 있는 제황의 귀에도 생생이 들려온다.
“캬아아아아악!”
그것의 주둥이로부터 쏘아져나간 하얀 빛기둥이 요새의 벽으로 쏘아져 나갔다.
“방어막을 발동해라!”
요새로부터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둥근 막이 생겨나며 그것을 막아갔다.
이때를 위해 쓰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두 강대한 에너지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츠츠츠츳.... 츠츳...!!! 파칭!
“크윽! 뚫린다!”
“버텨!”
잠시나마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을까. 둥근막은 그대로 깨져나갔고 하얀 빛기둥은 그대로 요새에 직격했다.
카아아앗!!!
그것은 요새의 벽과 성벽을 마구 헤집어댔다. 하얀 빛기둥은 짧게 끝나지 않았다. 한번 휩쓸며 요새벽에 깊은 상흔을 남길 때마다 거대한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고 수많은 드라쿤들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갔다.
그때였다. 하얀 빛기둥을 쏘아내던 그것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덩치에 비해 너무나 빠른 전환이다. 그 눈이 까마득한 하늘 위에 있는 제황과 정면으로 마주쳐진다. 그리고 동시에 놈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젖혀졌다.
삐이이이이!!!
요새를 사선으로 찢어발기며 솟구쳐 오른 광선은 순식간에 엘을 향해 내쏘아졌다.
“핫!!!”
갑작스러운 공격에 엘이 몸을 뒤틀어 그 광선을 피해냈다. 엘을 맞추려 몇 번 더 공간을 찢었지만 엘 또한 보통은 아니다. 지구에서 했던 것처럼 온갖 말도 안되는 공중기동을 부리며 그것을 피해냈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놈의 뿔들로부터 하얀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놈의 입이 2배 이상 커졌고 동시에 하얀 광선이 방사형으로 퍼지며 엘을 직격해 버렸다.
“캬아악!”
그 광선은 엘의 몸을 집어삼켜 버렸고 그 광선속에서 엘은 고통으로 인해 몸을 뒤틀었다.
강력한 전격 에너지를 내포한 그 하얀 광선은 엘의 몸을 굳어버린 만든 채 천천히 고통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위험을 느낀 제황은 이미 엘로부터 뛰어내린 후다.
궁기는 이미 매의 형태로 변해 제황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궁기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제황이기에 공중 기동은 지상만큼 자유로웠다.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며 제황이 무한고에서 비천궁을 꺼내 들었다.
“재미있군.”
제황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녀석의 공격은 단순한 전격공격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신성력이 가미되어 있었는데 그것에 적중한 상대는 행동을 방해받을 뿐만 하니라 마나까지도 흡수당한다. 그 운용이 절묘해 배우고 싶을 지경이다. 물론 그건 잡생각일 뿐이고 지금은...
“붙어보자.”
꽤 강한 놈이다.
호승심이 일어난다.
신성이야 어떻게든 얻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고대의 용사 따위의 역할놀이 따위는 질색이었다. 차라리 이 요새를 구해냄으로 신성을 획득하는 게 더 손쉬우리라.
츠츳...츠츠츠츳....
제황의 몸으로부터 붉은 강기가 용솟음쳐 올랐다.
#2
“알께서 나타나셨다!”
“오오, 알이시여!”
드라쿤들은 하늘 위로 나타난 엘을 발견하고는 두 손을 들었다.
자신들의 구원하기 위해 신이 몸소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몬스터들의 우두머리가 쏘아낸 광선에 맞아 알이 흔들리자 그들의 눈에는 절망감이 감돌았다.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렸던가. 저 우두머리로 보이는 몬스터의 광선은 너무나 강력했다.
고대로부터 내려와 자신들을 지켜주던 모든 마법진들이 저 우두머리의 광선에 속속 부서져 나갔지만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자신들이 믿는 신은 약하지 않으니까.
지금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위안했다.
이계의 몬스터들과 싸워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잘 버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것들은 이전의 것들과는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그렇게 모두가 좌절할 때다.
“이럴 수는 없어!”
드라쿤족의 여왕 레아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포기할 수 없다. 아니 더 이상 드라쿤족이 물러설 땅은 없다. 지금 이 요새에는 몬스터들에 의해 피난 온 드라쿤 족 전체가 있었다. 자신들이 포기하면 이들은 모두 저 몬스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내가 직접 헤타루스를 시도하겠다!”
“안됩니다!”
“여왕님께서 쓰러지시면 상황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그녀의 외침에 그녀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그녀를 강력히 만류했다. 헤타루스라는 것은 일인에게 모든 마나를 끌어 모아 강력한 마법화살 공격을 쏘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만큼 부작용도 커서 헤타루스를 시도한 전사들은 무리한 몸의 과부하로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게 된다.
“내가 가장 강하다! 지금은 나밖에 없어! 모두 헤타루스를 준비하라!”
그녀가 외쳤다.
그녀는 드라쿤들 중 가장 커다란 활을 사용하는 자! 가장 강력한 화살을 가장 멀리 날릴 수 있는 종족 최강의 전사이며 마법사다.
그녀가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섰다.
드래곤의 피를 이었다고 전해지는 드라쿤들 중 드래곤의 피가 가장 짙다고 전해지는 왕족인 그녀의 이마에 솟은 가장 긴 뿔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전사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자 그들의 손에서 뿜어진 푸른 마나가 그녀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라쿤의 여왕 레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활을 들었다. 활통에서 조심스럽게 활 하나를 꺼내 시위에 끼운다. 온몸으로 스며 들어오는 막대한 마나가 몸이 부르르 떨려오기 시작한다.
“크흑...”
타인의 마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한다.
그녀가 아무리 강력한 전사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녀가 신음을 참으며 천천히 시위를 당기려 할 때다.
“저...저건!”
전사 하나가 공중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레아의 눈 또한 커졌다. 공중에서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알의 밑으로 한 인영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아니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다. 등 뒤에는 붉은 날개가 활짝 펼쳐져 있었고 그 인영의 손에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찬란한 붉은 섬광이 맺혀 있다.
#3
제황은 비천궁의 시위를 당기며 하얀광선을 쏘아내고 있는 몬스터를 향해 조준했다.
후욱하고 올라온 붉은 강기가 비천궁에 맺히고 이윽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신벌의 화살’
퍼어어어어엉!!! 콰과과과곽!!!
제황으로부터 붉은 선이 쏘아져 나갔다.
빛살보다 빠르다. 한 점으로 응축된 그 빛속에는 녀석에 대한 대우차원으로 파괴의 힘을 듬뿍 실었다. 잠시 후 놈의 하얀 광선과 제황의 붉은강기가 충돌했다.
카아앗!
하얀광선과 맞선 붉은 강기는 그것을 거슬러 헤치며 녀석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 유영하며 그것들을 피해간다.
이윽고 우두머리와 화살이 충돌했다.
퍼어어어엉!!!
맹렬한 소음과 함께 놈의 머리가 뒤로 한껏 젖혀졌다. 동시에 놈의 뿔에서 발생한 스파크가 치직 거리며 주위로 넓게 퍼진다.
“음?”
제황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뒤로 젖혀졌던 놈의 고개가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놈의 한쪽 눈으로부터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녀석의 하나 남은 눈에서부터 정제되지 않은 광폭한 야생의 살기가 분출했다.
“신기하군.”
제황의 한쪽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녀석은 공격받은 데미지를 주위로 분산시켰다.
-거미줄 같이 이어져 있네.
-그렇군.
궁기의 눈을 통해 본 녀석의 신성은 주위에 있는 놈들을 자신의 힘처럼 끌어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격 뿐만 아니라 데미지도 주위로 분산시켜 버린다. 조금 전 제황의 공격은 딱 녀석의 숨통을 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과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양의 힘으로 상대를 퇴치하는 것이 제황의 전투 방법이었다.
“크라라라라락!”
녀석이 광소를 터뜨린다. 마치 제황을 비웃는 것 같다.
고작 그 정도의 공격으로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거 같냐는 조롱이 담겨 있다.
“재미있네.”
제황은 피식 웃었다.
감히 자신을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