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드라쿤-1
#1
털썩...
왕실기사단장은 무릎꿇었다. 딱히 무기의 겨룸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
강대한 힘도 막대한 마나도 강력한 비전도 소용없었다. 애초에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슥슥슥...
흉험한 기세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뻗쳐있던 사자갈기도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제황의 손길 아래 곱게 찰랑거린다. 긴 송곳니를 머금은 입을 톡톡 두들겨 주자 수인족 왕국의 기둥이며 자랑스러운 왕실기사단장인 그는 넙쭉 엎드려 꼬리를 두툼하게 부풀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의 앞에서는 자신은 드래곤 앞에 오크 아니 고블린 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여명의 왕실기사들도 제황이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 절로 주르륵 갈라져 버렸다. 자신들의 지휘자가 꼬리를 말아버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어깨나 올까 싶은 비실한 인간이 장난 치듯 뿌린 강렬한 투기가 그들을 절로 물러서게 만든 것이다.
“안내해라.”
“예.”
순둥순둥하게 변해버린 왕실기사단장이 제황의 앞에 섰다.
수인족 왕국의 왕실을 수호한다는 명예와 자부심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생각할 수도 없는 변화다.
그러나 속사정을 보면 그는 지금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이 이럴까. 제황의 투기에 찰나지간이나마 노출된 그의 머릿속은 이미 곤죽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은 것은 마치 말잘듣는 개처럼 그의 명을 이행하는 것 뿐이다.
“와아아아...”
속사정을 모르는 수도의 시민들이야 좋다고 환호를 올리지만 말이다.
그의 안내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서자 곧 번쩍이는 갑주로 무장한 수백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뒤로는 성안의 모든 이들이 몰려들어 제황을 바라보고 있다. 귀족들인 듯 걸치고 있는 옷들이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어차피 다 동물 대가리다.
성으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복잡했다.
좁지는 않지만 상당히 돌아가는 모양새다.
그렇게 얼마를 걸으니 잠시 후 본성의 앞에 다다랗다. 도개교를 지나 그안으로 들어가니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강함이라는 게 느껴지는 수인족들이 도열해 있는 게 보인다.
신전기사들처럼 몸에 성스러운 기운이 흐르는 그들은 제황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강하군.’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은 정말 강하다는 게 느껴진다. 물론 그 비교의 대상이 그의 앞에 앞장서고 있는 왕실기사단장이라는 녀석일 뿐이지만 저들의 힘이라면 10티어 몬스터도 가볍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호위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높다란 단상 위에 넓게 펼쳐진 붉은 양탄자 위로 엘을 상징하는 황금색의 거대한 옥좌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비스듬이 앉아 있는 것은 수인족의 여왕이었다.
수인족의 여왕은 젊었다.
은은한 흰색의 하늘하늘한 천으로 몸을 두른 그녀의 몸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온갖 보석들이 그녀의 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종족을 초월해서 그 관능미가 느껴질 지경이다. 농염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궁을 들어서는 제황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니 그 기세가 사뭇 다르다. 일국을 다스리는 절대자의 풍모가 느껴진다. 그녀가 다가오는 제황을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손을 들자 대전의 좌우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리 환영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멈추라.”
여왕이 말했다. 그러나 제황은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장내가 술렁거린다.
“흐음”
그녀는 고대의 용사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엘이 신탁을 통해 그를 보기를 자신과 같이 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백성들이 인간들에게 어떤 짓을 당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는 해묵은 은원은 잊으려 그들을 성대히 맞아들였다. 모든 편의를 봐주고 그들에게 협력했다. 그런데 그 본색은 왕국에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마나석의 유통에 군침을 흘리는 탐욕만이 가득한 놈들이었다. 끝내는 자신들 몰래 빼돌리려 하다가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던 이들에게 학살을 저지르고 엘의 성소를 침투하기까지 했다.
수도를 위협하던 다크어스의 몬스터를 대신 처치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거부감은 거부감이다.
아무리 엘이 신탁을 통해 고대의 용사를 맞이하라 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의 시험을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여왕은 왕실만을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용사를 구속하라 명을 내리려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손은 들어지지 못했다.
제황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제황이 그녀가 서 있는 곳 앞에 서자 여왕의 표정은 개다래나무를 눈앞에 둔 것처럼 헤실 하고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제황이 매력적이거나 그가 강해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제황이 가지고 있는 신화 중 하나 [궁기의 주인[S급] 때문이었다.
[궁기의 주인]은 본래라면 S급에서 끝날 신화가 아니었다. 무려 다른 신을 소유한다는 뜻을 지닌 것이니까. 그렇지만 워낙 그들이 비밀스럽게 연애(?)를 해대는 통에 그것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S급인 이유는 오로지 두 신의 결합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신화는 스킬처럼 하나의 효과만 보유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두루두루 영향을 끼치는데 크게는 궁기와 제황과의 연계나 둘의 상성에 영향을 끼친다. 둘이 심령을 공유하기에 둘이 함께 전투를 하게 되면 그 시너지 효과가 증폭된다. 그리고 또 작은 하나의 영향을 보자면 이런 것도 있었다.
‘수인류 친화력 30%상승’
궁기의 본질은 호랑이의 정령이며 여신이었다.
그리고 호랑이와 사자는 어찌되었건 비슷비슷한 류였고 그렇기에 이 능력이 먹혀들어가는 것이다. 왕실기사단장이 괜히 제황에게 재롱을 떤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제황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궁기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인족 여왕의 눈이 풀려버렸다. 그리고 교태로운 몸짓으로 제황에게 살랑살랑 다가갔다.
인간이라는 거부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신에 의해 내정된 자신의 부군을 맞이하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표정이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제황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황에게서 풍겨나오는 알수 없는 아우라가 그녀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의도는 미수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꽉...
제황의 가슴부위에서 쑥 하고 튀어나온 하나의 손이 그 손을 마주 잡은 것이다.
동시에 얼굴하나가 쑥 하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궁기였다. 수인류로 반쯤 의태한 그녀의 얼굴에는 가뭇가뭇한 호랑이의 무늬가 나타나 있었고 입에는 긴 송곳니가 나 있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년이 어디에 손을 대려고 그래.”
“히...히익!”
수인족의 여왕이 체통을 잊고 뒤로 주저앉았다. 자신들의 여왕이 쓰러지자 주위를 지키고 있던 수많은 수인족들이 놀라 달려들려 했지만 잠시 후 고대의용사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한명의 여인으로 인해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츠아아아아앙
찬란한 빛을 머금은 그녀가 오만한 표정으로 수인족의 여왕을 내려다본다.
“이년이 감히 어디서 지저분한 냄새를 살랑살랑 풍기고 있어.”
궁기의 머리카락 사이로 두 귀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감히 자신의 반쪽에게 다가오는 다른 암컷의 행태를 두고 볼 수 없는 그녀였다. 하긴 그녀 성격에 많이 참기는 했다.
“크르르르...”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맹렬한 살기가 궁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붉은 오오라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오오...”
“아아...저것은...”
그것은 날개달린 거대한 호랑이였다. 허상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 몸이 찌릿찌릿하여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그 신위는 그것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대항의지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여신이시여.”
“여신이시다.”
그녀를 향해 궁내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넙쭉 엎드렸다.
저항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본래 섬기던 신인 ‘엘’ 과는 전혀 다른 신의 등장이지만 그들은 엘에게서 조차 느끼지 못했던 심령의 충만함에 꼬리를 파르르 떨며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 엘을 섬겼다고 해도 엘은 어쨌건 드래곤이었다.
그 신위가 절대적이기는 하나 근본적인 종의 차이를 매꾸지는 못했다. 위압과 공포 그리고 종료를 통한 통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궁기는 수인족들의 궁극적인 완성형과도 같았다. 그 파장이 너무나도 절묘하게 어울렸다.
그렇게 얼마 후 수인족의 여왕이 앉아있던 옥좌에는 궁기가 비스듬이 앉아 거만하게 수인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인족의 여왕조차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황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오직 제황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옥좌 옆에 기대앉아 이꼴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2
“뭔가 이상하게 된 거 같은데...”
궁기와 제황을 등에 태운 채 하늘을 날고 있는 엘의 머릿속은 지금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본래 계획대로 제황을 엘어스의 세 종족 중 하나인 수인족들에게 인정받게 만드는 것은 성공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신위를 제황에게 빼앗겨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황이 아니라 곁다리인 궁기에게 빼앗겨 버렸다.
궁기든 제황이든 어차피 차원이 틀어막히면 다 끝나는 일이니 상관은 없지만 문제는 궁기에게 흘러들어가는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에야 급하니 어쩔 수 없이 넘어간다고 하지만 차후 그녀의 본래 신위를 회복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 만약 이들이 이 엘어스를 차지하려고 든다면?
‘집안에 맹수를 들여놓은 꼴이군.’
“아직 멀었나?”
“곧이야.”
“빨리 가자.”
“난 이동 수단 따위가 아니다!”
“그래. 노예지. 빨리 가라.”
“끄응. 알겠다.”
제황의 물음에 이를 갈며 답한 엘이 한층 속도를 높였다.
드라쿤들의 수도는 엘의 텔레포트로 진입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위치나 거리의 문제가 아닌 과거 고대인들의 유산이 건재한 대륙 남부 최남단이 그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드라쿤들의 수도는 고대인들이 만들어놓은 마법방어시설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들 중 하나가 수도 근처로의 공간이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엘이 이렇게 직접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쿤들이 섬기는 것은 알이라는 레드 드래곤이라고 하던데 네가 가도 괜찮은가?”
제황이 물었다.
역할놀이건 어쨌건 알은 악신이고 엘은 선신의 위치에 있다.
자신들이 섬기는 알이 아닌 엘이 나타나 계시를 내려도 괜찮은가 하는 의구심에 제황이 물은 것이다.
“가끔 서로 역할 바꿔서 대타도 뛰었으니까. 상관없어.”
그말과 함께 엘의 황금빛 동체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뿔의 모양도 기묘하게 변하고 꼬리도 좀 더 길어졌다. 겉모습이 레드드래곤과 비슷하다.
“사기꾼이군.”
그녀의 변화에 대한 제황의 소감이다.
“끙.”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지금 그녀는 제황에게 맹약으로 묶여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알의 치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불만을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을 때 제황의 무릎을 베고 누워 제황이 입안에 넣어주는 초콜릿을 오물거리고 있던 궁기의 눈썹 한쪽이 삐죽 올라갔다.
“음?”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녀와 감각을 공유하는 제황 또한 그녀가 느낀 그것을 파악하고는 눈을 가늘게 떠 한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둘이 느끼고 있는 것은 지금 엘도 느끼고 있었다.
“상당한데? 저게 룰러라는 놈인가?”
엘의 목소리가 조금 긴장되어 있다.
상당한 존재감이 지평선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지평선 너머가 드라쿤들의 수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녀석은 제황이 안다.
“아니 룰러의 부하 중 하나다.”
제황과 궁기는 녀석을 본적 있었다. 예전 다크어스에서 룰러를 만나고 함정에 빠져 초거대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마지막에 나타났던 녀석들 중 하나다.
놈과는 싸우지 않았다.
불필요한 싸움을 피한 것이기도 하지만 룰러라는 불안요소를 안고서 싸우기에는 부담스러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엘어스 드라쿤들의 수도방향에서 녀석의 기운이 느껴진다.
“흐음.”
제황의 대답에 엘이 인상을 굳히며 고도를 높였다.
구름에 닿을 듯 솟구치자 시야가 넓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지상의 상황이 드러났다.
“크군.”
거의 산 하나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게이트가 뚫려 있다. 지구에서도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크기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초거대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미 꽤 오래 되었는지 초거대몬스터의 숫자는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한쪽 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산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요새가 우뚝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지금 몬스터와 드라쿤족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