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엘과 알의 대행자-2
#1
드라쿤... 엘어스를 삼분하고 있는 수인족, 드라쿤, 오크 세 종족 중 하나다.
수인족이 골드 드래곤인 엘을 섬긴다면 드라쿤들은 레드 드래곤인 알을 섬긴다. 오크들은 자신들의 토속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것들이고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지금 흡수한 신성은 다 나의 것이야. 내 반대편에 서 있는 알의 신성을 흡수해야 네가 제몫을 하고 알을 회복시켜 주는데 힘을 낼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알의 권속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해. 알의 권속들에게 가장 빠르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드라쿤의 여왕에게 인정받는 길이 가장 빨라.”
“차라리 그것들이 보는 앞에서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을 몰살시키는 게 더 빠르지 않나?”
잠깐의 쇼만으로 수인족들에게 상당량의 신성을 얻은 제황이었다. 그러나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내가 널 대놓고 인정해 줬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널 다크어스의 주구다 라고 신탁을 내려버리면 지금 네가 얻는 신성의 모조리 날아갈걸?”
“킁, 그럼 오크는 어때?”
“그것들은 여러 개의 부족으로 찢어져 있어. 저들끼리도 으르렁 거리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지 못하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딱히 제국을 이룰만한 오크로드가 나타나지 않아 빠른 시간 내에 신성치를 올리기 힘들 거야. 뭐 얼마전에 헬칸인가 하는 놈이 꽤 세력을 모으기는 했지만 인간들에게 당해 지리멸절해 버렸지. 아쉬운 일이야. 그놈만 건재했어도 일이 쉬웠을 테니까.”
엘의 입에서 꽤 낯 익은 이름이 나왔다.
“어째서?”
“오크들은 강한 놈이 법이거든. 네가 나서서 그놈을 꺾어버리고 놈들에게 감히 대항할 수 없을 힘만 몇 번 보여줬으면 손쉽게 신성을 획득했겠지.”
“킁.”
엘의 말에 제황이 신음을 흘렸다.
헬칸을 죽여버린 것은 그 자신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지는 상상도 못했다. 헬칸이 살아있었고 녀석을 굴복시키기만 했어도 지금 엘이 말하는 드라쿤의 여왕과 결혼하는 짓 따위는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황이 말했다.
“지금 나와 궁기의 힘만으로 안되나?”
“부족할 꺼야. 신성을 담을 드래곤하트를 완전히 찢겼으니까. 신성 재건하는 작업이야. 그렇지만 네가 알이 가지고 있던 힘의 20%만이라도 얻는다면 가능해. 그러니 드라쿤들을...”
“난 용납할 수 없어!”
엘의 말을 가로막으며 궁기가 으르렁거렸다. 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지?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야. 엘어스의 선신과 악신인 엘과 알의 대리자인 인간의 용사가 오랜 대립 관계에 있던 수인족과 드라쿤들을 하나로 모은 후 다크어스를 격멸하러 간다는 신화를 만들기 위한 연극이라고...아! 인간의 용사보다는 고대의 용사라고 하는 편이 좋겠군. 아무래도 인간들은 이미지가 안좋으니...”
“그런 신화 따위 남길 성 싶으냐.”
“흐음, 이상하네. 신이라면 하나라도 더 좋은 신화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야 하는 것 아닌가.”
엘이 제황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궁기가 입을 꾹 다문다.
틀린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엘의 말대로 신이라면 오래도록 기억될 거창한 신화를 가지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그것이 이계의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본능적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제황은 아직 신화가 부족했다. 그를 생각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꺾어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그런 엘의 말은 제황이 대신 답해줬다.
“어차피 세 개의 차원을 틀어막으면 효과 볼 일도 없어. 그러니 기각”
“그래. 맞아!”
제황의 지원사격에 궁기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뒤이은 제황의 말에 다시금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다크어스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알의 힘도 필요하지.”
“역시 그렇지?”
그의 말속에 아예 거절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엘이 반색했다.
그녀가 이렇게 반기는 것은 그녀로서도 알이 수면에 빠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답게 한번 수면에 들면 최소 100년에서 500년이다. 상세가 위중하니 1000년을 잠으로만 보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가 사라지면 그동안 알과 함께 해오던 일들을 모두 자신이 떠맡게 된다. 선천적으로 게으른 드래곤에게는 절대 피하고 싶은 상황인 것이다.
“기간은?”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이주일 안에 끝나게 해주겠어!”
시간도 적당하다.
“흠, 거기에 저녀석의 치료 기간도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네가 이곳에서 알의 신성을 가져가 날 보조해주기만 한다면 치료는 금방 끝날 거야. 제발 도와줘. 어차피 그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이 필요하잖아.”
엘의 간곡한 어조와 마지막 부탁에 제황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야아!”
궁기가 제황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볼을 부풀린다.
그것이 연극이던 뭐던 그녀가 사랑하는 존재가 이계에서라도 누군가의 부군이니 하는 것으로 불리는 것이 싫은 그녀였다. 제황은 심통이 난 그녀를 감싸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들어올려 입술에 길고 진하게 입을 맞추며 귀에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제황의 속삭임에 궁기의 양볼이 붉게 달아오른다.
평소에 통나무같이 굴다가도 어느 순간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그의 돌발행동은 그녀의 가슴을 소녀처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히잉..”
#2
제황은 수인족들의 수도에 입성했다.
수도 전체를 울리는 환호에 기쁠만도 하건만 제황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고양이대가리, 곰대가리, 코뿔소대가리, 사자대가리, 소대가리, 호랑이 대가리... 물론 지구의 것들과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단지 구분하지 않으면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코뿔소대가리라는 것은 넙쩌적한 면상에 코와 이마에 큼지막한 뿔이 달려 있었고 호랑이 대가리라는 것은 늑대처럼 삐죽하고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에 갈기무늬가 듬성듬성 박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정한 것이다.
그나마 친근감이 드는 것은 고양이 대가리와 사자 대가리였는데 그럭저럭 인간 비슷한 면상을 지녔다. 물론 당연하다는 듯 삐져나온 각양각색의 긴 꼬리들은 예외라고 하자.
“고대의 용사시여.”
수도의 거대한 광장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 서서 기다리고 있던 소대가리의 신녀가 제황에게 고개를 숙인다.
엘로부터 어떤 신탁을 받은 것인지 제황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극도의 경건함이 담겨 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녀는 의식을 치루듯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황의 발치에 입술을 맞췄다. 자신들이 믿는 신의 신녀가 무려 인간의 발치에 입술을 대고 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수인족들을 더욱 환호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에게 이 행동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엘은 대놓고 수도에 있는 모든 수인족들에게 신탁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천년간 믿던 선신인 엘은 그를 다크어스에 사는 사악한 몬스터들과 그들의 터전을 시시각각 잠식하는 인간들도 모두 이 세계에서 쫓아내 주기 위해 강림한 고대의 용사이니 그를 대할 때 자신과 같이 대하라 했다. 또한 그 신뢰의 증표로 그를 엘과 알의 이름으로 수인족의 여왕과 드라쿤의 여왕의 대공으로 삼을 것이니 그를 받들고 이 사실은 전 세계에 전파하라 했다.
신을 믿고 따르는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그는 수도를 위협하던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을 모조리 섬멸해버린 초강자다.
“음.”
저도모르게 좁혀져 오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제황은 신음을 삼켰다.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발등에 입술을 맞추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소대가리 신녀라니...
엘이 그에게 걸어준 통역마법으로 이들과의 대화는 문제가 없었지만 갖가지 동물 대가리들이 인간의 말을 주절거리고 있는 광경이란... 수인족의 여왕이라는 것도 그다지 호기심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짐승 대가리일 테니까. 그때였다.
삐이이이... 둥둥둥둥... 창차라라랑
요란한 북소리 피리소리와 함께 수도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왕궁의 거대한 문이 좌우로 열리며 번쩍이는 갑주를 차려입은 수인족들이 오와열을 맞춰 걸어 나왔다. 갑주 곳곳에는 박아넣은 마나석이 빛을 반사시키며 그들을 더욱 성스럽도록 보이게 만든다.
“왕궁기사단입니다. 여왕의 대공을 호위하기 위해 나온 모양이군요.”
“그런가?”
성녀와 함께 그들을 바라보는 제황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를 맞이하러 나온다고 하기에는 그 기세가 자못 흉흉하다.
숫자도 상당했는데 얼핏 봐도 100 이상이다.
지구로 갔으면 못해도 7성에서 8성 사이에 걸칠 강력한 마나를 품은 존재들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제황에게 크던 작던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성녀가 먼저 나아가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사자대가리와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서로 몇마디를 나누더니 갑자기 신녀가 제황 쪽을 힐끔 바라본다. 그런데 돌아보는 무녀의 표정이 뭔가 좋지 못하다. 면상이 소인 관계로 표정을 읽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읽혀지는 것은 분명히 당황스러움이었다.
다시금 몇마디 말을 나눈 그녀는 제황에게 돌아와 마치 죄를 지었다는 듯 넙쭉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그...그게 저...”
그녀가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감히 말하기도 불경스러운 것... 그때였다. 무녀와 이야기를 나눈 사자대가리가 제황을 향해 외쳤다. 왕궁기사들 중 가장 강한 존재다.
“우리의 신 엘께서 신탁을 내리셨지만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지닌 널 믿지 못한다. 너와 같은 인간들이 얼마 전 우리 수도에서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더러운 패악을 저질렀고 무고한 왕국민들을 학살했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선의로 가장한 얼굴로 다가왔지만 그 이면에는 추악한 탐욕만이 있었을 뿐이다.”
처척...쿵!
그가 들고 있던 거대한 할버드로 바닥을 찍자 그와 함께 그를 따라 나온 백여명의 왕궁기사들도 일제히 발을 굴렀다. 그 발구름 단 한번에 제황을 향해 연신 환호하던 수인족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잠잠해 진다.
“그러나 엘께서 내리신 신탁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저 사악한 다크어스의 마물들과 인간들을 몰아내 줄 이라면 그만한 무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니 이 자리에서 고대의 용사의 무력을 시험하려 한다!”
처척...쿵!
그의 말이 끝나자 왕궁기사들이 곧장 뒤로 세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할버드를 든 사자대가리가 앞으로 나서며 어깨를 폈다. 타고난 신력을 과시하는 듯 300kg은 너끈히 넘어 보이는 중장갑을 걸치고 있다. 신장은 대략 3미터 가량이며 풍겨나오는 기운도 9성 헌터에 거의 근접한 것 같다.
소대가리 신녀가 푸륵거리며 외쳤다.
“왕실기사단장! 감히 엘의 신성하고 지엄하신 뜻을 거역하시는 겁니까! 그 무력의 시험은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 고대의 용사는 이곳에 오시기 전 수없이 많은 다크어스의 마물들을 단숨에 처치하셨습니다. 그 믿을 수 없는 역사는 많은 이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으며 이는 저 또한 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바 확실히 보증합니다.”
그녀의 말에 사자대가리 아니 왕실기사단장도 지지않고 받아쳤다.
“엘의 지엄하신 신탁은 우리 모두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 코다크 엘 레이커스는 저 간교한 인간들이 우리 땅에서 저지른 짓을 낱낱이 목도한 산 증인! 난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엘의 뜻이라 하셔도 당장 그분의 신벌이 내게 떨어진다 해도 내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신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기사단장! 난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신녀는 그를 염려하고 있었다.
비록 신의 뜻을 거스르는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지만 그는 이 왕국을 지탱하는 기둥임과 동시에 중요인물이었다. 그가 만약 용사를 시험하려다가 행여 그의 손에 죽기라도 한다면 자칫 엘의 거룩한 뜻을 이행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해도 일점의 원망도 없을 것임을 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벽창호의 사자후에 무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실기사단장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녀 또한 엘께서 친히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면 고대의 용사를 이렇게 극진히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실기사단장은 미들네임에 성스러운 ‘엘’을 지닌 신성한 왕실의 핏줄이었다. 그가 다치면 정말 골치가 아파진다.
“뭐, 결론은 나와 한판 붙겠다는 거군.”
제황은 신녀가 막을 새도 없이 그녀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왕실기사단장의 사자갈기가 파르르 떨린다.
“그렇다! 나 코다크 엘 레이커스가 너 고대의 용사에게 결투를 청한다!”
할버드를 꾸욱 움켜쥔 그가 자세를 낮춘다. 가뜩이나 험악한 사자대가리가 더욱 흉하게 일그러진다. 이제 신녀도 이 대결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 인간들의 추악한 얼굴을 까발려 주마.”
왕실기사단장이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자욱한 살기와 투기가 주위를 잠식했고 그의 사자갈기에서는 빠직빠직 거리는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극한에 이른 정점에 이른 초인이라는 증거다.
‘분명 저 사악한 인간놈이 뭔가 수를 썼을 것이다.’
그는 인간들과 꽤 많은 전투를 치러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도 많이 목도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저 고대의 용사라는 존재도 그런 눈속임같은 사기를 친 것이라고 말이다.
“귀엽네.”
제황은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 기회만 노리고 있는 왕실기사단장에게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기사단장의 갑주 곳곳에 박혀있는 마나석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특수한 비전으로 가공된 마나석들이 기사단장의 마나를 한순간에 증폭시켜 주는 공능을 지니고 있다.
수백kg에 달하는 할버드와 증폭된 마나, 타고난 신력을 통해 단번에 9티어 몬스터의 목도 칠수 있는 그였다. 그러나...
뚜벅...
용사의 몸이 가까워질수록 왕실기사단장의 몸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뚜벅...
다시 한발...폭발적으로 샘솟던 투기와 살기가 소화기를 만난 모닥불마냥 사그라져 버린다.
뚜벅...
들고 있던 그의 든든한 애병인 할버드가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뚜벅...
적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마구 떨리더니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본능의 외침이 그의 전투의지를 산산이 바스라뜨렸다.
‘덤비면 죽는다.’
그리고...
슥슥...
그의 머리를 긁어오는 손길이 있었다.
“착하네.”
왕실기사단장은 자신의 뱃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본능에 가까운 그 기분좋음에 대한 표현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르르르르...”
“애교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