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신과 함께-1
#1
위이이이이잉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죽은 듯 고요하던 작은 시내를 깨운 듯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남녀 간에 정을 나누던 중이건 화장실에서 힘을 쓰던 중이건 상관없다. 몸에 두를 수 있는 방한도구들을 한계까지 바리바리 걸친 그들의 손에는 모두 비슷한 모양의 큼지막한 배낭이 하나씩이 들려 있었다.
쿵...쿠쿵...쿵...쿵...
거리로 쏟아져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모두 한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정지시켰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 시내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 이목구비마저 확인이 가능할 지경이지만 그것들이 내는 육중한 소음은 그것들이 아직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거리에 있음에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다가오고 있는 그것들이 전부 헛것이거나 혹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는 뜻이다.
“웨이브다! 도망쳐!”
“꺄아아악!”
절망과 공포가 그들을 삽시간에 지배했다.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다.
이 지역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나도 웬만하면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다.
남극 쪽에서 헤엄쳐 오는 7티어 이상의 몬스터가 많은 지역이기에 오히려 사이렌을 울리는 행동이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안다. 그렇기에 웬만한 몬스터 웨이브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체 방공호로 느긋하게 대피하는 것이 일상인 그들이었다.
원체 추운 동네라서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이 집안에 그것도 방공호에 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몬스터로 인해 고립되더라도 방공호에서 두 달에서 세달 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이렌을 울리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도망쳐’
개인 방공호로는 버틸 수 없는 거대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올 때나 울리는 것이다. 5년이나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그런 웨이브가 몰아칠 때나 울리는 사이렌이다. 그리고 지금 다가오는 그것은 그들이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초거대몬스터들의 웨이브다. 사람들은 너희집꺼 우리집꺼 할 것 없이 근처에 있는 이동수단이라면 무조건 올라탔다.
‘도망쳐야 한다.’
몬스터 웨이브는 쓰나미와 같다. 느린 듯 보이지만 미적거리면 그대로 휩쓸려 버린다.
수많은 사람이 차량에 올라타 분분히 대피하는 와중···. 나란히 이웃한 두 집의 여인들만이 창백한 얼굴로 서로 고함을 내지르고 있다.
“우...우리 시메오네가 보이지 않아요! 언니!”
“카카랑 니콜라스도 그래!”
둘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집안을 아무리 찾아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 둘의 남편은 함께 페어를 짜고 헌터일을 했다.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는 두 집은 같은 건물에 살며 한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최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녀들의 남편이 일하던 곳이 몬스터들에 의해 고립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인맥이라는 인맥은 모두 전화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부 발표는 곧 구출될 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나날이였다. 자연히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필 지금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초거대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오는 이 와중에 말이다.
“아!”
시메오네의 엄마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저녁을 먹기 전 시메오네가 카카랑 니콜라스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한 이야기를 기억해 낸 것이다. 뭔가를 보고 온다고 말했던 것 같다. 자신은 그것을 흘려듣고 말았지만....
“비행장!”
떠올랐다.
시내 외곽에 있는 빅토르씨의 비행장에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과 바다 너머에서 날아온 거대한 비행체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어...언니! 어떻게 해요! 으아앙 비행장! 비행장!”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동생의 말에 그녀가 고함을 지르며 뒷말을 채근하자 시메오네의 엄마는 저녁 먹기 전 있었던 일을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니콜라스와 카카의 엄마는 창백한 안색이 파랗게 물들어갔다.
하필 그곳은 몬스터들이 웨이브가 몰려오는 방향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만약 아이들이 겁도 없이 그곳에 갔다면...
“안돼!!!”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차고로 달려갔다.
푸르륵..푸릉..푸르릉...
잠시 후 그녀는 낡디낡은 픽업트럭을 끌고 나왔다.
“내가 데려올게!”
“안돼! 같이 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시메오네의 엄마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미쳤어?! 여기서 기다려!”
솔직히 아이들을 구할 확률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비행장은 시내보다 웨이브에 가깝다. 아니 아이들이 있을 확률로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가서 찾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자신이 웨이브에 휩쓸리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두렵다. 그렇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곳에 아이들이 있다면... 남편에 이어 아이들까지 잃을 수는 없다.
“죽더라도 갈꺼야! 어서 달려!”
평소 조곤조곤하던 시메오네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 역시 아이들의 목숨이 걸리자 눈이 돌아간 것이다.
“제길!”
운전대를 붙잡은 그녀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힘차게 악셀을 밟았다.
그리고 더욱 커져가는 땅 울림 속에 비행장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2
비행장을 지키던 헌터들도 난리가 났다.
“어떻게 저 거대한 덩치들을 놓칠 수 있어!”
헌터들의 지휘관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통신기를 붙잡고 연신 꿱꿱 소리지르기 바쁘다.
남극 대륙을 건너온 것은 아니다. 가끔 그사이를 헤엄쳐 오는 몬스터들이 있기는 하지만 무려 일천여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건너온 몬스터들은 그들의 손쉬운 밥이었다.
그래서 부수입이 짭짤한 이곳은 명당으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저것들의 몸에는 바다를 건너온 몬스터들에게 붙어있을 거대한 얼음조각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 뜻은 바로 이 근방에 초거대 게이트가 생겼다는 것이다.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마나 수치가 으아악! 벌써 저기에!!! 우리도 철수합니다! 이상!
“이봐! 이봐!!!”
몬스터의 출몰을 감시하는 벙커의 보초병이 비명을 지르며 제멋대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제길!”
그는 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하필 자신이 이곳에 파견되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최악의 상황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의 광경은 꿈에라도 보기 싫은 악몽과도 같다.
몬스터들이 비행장의 외곽 한계선을 짓밟는 게 보인다.
이제 몬스터들과의 거리는 고작 2~3km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
다가오는 속도가 느릿하기는 하지만 저것이 절대 느리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온몸에 기다란 뿔이 달린 놈에서부터 수십 개의 눈이 달린 놈,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거대하다는 것이다.
그도 야전에서 뼈가 굵은 지휘관이기에 간단한 삼각측량을 통해 몬스터의 크기는 가늠할 수 있다. 척 봐도 그 크기는 300m 이상이다. 고층빌딩 같은 덩치의 몬스터들이다. 티어는 측정불가다. 게다가 엄청난 숫자는 궁신도 대항할 수 없다.
“어, 어쩌지!”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탈출하려니 가지고 있는 이동수단은 차량뿐이다. 비행장 주인이 소유하고 있는 경비행기가 떠올랐지만 몇 시간 전 자신이 난리를 쳐서 창고에 처박아놓게 했다. 행여 귀빈의 눈에 거슬릴까 하고 말이다.
“빌어먹을...빌어먹을..빌어먹을...아!”
그러다가 생각났다.
귀빈이 끌고 온 그 거대한 비행체...
그래 그들이라면 자신들 정도는 탈 자리가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들은 벌써 이륙준비를 마쳤을지 모른다. 생각을 마친 그는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미친!”
그의 예상대로 비행체의 정비팀들은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뭔가 느긋하다. 비행체에 시동조차 걸지 않았다. 일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자신들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러나 경험 많은 그가 보기에 저것은 병신같은 짓이다.
장비를 챙길 게 아니라 얼른 시동부터 걸어야 한다. 그가 있던 비행장 사무실 앞에는 이미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50여명... 모두 태워줄지도 미지수다. 아니 자신만이라도 타면 된다. 그런데 그의 눈에 헌터들의 맨 후미에 붙어 울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저것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비행장에 몰래 들어온 쥐새끼들을 잡아 쫓아내라고 한지가 언제인데···.
“아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던 두부하녀석이 외쳤다. 그중 하나는 몬스터웨이브의 출몰을 가장 먼저 알렸던 리오넬이라는 녀석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저것들이 우리를 태워줄지도 알 수 없는데 짐덩이까지 데려갈 셈이야!”
그가 바락바락 소리질렀지만 리오넬은 굴하지 않았다.
“데려가야 합니다!”
이것은 항명이다.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가던 그가 욕지거리를 하며 외쳤다.
“제길, 넌 돌아가면 각오해!”
“네!”
“모두 나를 따라라!”
“예!”
헌터들을 이끌고 그는 서둘러 비행체를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든 저 비행체에 같이 타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본래 전투 교리대로라면 후방에 있을 시내가 완전히 소거되기까지 이곳에서 저것들을 상대로 버텨야 하지만 그것은 미친 짓이다.
비행기로 달려가며 그는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매만졌다.
혹시나 저들이 말을 듣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들 중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이에게 달려가 외쳤다.
정비복을 입은 덥수룩한 수염에 험상궂은 동양인 남자다.
“우, 우리도 데려가 주시오!”
그의 외침에 달려오는 헌터들을 보고 있던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품에서 번역기능이 달린 헤드셋을 착용한다.
“이거야 원... 스페인어던가...”
헤드셋에 있는 버튼을 천천히 누르는 모습이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잠시 후 그것을 귀에 착용한 그가 말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도 데려가 달라는 말이오!”
“어딜?”
“이런 빌어먹을!”
몬스터들이 몰려와 이미 정신줄을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상대는 태연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웨이브가 몰려오잖소!”
그가 연신 손가락질을 했지만, 그것을 함께 바라보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딜 데려가?”
“이런 미친!”
그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어서 이곳을 탈출해야 하오!”
그의 말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저 몬스터들에 겁먹어서 우리 아트라스에 타겠다는 거군. 그런데 어쩌나 우린 이륙명령을 받지 못했네. 그러니 타봤자 소용없어. 그리고 걱정하지 마. 우린 궁신께서 지켜주시니까.”
그 대답에 그는 곧바로 권총의 홀스터에서 꺼내 안전장치를 풀어 그를 겨눴다.
더는 이 인간과 말다툼을 할 시간이 없다.
“미친 새끼야! 저것들은 궁신도 어쩔 수 없다고! 이대로 있다가는 죽어!”
부들부들 떨리는 권총의 총구를 겨눴지만, 상대는 여전히 태평하다. 아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자신의 어깨 너머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그의 어깨 위에 서늘한 검날이 내려앉았다.
“지휘관 이게 무슨 짓이지?”
“히...히익...”
서늘한 검날의 느낌에 그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남극의 한파보다 더 차가운 눈의 미녀가 서 있다.
경비 인력의 지휘관으로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특급귀빈 중 하나다.
‘이루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8성 최상급의 헌터임과 동시에 그보다 더 유명한 무련천가의 사무장이며 이 현장의 총책임자다. 자신 따위는 감히 고개 들어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의 여인이다.
“너 감히 우리 무련천가에게 무기를 겨누는가?”
그녀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그, 그건...”
최악의 상황이다.
잠시 이성의 끈을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이곳을 덮치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생겼다.
남극의 추위조차도 잊을 정도의 압박감에 그의 전신에 땀이 주륵주륵 흘렀다.
그러나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루미의 뒤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다.
“칼을 거두세요.”
“그렇지만 이자가...”
“아이들이 놀랍니다. 이루미양.”
“아, 네. .”
그의 말에 이루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를 감추며 칼을 거둬들였다. 그녀의 눈에도 헌터들의 뒤에 숨어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아이들이 들어온다. 잘못했으면 아이들에게 험한 꼴을 보일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나면서도 지휘관을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치 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네 어깨의 물건은 사라졌을 것이라는 무언의 암시를 담아 말이다.
그녀의 살기어린 눈빛에 지휘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직감적으로 짐짝으로 생각했던 아이들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을 안 것이다.
이 여자는 분명 아이가 없었다면 자신의 목을 가차없이 쳤으리라.
“모두 물러서세요.”
제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물러나자 제황은 다가오고 있는 초거대 몬스터들을 직시했다. 이제는 거의 지척에 다다른 몬스터들이다. 비행장의 낡은 펜스는 몬스터들이 일으킨 진동에 이미 쓰러진 지 오래... 제황은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으로부터 붉은 서광이 화악하고 일어났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빛무리에 휘감긴 제황이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룰러를 너무 자극한 건가. 참을성도 없는 녀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