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그는-2
#1
황량한 고원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한 허름한 비행장이다. 평소라면 경비행기 두서너 대나 서 있을 그곳에 거대한 덩치의 쿼드콥터 한 대가 내려앉아 있다. 육중한 동체 곳곳에는 그 용도가 단순한 비행이 아닌 전투라는 것을 알려주듯 두꺼운 장갑과 더불어 흉흉한 빛을 내뿜는 각종 화기가 달려 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이번 임무를 위해 특별히 아트라스에 동승한 10여 명의 정비 요원들이다.
아트라스의 외곽으로는 무장을 갖춘 헌터들이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다.
“조심해! 천천히!!!”
“A4 블레이드 테스트 들어가!”
“D2 로터의 출력 65퍼센트!”
“80퍼센트 될 때까지 계속 진행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C6 블레이드는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뭐야?”
“접합부가 덜렁거리는데 특수용접을 하려면 정비창으로 귀환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지. 예비품으로 바꿔!”
“알겠습니다.”
“여기 냉매도 교체합니까?”
“그건 됐어!”
남극이라는 극한 환경은 기계든 인간이든 공평하게 극한의 스트레스를 제공한다.
아트라스 또한 기계이기에 비행을 담당하는 로터와 동력 전달부가 많이 상했다.
“새벽에 출발이다! 그때까지 맞춰야 해!”
“알겠습니다.”
지휘자의 외침에 모두가 씩씩하게 대답한 후 정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펜스 밖 세 아이가 콘크리트 뒤에 숨어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한 아이 손에는 어디 잡지에서 뜯어낸 듯한 꼬깃꼬깃하게 접힌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종이 속에 나온 그것과 지금 바람 부는 비행장에 착륙해 있는 거대한 헬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맞지?”
“응. 맞아. 형”
“빅토르 씨가 오늘은 절대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작은 아이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삭인다.
“쉿 조용히 해. 시메오네!”
가장 덩치가 큰 아이가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며 말했다.
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덩치다.
“니콜라스 형 나···. 나는 안 되겠어.”
“시메오네... 이건 너랑 우리 아빠의 운명이 걸린 일이야! 설마 빠질 셈은 아니겠지?”
“아냐. 그렇지만 헌터는 위험하다고 엄마가 그랬어.”
니콜라스라는 아이의 말에 시메오메가 불안해 한다.
“궁신이 그럴 리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엄마가 국경수비대랑은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아이가 경계를 서고 있는 헌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확히 따지면 국경수비대는 아니다. 레드워터 클랜이라는 사설 클랜이지만 위치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경계에 있기에 국가와 계약을 맺고 국경수비대 일까지 하는 그런 곳이다.
세계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지에 주둔하는 이들이기에 거칠고 험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걸리면 혼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아이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너랑 우리 아버지를 구해줄 사람은 궁신 밖에 없어.”
“어른들이 얌전히 기다리면...”
“바보 그 말을 믿어? 일주일째야. 파울로 아저씨가 펍에서 술 마시면서 말했어. 우리 아빠나 너희 아빠 같은 하급 헌터들은 살기 힘들다고!”
큰 아이의 윽박지름에 작은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빠를 생각하니 아이답게 슬픔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일이 바빠 일 년에 두어 번 보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오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이도 안다. 엄마가 전화기만 붙들고 울다가 그것도 지쳤는지 넋을 놓고 티브이만 바라보고 있은 지도 며칠이 되었다.
블루 다이아몬드 기지에서 활동하는 클랜과 아웃소싱 계약을 맺은 작은 스쿼드 따위는 어떻게 되는지 티브이는 지겹도록 떠들었다.
“형. 가자.”
“그래.”
니콜라스의 동생인 카카가 먼저 뜯어진 펜스 밑으로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다.
어떻게든 궁신을 만나야 한다. 그것만이 저들의 아빠를 살릴 길이다.
#2
제황은 다크어스에서 본 것들을 이루미에게 가감 없이 설명했다.제황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파랗게 질려간다. 만약 그 화자가 제황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뒤덮을 몬스터들이 지평선을 집어삼키고 다가오는 곳이라니...
“일단 던전의 위치는 여기쯤이군요.”
남극의 지도를 펼친 상태에서 제황의 손가락이 한곳을 지목했다.
하얀 빙하 위로 뾰족이 서 있는 반듯한 돌산이 있다. 높이는 400미터가량으로 보이지만 남극의 빙하 두께가 평균 2km가 넘는다 했으니 다크어스 쪽에서는 보통 높은 산이 아니리라.
“지구 쪽으로 탐사대를 보내겠습니다.”
이루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어스쪽에만 있는 던전인지 혹 지구 쪽에도 자취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정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수확은 그뿐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궁기가 룰러의 위치를 잡아냈다는 것이다. 룰러가 제황에게 정보를 캐내고 있을 때 궁기 또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궁기에게 룰러의 위치를 전해 들은 제황이 그것을 이루미에게 말했을 때 이루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위치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곳이다.
룰러의 위치가 있는 곳은 까마득한 땅속 깊은 곳이었다. 수만 년 동안 신나게 땅속으로 파고들기만 했는지 지각에서 수백 킬로미터 안쪽 깊숙한 곳이다. 정확히 말하면 맨틀 전이대 근처. 수백 도의 온도는 둘째치고 생명을 가진 존재는 호흡도 불가능하다.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룰러는 이야기의 나오는 마왕처럼 마왕성에 앉아 용사를 기다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다크어스의 모든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하긴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리라. 누가 적이 쳐들어올 수도 있는 길 따위를 떡하니 만들어 두겠는가.
“수단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고생해주세요.”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루미로서는 딱히 방법이 없겠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가 나간 후 제황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에 앉아 상태창을 열었다.
-뭐 하려고?
-아카식레코브에 우회접속을 할 생각이야.
-어째서? 설마 네가 얻은 그 깨달음에 실마리를 찾으려는 거야?
-응. 본래라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알아가야 할 문제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다크어스에서 룰러에게 한방 먹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상황을 호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제 그곳에는 갱신된 제황의 강력함을 상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필요했다.
다크어스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얻은 작은 깨달음의 실마리... 룰러와 다크어스의 몬스터 사이를 파고들며 얻은 지식의 단편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룰러의 권능을 훔치기 위한 것이다.
-무작정 들어가서는 소용없어.
그곳의 광활함을 알고 있는 궁기였다.
게다가 그곳에는 침입자를 배제하는 존재들도 있다. 제황이 경비병이라고 이름 지은 것들이다.
그들과도 싸워야 한다. 문제는 그곳은 철저히 그들의 홈그라운드라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그들을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비정상적으로 작다는 것이다. 단순한 생물학적인 감각의 확장 따위가 아니다.
오직 지닌바 신위의 권역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 공간이 너무 협소했다.
그리고 궁기의 말대로 무작정 들어가서는 소용이 없었다.
-방법이 있어.
-조심해.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궁기까지 함께 들어가면 제황이 더욱 위험해질 뿐이다. 경비병들만 두 배로 꼬여들 뿐이니 말이다.
제황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상태창의 이면을 통해 세이브의 심층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카식레코드에 들어가기 직전 자신의 상태창에서 ‘명황안’을 분리해 냈다.
룰러가 가진 권능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스킬이다.
무려 1000킬로미터 밖에 있는 존재의 자취도 감지할 수 있는 유니크급의 추적스킬
이것을 길잡이 삼아 탐험을 해 볼 생각이다. 이윽고 제황이 그 방대한 지식의 흐름에 몸을 밀어 넣자 얼마 있지 않아 경비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음.’
신으로서의 권능이 강화된 덕분인지 그들의 존재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전에 없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 내용은 그다지 좋지 않다.
‘접속이 불허된 존재를 막아라.’
오직 그 하나의 의지가 제황의 몸을 울린다. 그것들은 마치 혈관 내에 있는 백혈구들과 같이 제황이라는 불순물을 밀어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제황은 그들이 모여들기 전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제황은 명황안을 길잡이 삼아 아카식레코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굳이 저들과 힘겨루기를 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그럴 시간도 없다.
아카식레코드의 구조는 나무의 잔뿌리와 닮아 있었다. 마치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 위그드라실의 뿌리와 같다고 할까? 그리고 그가 원하는 정보는 좀 더 근원에 인접해야 찾을 수 있다.
‘광대하구나.’
오로지 신의 권능을 통해서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곳들을 유영하며 제황은 대지가 아니 우주가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정보의 편린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하나 값진 것들이지만 지금은 쓸모없다. 제황은 계속해서 이동했다.
뒤따라 오는 경비병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진다.
명황안도 서서히 흩어지고 있다. 이곳은 정보의 저장소다. 정보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명황안이 분해되어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포기해야 하나.’
스킬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스킬이지만, 어차피 세이브라는 시스템에서 탈출한 그에게 그런 것들은 무의미했다.
파사삭...
명황안이 녹아들 듯 사라져간다.
이것이 사라지면 길잡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흩어진 명황안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잔해들이 서서히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제가 가야 할 곳을 찾아가려는 것처럼 연기처럼 이동한다.
제황은 그것을 쫓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명황안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제황은 실망하지 않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구체가 고요하게 떠 있다.
너무나 거대하여 하나의 작은 천체와 같이 그것으로부터 한없이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은...’
제황은 그것에 손을 담갔다.
#2
“어어엉...”
“아파요! 아악!”
아이들이 울부짖지만 그 아이들의 팔과 머리를 억세게 쥔 헌터들의 손에서 자비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들을 어떻게 하지?”
“빌어먹을 자식들 거기가 어디라고...”
두 헌터가 세 아이를 끌고 거칠게 비행장 밖으로 나섰다.
평소라면 혼꾸멍을 낸 후 쫓아내 버리겠지만 아이들이 붙잡은 이가 하필이면 이번 경비에 총책임자로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 작은 것들이 얼마나 교묘한지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자신들의 스쿼드 전체가 징계를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은 기밀로 분류되며 자신들 또한 비밀리에 선발되어 온 것이다.
저 거대한 기체의 주인이 누군지는 알지만 차마 그것을 입에도 담아서는 안 되는 그런 임무에 이 꼬마들이 재를 뿌렸다.
“확!”
분을 참지 못한 하나가 손을 들었지만 다른 하나가 그 손을 제지했다.
“보내주자.”
“임마. 리오넬! 이 자식들 때문에...”
이 사고로 인해 자신들의 이력에 크나큰 오점이 남아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꼬마들의 팔다리 하나 분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 애다. 네 딸이랑 나이도 비슷하잖아.”
그러나 동료의 말에 그가 분을 참지 못했는지 연신 바닥을 찼다.
딸을 끄집어내자 도저히 손이 나가지 않는다.
“제길,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에 잡혀 있는 꼬마들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들의 사정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 이 아이들의 아비가 있는 그곳은 지금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그것을 타개해 줄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궁신 밖에 없다.
“꺼져라.”
그는 최대한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린 후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넋을 놓은 눈이 먼 지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벌린 채 마치 호흡마저도 잊은 듯한 모습이다. 그는 아이들의 눈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밤이라고는 하지만 눈으로 인해 항상 백야가 지속되는 남극이기에 시계는 좋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그런 것을 처음 봤다. 온통 검은 피막을 지닌 괴기한 것들이 우뚝 솟아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것이 천천히 비행장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 손발이 오들오들 떨려온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헤드셋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말했다.
“모...몬스터 출현... 몬스터 출현... 티어 추정 불가.. 숫자는 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