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78화 (278/301)

# 278

그는...-1

#1

드드드드드드!!!

지상으로부터 붉은 태양이 폭발했다. 너무나 찬란하고 눈부시다.

대기마저 숨죽인 채 지상에 나타난 태양의 신성한 폭거에 고개 숙였다.

“가라!”

쩡! 파아아아아앙!!!

공간 모두를 붉은 색으로 물들여 버리는 그것은 수를 셀 수 없는 붉은 광선들이다.

사방을 향해 줄기줄기 뻗어 나가는 수십 수백 발의 그 붉은 선들은 지상과 지하 모든 곳을 무차별적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피리리리릿!!!!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그 광선은 너무나 잔인하도록 효율적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적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믿을 수 없게도 지상을 뒤덮고 있는 수백의 초거대 몬스터 모두를 공격권에 담아낸 것. 지평선 끝까지 뒤덮은 그 모든 것들이 붉은 광선의 먹잇감이었다.

룰러 조차도 잠시 지배의 권능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폭발... 그것이야 말로 학살자 그 자체다.

그리고 홍운의 찬란한 폭발이 걷힌 후 남은 것은 생명의 빛이 사라진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뿐이다.

쿠쿵...콰아아아앙!!!

하늘을 점령한 채 유유히 날던 것들도 하나둘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미 몬스터들의 시신으로 뒤덮인 대지 위에 다시금 시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 하나가 까마득히 높은 산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것은 학살의 주인공인 제황 뿐이다.

“후우우...”

제황은 격동하는 마음을 숨기려 가벼운 심호흡을 내뱉었다.

다크어스 전체에서 흘러들어오는 그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이 힘이 되어 제황의 바닥한 신위를 채우고 있다.

느껴진다.

제황을 향한 룰러의 두려움이 말이다.

제황의 목적은 단순히 몬스터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 이면에 도사리고 앉아 그들을 지배하는 존재 룰러의 대한 공격이었다.

이 다크어스의 모든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룰러다. 그렇다면 반대로 룰러가 느끼는 감정 또한 모든 몬스터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는 가정 하에 시작한 실험, 룰러가 몬스터들의 절대적인 숭배 속에 힘을 얻는다면 룰러가 제황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순간 몬스터들 또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굳건한 신성을 뒤흔들어 버리는 것이다.

-대단해!

뛸 듯이 기뻐하는 궁기지만,  제황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상태창의 신화 목록에 새로운 글씨가 아로새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살의 신 (SS급)-new

궁기의 주인(S급)

활의 주인(S급)

심판하는 자(S급)

무련천가의 주인(A급)

새로운 신화의 등장이다.

이름조차도 무시무시한 학살의 신이며 제황이 보유한 신화보다 더욱 뛰어난 SS급의 신화를 얻었다. 단순히 상태창에 몇 줄 글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신화의 방향이 완전한 전투로 특화됨과 동시에 그의 신위 자체의 성질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제황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대지에 쓰러진 초거대 몬스터들이었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바람이 제황을 향해 모여들었다.  패배자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냉혹한 승자와 같다. 승자의 전리품은 상대의 모든 것이다.

제황의 공격에 조각조각 박살나 흩어진 마나의 정수들이 그들의 영혼이 제황에게 모조리 흡수당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제황의 몸을 가득 채워가고 여의용혈신공은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갔다.

꿈틀...꿈틀...

여의용혈신공의 기운은 계속해서 자신의 덩치를 불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금새 한계에 다다른다. 스러져간 몬스터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러자 여의용혈신공은 변화를 꽤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것이 본래 자신이 갖춰야 할 모습이라는 듯 폭발적으로 커지더니 어느 순간 ‘슉’ 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때는 제황도 잠시 놀랐다. 항상 단전을 지키고 있던 그것이 사라졌으니까. 그렇지만 여의용혈신공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여의용혈신공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몸 전체가 용혈신공의 기운 속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다.

“좋네.”

온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함에 가볍게 소감을 내뱉은 제황이 시선을 들었다.

지평선 너머로 천천히 다가오는 초거대 몬스터들이 보인다. 그들 중에는 이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보이는 것들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바닥을 보이던 신위는 꾸준히 차오르고 있다.

자신감이 용솟음친다.

벽 하나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뭔가 간신히 손에 잡힌 작은 깨달음 하나도 얻었다.

이것을 시험하고 싶다. 이것이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식시키는 실마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

“아니야.”

제황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간신히 가닥이 잡힌 그것을 실험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자칫 우위로 돌린 전세를 어이없게 내줄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제황은 그 미련을 딱 잘라 끊어버렸다.

솔직히 아쉽다. 지금 기분은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다. 전능자의 기분이 이럴까. 모든 것을 종식시키고 룰러마저 무릎 꿇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끊어야 한다.

기분에 취해 전투를 지속하는 것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은 얻은 것을 천천히 씹어 삼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때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불패라고 했다.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체 적에게 달려드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가자.

-에? 설마 지금?

제황의 말에 궁기가 놀라며 되물었다.

다크어스의 지배자 룰러 조차도 제황을 경계하고 있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도 있다.

그런데 제황은 그만 물러서자고 한다.

-그래. 물러나자.

-응.

궁기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그의 언어 하나하나에 절대적인 구속력이 느껴져 항거할 수 없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한 차원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제 그녀와 완전히 동등한 단계에 섰다.

그녀가 수천 년에 걸쳐 완성한 신위와 신화를 그에 의해 단숨에 따라잡힌 것이다.

#2

씨이이이잉

온통 하얀 색뿐인 순백의 언덕으로 차갑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세찬 바람이 휘몰아친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과 얼음뿐이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얼음의 대륙이기에 몬스터조차 레이드 되지 않는 그런 잊혀진 대륙 남극...

게이트를 벗어난 제황과 궁기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바람을 뚫고 이동했다. 초인의 반열을 넘어 신이 된 두 존재에게 이정도 추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지구얼음의 90%를 차지하는 곳 답게 아무리 이동해도 보이는 것은 온통 눈과 얼음뿐이다. 그나마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증거인 듯 토착생명체인 펭귄들과 몬스터들의 흔적이 간간히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들도 이런 추위는 싫은지 영보이지 않았다. 물론 찾는다면 못 찾을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것들을 찾아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기쯤이 괜찮겠네.”

제황은 무한고에서 발신기를 꺼내 얼음 위에 꽂은 뒤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근처에 대기중이던 아트라스가 신호를 감지하고 이곳을 향해 날아올 것이다. 기다리기 지루해 간식 몇 개 꺼내 먹고자 했지만 두어 번 씹은 다음에는 던져 버렸다.  그대로 꽁꽁 얼어버려 도저히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크어스 쪽은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

궁기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모르지. 룰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으으, 추워.”

의도적으로 크게 말한 궁기가 은근슬쩍 제황의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그러자 피식 웃은 제황이 그런 궁기를 품안에 넣어줬다. 추위 따위에 영향을 받기에 둘 모두 너무 멀리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궁기의 마음이 느껴진다.

너무나 오랜 시간 함께 했기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둘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서로를 설레게 만든다.

“음, 너 좀 큰 거 같아.”

궁기는 가 제황의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제황은 커져 있었다. 이전에는 궁기의 키가 180센티 정도였고 제황이 187센티 정도였는데 지금의 제황은 2m 가 조금 안될 정도로 커졌다. 키뿐만 아니라 덩치도 조금 더 커졌다.

“그런가.”

이유는 대충 짐작하는 중이다.

이것은 여의용혈신공이 일으킨 변화 중 하나였다.

환골탈태를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의 환골탈태가 좀 더 완벽한 몸으로의 변화라면 지금의 변화는 기존에 확장되었던 영혼의 격에 어울리는 몸에 가까워 졌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궁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쿼드콥터 한 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제황의 근처까지 날아왔지만 쉬이 내려앉지는 못한다.

바람이 그렇게 거세지 않지만 하늘이고 땅이고 온통 하얀색이다.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서 지면에 명암을 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일명 플랫라이트라는 현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 시계도 그리 좋지 못한데 이정도면 조종사는 육안으로 착륙할 곳을 확인하기 불가능할 지경이다.

아무리 최신예 비행체라도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의 착륙은 온전히 조종사의 능력에 달려 있다. 공중을 몇 차례 선회하는 아트라스를 바라보던 제황이 낮게 한숨을 내쉰 귀 헤드셋을 통해 말했다.

“해치만 열어주세요. 알아서 들어가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조종사가 곧장 대답을 했고 잠시 후 아트라스의 후면에 있는 해치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궁기의 도움을 받아 아트라스 내부에 들어서자 이루미가 서둘러 다가왔다.

궁기는 그대로 제황의 안으로 숨어 버렸다.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곳은 제황의 안이다.

“대기하는데 별 일 없었습니까?”

제황의 물음에 이루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입장이 바뀐 것 같다.

제황은 그 위험한 다크어스에 다녀왔고 자신들이 한 것이라고는 기다린 것뿐이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9티어 몬스터의 장갑으로 만든 방어구를 입고 진입했는데 지금 그가 입고 있는 방어구 곳곳이 녹아버린 듯 흉하게 구멍이 뚫려 있다. 웬만한 전투에서는 몸에 먼지 한 톨 묻히지 않는 제황의 방어구가 녹았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가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다.

“뭐... 후우”

이루미의 시선을 따라 방어구들을 바라본 제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지 못했는데 꽤 장비 파손이 심하다.

“그보다 룰러의 말로는 다크어스 게이트에서 뭔가 일이 터진 것 같던데...”

제황의 말에 이루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다크어스의 게이트 사태는 공교롭게도 제황이 다크어스로 들어간 지 얼마 안 있어 발생했다.

만약 지금 그것을 말한다면 그는 쉬지 않고 곧장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세계 곳곳의 다크어스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났지만 다행히 대부분 격퇴했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보였지만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조금 피곤한 건 둘째치고 다크어스에서 얻은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야 한다.

“그럼 좀 쉬겠습니다.”

제황의 말에 이루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진다.

“네. 혹시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아트라스 내부에는 제황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제황이 사라지자 요원하나가 이루미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걸 말씀 안 드려도 될까요?”

“조용.”

그녀의 얼굴에 냉막한 기운이 흘렀다.

제황에게는 대부분 격퇴라고 말했지만 그 ‘대부분’ 중 격퇴되지 않은 것들은 지금 꾸준히 피해를 양산하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러나 이루미는 나중에 이 일로 제황에게 혼나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그가 쉬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것이 제황의 말을 무시한 세계가 응당 겪어야 할 대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절대 제황님의 귀에 들어가선 안됩니다.”

“주지시키겠습니다.”

“돌아가죠.”

“아 그리고 정비팀장님께서 남극에서의 오랜 비행은 아트라스의 로터 부분이 결빙되거나 전기부분이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 그런가요.”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도 조금은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마나엔진을 사용해 과거처럼 급유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기계라는 것은 끊임없이 정비를 받아야 하는 물건이었다. 특히나 이 아트라스는 제황의 발과 같은 존재였다.

“조금 전 근방에 가장 가까운 공항 쪽을 수배해 놓았습니다.”

“잘하셨네요. 사전에 보안은 철저히 했겠죠?”

“당연합니다.”

“좋습니다. 그곳에 들러 정비를 마친 후 곧바로 태평양을 건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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