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함정-1
#1
마주하고 있는 그것을 보면 도플갱어라는 게 생각난다. 물론 현존하는 몬스터는 아니다. 그냥 서양 쪽 이야기에나 나올 몬스터의 이야기다. 웃기는 것은 제황의 분위기까지 똑같이 복사했다는 것이다.
제황은 말없이 상대를 빤히 바라봤고 상대 또한 제황을 똑같은 모습으로 말없이 응시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룰러였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정말 의외의 단어다.
“이야기 좀 하자.”
정말 의외의 말에 제황의 말이 순간 막혔다.
유창한 한국어다.
“무슨 뜻이지?”
“그 말 그대로다.”
쿠구구구...
딛고 있던 땅이 꾸물거리며 일어나더니 의자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정보를 나누자는 것이다. 앉아라.”
룰러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주변 풍경만 괴랄하지 않다면 차라도 한잔 필요한 분위기 같다.
“먼저 사과하지.”
룰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공격한 것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렇지만 말을 정정하지. 먼저 공격한 것은 너였다.”
지배자치고는 쪼잔하기까지 하다.
“내가 먼저 공격했다고?”
“그렇다. 내 세계를 쳐들어온 건 너 아닌가..”
“다크어스도 지구를 공격하지 않았나.”
제황이 반문했다. 그리고 그의 물음에 룰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지배력이라는 것에 한계는 있다. 그 모든 것을 관리할 수는 없다는 거지. 그런 이유로 나도 지구로 넘어간 것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피차 마찬가지라는 거군.”
“그래.”
그의 대답에 제황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과하겠다. 이렇게 이야기가 통할 줄은 몰랐다.”
제황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룰러가 말했다.
“머리를 숙인다?”
“미안함의 표현이다.”
“그렇군.”
그러면서 제황을 따라 연신 고개를 꾸벅거린다.
-얘 뭐야? 신기한 놈이네?
-그러게 나도 충격적이군. 하나 확실한 건 그냥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
궁기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제황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룰러는 호기심이 많다. 그리고 뭔가 서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날 공격했던 건 내가 몬스터들을 공격해서인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널 배제하려 했던 건 맞으니까..”
“어째서지?”
“당연한 것 아닌가. 너희 인간들이 내 세계로 들어와서 한 짓을 생각해 봐라.”
“난 잘 모르겠군.”
제황이 답했다. 그러자 룰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손을 까딱인다. 그러자 한쪽의 흙들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수백 수천개의 형상들을 만들어 갔다.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그것들이 만들어 가는 것은 모두 무기를 든 사람들과 몬스터의 형상이다. 그것들은 엉겨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몬스터와 싸우는 인간들은... 헌터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폭탄이 터지는 모습도 보인다. 아니 폭탄이라기보다는 버섯구름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 폭발 속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스러져 간다.
“너희들이 다크어스라고 부르는 내 세계에 한 짓이다.”
룰러의 말에 제황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저것을 보면 상대가 자신을 적으로 볼 이유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와있다.
변명할 거리도 없다. 명명백백 지구의 헌터들이 다크어스로 건너와 한 짓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다크어스의 게이트를 모두 닫은 것은 아니었다. 선발대를 보내고 끊임없이 사정을 정탐했다. 그것이 차후 있을 몬스터의 출몰을 막기 위해서든 탐사를 위해서든 헌터들을 투입했고 몬스터들과 싸웠다.
룰러가 보여주는 것을 보자면 핵폭탄도 몇 번 터뜨린 것 같다. 아니 꽤 많이 터뜨렸다.
상대 처지에서 생각해보니 충분히 자신을 공격할만하다. 제황이 한 짓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화를 하려는 거지?”
“너희들에게는 나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내 백성 중에도 그런 존재는 많지만 타차원에서 건너온 존재는 네가 처음이다. 그래서 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너희들?”
룰러의 말에 제황은 조금 놀랐다. 방금 말한 것은 복수형이다.
알고 말한 건지 혹은 단어선택의 실수일지는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룰러가 궁기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제황의 예상에 쐐기를 박듯 룰러가 말했다.
“네 안에 함께하고 있는 그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틀렸는가?”
“... 맞다.”
제황은 순순히 인정했다.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하던 룰러가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 너는 왜 그곳으로 향했는가.”
“그곳?”
“고대의 폐허를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 왔던 그 인간놈과 같이 고대의 폐허를 지키는 바벨탑 앞에 섰지 않은가.”
“바벨탑... 아니 네가 고대의 폐허라고 부르는 그곳에 대해 아는가?”
제황은 꽤 놀랐다. 지구에서도 익숙한 단어가 나온 것이다.
바벨탑
성서에 나오는 신에게 도전한 인간이 쌓은 탑을 말한다. 물론 성서라는 것 자체가 중동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와 기록들을 긁어모아 차용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발음조차도 같은 것이 이 다크어스에 존재할지는 생각도 못 했다.
“잘 안다. 창조주들이 우리를 이곳에 격리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있는 곳 아닌가.”
룰러는 꽤 전문적인 단어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선입견이 깨져나가고 있다.
“난 이곳의 문명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제황이 되물었다.
그러자 제황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룰러의 모습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격동을 이기지 못하는 듯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한다.
“난 ... 고대인들에 의해 버려진 모든 것들의 대표자니까.”
#2
룰러가 말을 시작했다.
그는 아니 그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그보다는 다중복합인격체라고 보는 편이 적당할까? 룰러가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육체는 하나이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인격(?)은 수십 수백 개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수만 년 동안 결합하고 진화한 결과물이다.
“창조주들은 나를 실험체라 불렀다. 영생불멸의 실험체”
룰러는 영생체였다. 고대인의 손에 탄생한 영생체 말이다. 마치 과거의 인간들이 인간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AI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대인들은 마도학과 생물학을 결합하여 초월적인 영생체를 만들려 했었다.
그 이유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와 자연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되어 가는 지구를 탈출할 방법으로 자신들의 몸을 초월적 영생체로 탈바꿈하려는 고대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을 전쟁에 사용하려는 시도가 있은 후다.
룰러와 비슷하지만 좀 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들이 속속들이 창조되었다. 고대인들 사이에서도 전쟁과 갈등은 존재했다. 그 속에서 룰러와 같은 존재들은 계속해서 진화해 나갔으며 더욱 더 치명적인 것으로 발전했고 어느 순간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미 태양계까지 진출한 고대인들은 그 존재들로 인해 식민행성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고 그 결과는 식민행성들의 멸망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대인들은 더 이상 파괴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지구를 차원으로 분리하는 처방을 꺼냈다. 고대인들은 도저히 그것들을 박멸시킬 수 없었다. 무한한 진화를 할 수 있는 초월적 영생체들에게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땅에 남겨진 우리들은 우리들의 창조주들의 의도에 맞춰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적을 말살해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난 승리했다.”
이야기는 꽤 길었다.
과거 한번은 들어봤을 미스테리 게시판에 지겹게 올라오는 그런 고대의 이야기들이지만 그에 대한 산 증거가 말을 해주니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룰러는 한국말도 무척 잘했다.
“그런데 말을 잘하는군.”
“내게 잡혔던 인간들 중 너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놈들에게서 배웠다.”
“그렇군.”
제황은 잡혔다는 인간들에 관해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 관한 관심도 끊었다. 결과는 뻔했으니까.
아마 룰러가 이렇게 유창한 대화를 하는 이유는 다크어스를 침범했던 헌터들을 통해 뽑아낸 지식 덕분이리라. 그렇지만 다크어스의 몬스터 중 지능을 지닌 존재가 포획되었더라면 인간도 못지않게 잔인한 짓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떠나서 룰러의 대한 생각은 크게 수정할 수밖에 없다.
말이 잘 통하는 것은 둘째치고 매우 고등한 존재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그곳은 왜 찾아갔나.”
룰러의 물음에 제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도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황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차원안정화장치를 재활성화시켜 다시금 차원간의 안정화를 시키겠다는 것이다.
제황의 설명이 끝나자 룰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차원이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건가?”
“그래.”
“재미있군. 내가 지금까지 파악하기로 너희 인간들은 침략을 아주 좋아하는 종족으로 보였는데”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제황의 대답에 룰러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황은 긴장했다. 설명은 끝났고 이제 룰러의 판단만 남았다.
“좋은 정보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룰러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마치 전혀 다른 존재가 된 느낌이다. 룰러의 변화에 제황의 안색이 굳어졌다. 주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강력한 마나를 내뿜는 존재들이 일제히 접근해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넌 전혀 생각이 없었군.”
제황이 말했다.
“그래. 이 지겹고도 지겨운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화의 씨앗들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룰러의 대답에 제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생각했던 예상 범위 안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을 가장 손쉽게 해결할 방법이 사라졌다는 것만 확인했다. 상대는 처음부터 평화적인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
“후회할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황이 말했다.
그러나 룰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이미 내 군세들이 지구로 침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네가 없는 이상 내 군세를 막을 존재는 없어 보이는군. 난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불확실성을 지우려 한다.”
쿠쿵...쿵..쿠쿵...
“쿠어어어억!!!”
“크르르륵!”
육중한 땅울림과 함께 거대한 산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적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다가오는 강력한 존재들 또한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날 이곳에서 죽이려는 건가?”
“그래. 넌 위험한 존재니까. 그리고 그만큼 흥미로운 존재지. 나와 같은 힘을 지닌 이세계의 존재를 흡수함으로 난 좀 더 완전해 질 것이다. 그렇지만 날 너무 원망하지 마라. 이것이 내가 태어난 존재 이유이기도 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룰러는 땅바닥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제황에 대한 살의만이 가득한 강력한 몬스터들 뿐이다.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제황은 비천궁을 꺼내 들었다.
이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가까운 게이트 쪽으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전투를 완전히 회피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 게이트 쪽으로 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분명 이곳 못지않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슈우욱...
궁기가 나타나 제황의 곁에 섰다. 그녀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다.
“외통수네?”
“응.”
담담히 대답한 제황이 천천히 몸을 풀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가벼운 전투의 흥분마저 든다.
제황의 가진 신격의 본질이 전투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추적은?”
제황의 물음에 궁기가 담담히 대답했다.
“끝났어.”
제황 또한 룰러와의 대화가 평화적으로 끝날 거라는 순진한 생각만 한 것은 아니었다.
룰러가 제황과 대화를 하며 제황을 잡을 덫을 놓고 있을 때 궁기는 열심히 룰러의 위치를 쫓았다. 룰러의 본체가 있을 그곳.... 그리고 끝났다는 것은 추적을 마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표정이 안 좋네?”
제황의 말에 궁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이야기 해 줄게.”
“그래.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자.”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도 빠듯하다.
“한정된 신위로 싸워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군.”
궁기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 말대로 이곳은 지구와는 분리된 차원이다.
예전 드래곤과의 전투와는 정반대의 상황, 이제는 제황이 보유한 신위만으로 싸워야 한다.
궁기와 둘만이 해야 하는 고독한 전투가 시작되려 한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우리 집으로...”
“응. 가야지.”
한숨을 내쉰 궁기와 제황이 천천히 모든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