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다크어스 게이트-2(수정)
#1
“권제님 대단하십니다!”
공격대장 중 하나가 다가와 권제에게 외쳤다.
반신반의하여 작전을 수락했지만 이렇게 손쉽게 9티어 몬스터를 레이드 할 줄은 그도 몰랐기 때문이다. 궁신을 제외하고는 9티어 몬스터를 솔로 레이드 할 수 있는 이가 존재할 거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권제는 그의 말에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다른 곳의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E와 D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대구와 부산 쪽이다.
북한 쪽의 하나와 경기도 쪽의 두 개를 무적성과 무련천가가 맡았고 대구와 부산은 헌터사무국이 맡은 상태다.
“흠”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그나마 전초전이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처리해 버리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다른 헌터들도 천천히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그가 나선다면 좀 더 적은 피해로 몬스터들을 레이드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능사가 아니다.
“철수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권제의 말에 공대장이 경례를 붙이며 답했다.
그로서는 권제와 함께 레이드를 진행한 그것만으로도 영광중의 영광이다.
그때였다. 헬기 한 대가 권제가 있는 쪽으로 날아와 내려앉았고 주변에 있던 이들은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드가 끝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전투지역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제재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헬기에서 내린 이는 사무엘 린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9티어 몬스터의 사체를 놀란 듯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창백한 표정으로 권제에게 다가왔다.
세계헌터사무국의 수장이 나타났음에도 권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미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과 이곳으로 찾아올 것을 대략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권제님을 뵙습니다.”
사무엘 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지위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짓이지만 오히려 그 인사를 받는 권제의 표정이 담담할 뿐이다.
“사무엘 오랜만입니다.”
“예.”
둘은 안면이 있었다.
사무엘 린의 취임식 때 권제도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바쁘신 사무총장께서 어쩐 일이시오?”
권제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그러자 사무엘 린은 얼굴에 조급함을 감추지 않은 채 다짜고짜 말했다.
“궁신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다크어스 게이트의 폭발 소식을 듣자마자 사무엘 린은 다크홀의 멤버들과 긴급회의를 가진 후 곧바로 대한민국으로 왔다. 이번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궁신을 만나기 위해서다. 또한 다크홀 멤버들의 항복 선언도 가지고 왔다. 저들 또한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궁신과 대립하는 노선을 철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 린의 말에 권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걸 왜 묻는지 모르겠군요.”
권제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이다.
저들이 대한민국에 한 짓을 생각해보라. 국가의 영토를 좀먹고 있던 9티어 몬스터들을 레이드해줌으로 수천만 아니 수억의 사람들이 제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뿐일까? 그의 손자는 지원요청이 들어오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 도왔다. 그가 아무리 세계최강의 헌터라고 해도 세계는 넓고 몸은 하나였다.
어느 때는 한 달이 넘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들과 맞섰다.
몬스터로 인해 얻은 경제적인 이득은 빈민층과 몬스터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풀었다. 제황이 드러내지 않고 베푼 것들까지 세상이 알았다면 저들은 제황에게 절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이 한 짓은 무엇인가.
하루아침에 얼굴을 바꾸고 온 세계가 궁신을 물어뜯었다.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착각하는 구시대의 유물들은 다크어스의 위험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차원에 보낸 영상을 직접 와서 해명하라고 한다. 다크어스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야 마치 자신들이 궁신의 위에 군림하는 듯 착각하는 놈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세계의 존망이 달린 문제입니다. 권제시여.”
사무엘 린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권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의 그 논리는 참으로 편리하군. 세계의 존망이 걸렸으니 닥치고 오라는 건가? 그 존망이라는 게 자네들의 자존심보다 작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권제의 말이 짧아졌다. 더 이상 존중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자네들이라는 말이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오는 사무엘 린이었다.
권제는 이미 그를 저들과 같은 무리로 인식하는 것 같다.
“이해합니다. 뭐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궁신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꽉!
권제의 손이 사무엘 린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 그래서 내 손자에게 해묵은 감정 풀고 어서 빨리 몬스터 레이드 해달라고 칭얼거리러 왔다는 거군.”
“윽...”
사무엘 린은 권제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7성의 헌터라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손을 놓으십시오!”
사무엘 린의 곁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헌터들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세계헌터사무국 사무총장을 근접에서 호위하는 이들이다. 숫자는 총 다섯 명... 고작 다섯 명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들 모두가 7성의 헌터들일 뿐만 아니라 전신을 아티펙트로 도배를 한 강자 중에 강자다.
제황을 만나기 전 과거의 권제였다면 상대하기 곤란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7성의 헌터 다섯을 근접전으로 상대한다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권제에게는 우습기만 한 그들이다.
퍼버버버벅!!
“크으윽!”
“커억!”
자유로운 손으로 순식간에 내지른 다섯 번의 내지름에 다섯은 모두 일제히 신음을 내지르며 저만치 밀려 버렸다. 감당하기 힘든지 둘은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렸다. 7성헌터들의 반응치고는 너무 싱거울 지경이다. 누가 본다면 2성이나 3성 헌터들의 드잡이질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부로 들어가면 심오한 무리가 숨어 있었다.
마나조차 사용하지 않은 공격에 다섯이 물러나 버린 것은 그들이 준비하는 공격의 맥을 정확히 짚고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똘마니들의 관리가 허술하군.”
“큭, 어떻게...”
사무엘 린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을 호위하는 이들의 실력은 그가 잘 알았다.
절대 이렇게 밀려날 이들이 아닌 것이다. 주먹을 내지른 권제는 단 한푼의 힘조차 주지 않은 듯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엠페러 조차도 이런 위용을 보이지는 못한다. 그 말은 권제가 9성의 헌터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일 뿐이다. 고작 몇 년 사이에 9성 헌터라니 말이다. 물론 권제가 그것을 설명할 이유는 없다.
“부탁하러 온 주제에 여전히 자존심이 살아있는 건가?”
“궁신님이 어디 계신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지금 그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이 말도 안되는 자존심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그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용의가 있었다. 자신이 먼저 나섰어야 했다고 오는 내내 자책했다. 그의 말을 따랐다면 최소한 폐쇄된 다크어스 게이트에 대한 조사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의 말에 권제가 피식 웃었다.
그가 있는 곳에 직접 가겠다? 웃기지도 않는다.
권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곳은 선택받은 이들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대가를 선사한다. 아주 간결한 그 이름은 바로 죽음이다.
“넌 갈 수 없다.”
권제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9성 헌터라는 벽을 뛰어넘은 그에게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땅을 생각하며 말이다.
#2
-여긴 언제나 기분이 더러워.
-동감, 같은 하늘 아래 이런 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제황은 하늘을 바라봤다.
잿빛도 아닌 보라색 구름이 자욱이 끼어 있다. 그것은 평범한 구름이 아니었다. 일종의 가스 구름이다. 하늘을 떠다니는 정체 모를 거대 생명체들의 온몸에서 뿜어내는 그것들이 아지랑이처럼 땅으로 스며들 때면 온몸의 감각기가 비명을 지른다.
아무리 저것이 온전한 생명체가 발산하는 살아있음의 증거라 해도 그 본체는 지옥에 있는 그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기분이 더럽다.
질척...질척... 물컹물컹...
마른 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 가스 구름 때문인 것인지 땅속에 있는 뭔가가 수작을 부린 건지 다크어스의 대지는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그나마 지구와 비슷한 것은 냄새 뿐일지도 모른다. 이 지독하게 썩어버린 곰팡이 냄새라는 것은 말이다.
무한고에서 비천궁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몸에 있는 모든 아티펙트들을 해제했다.
감각에 아지랑이처럼 걸려오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무관심하다. 그러나 제황은 방심하지 않는다. 그 무관심이야 말로 함정이었으니 말이다. 조급해 하지 않는다.
자박...자박
산과 비슷한 동산 수개를 넘었다. 동산과 같지만 동산이 아닌 것들을 더 많이 넘었다. 이것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아니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의 이름은 없다. 저들끼리야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굳이 이들을 깨워 알고 싶지 않다.
-돌아가야 하나.
-그냥 걸어가 보는 건 어때?
-사양하겠어.
예전 사케노오스케들과 함께 출현했던 크립들이 마치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찐득찐득하고 끈적한 그것들 속에는 검디 검은 그림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사케노오스케 같아 보이지만 그보다 수 배는 더 커 보이는 그것들의 주둥이로 보이는 부분이 화악 하고 커지더니 주변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 삼켜 목구녕으로 쑤셔 넣는다.
두두두두...
지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산 하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말 그대로 산이다.
쿠쿠쿠쿠쿠....
수십 개의 다리로 배를 밀며 천천히 기어오기 시작했다.
제황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눈의 착각일 뿐이다. 제황은 천천히 걸어 그것이 지나는 경로에서 벗어났다.
쿠쿠쿠쿵....
초거대 몬스터의 목적지는 크립으로 이루어진 호수였다. 몬스터의 몸에서 뻗어진 거대한 관이 호수로 파고들고 마치 파이프로 물을 빨아올리듯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제황은 그것을 지나 끊임없이 걸었다.
말상대는 궁기가 해주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리는 붉은 빛을 발한다.
-여기군.
백린이 거대한 비석이라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그냥 거대한 바위였다. 해독할 수 없는 빼곡한 글씨 밑으로 그림으로 이곳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나타나 있었다. 마치 제황과 같은 까마득한 후에 찾아올 후세에게 남기는 글과 같은 것이었다.
그 뒤로는 던전의 입구로 보이는 검은 구멍이 보인다.
그러나 제황은 그곳으로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걸어 그곳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던전을 찾아 걸었던 시간 보다 더 긴 시간을 걸어 멀어지던 제황이 자리에 멈춰섰다.
“재미있군.”
제황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와라.”
제황의 말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제황의 근처에 있던 끈적한 대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던 그것은 이내 하나의 형상으로 변했고 제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제황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칙칙한 온갖 색이 잡탕으로 섞인 것처럼 보이던 그것이 천천히 제황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갔다.
“악취미군.”
잠시 후 완성된 것은 제황과 똑같은 생김새의 인물이었다.
“악취미군.”
목소리까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