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시체로 돌아온남자-2 (수정)
#1
“어이 왔나?”
내실로 들어서자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백린은 달려온 제황에게 손을 들었다.
누가 보면 친구 집에 놀러 온 한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백린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팔이 뜯겨 나간 것 같다. 아니 팔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을 부릅떴다. 이루미의 말에 긴가민가하여 도착하기 전부터 백린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믿지 못할 것 같다.
백린의 몸은 지금 죽어있다.
아니 죽어있다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시간은 멈춘 듯한 느낌일까?
“어떻게 된 거지?”
제황이 물었다.
“어떻게 되긴 죽어 가는 거지.”
백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마시던 커피를 쭉 들이켰다.
입맛을 다시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예전에 말해주지 않았나? 난 시간이 멈췄다고···. 워낙 강력해서 시체 상태로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되지.”
“그럼 아무 이상이 없는 건가?”
“이상이 없기는 곧 뒈질 거야. 억지로 살아있는 것 뿐이라고... 지탱할 마나가 머물 수 없으니 내부로부터 천천히 붕괴하겠지. 그런 끔찍한 기분은 느끼기는 싫지만···. 빌어먹을···.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러더니 무한고에서 손바닥 크기의 하얀색 사각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거뭇한 얼룩이 눌어붙어 있는 그것의 옆에는 두 개의 USB 포트가 달려있다.
“시간이 없어 어서 켜봐.”
백린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자신의 무한고에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위치 정보와 진입하면서 찍은 영상이 들어 있으니까 분석하면 대충 위치가 나올 거다.”
포트를 연결하자 몇 개의 폴더가 나오고 칠십여 개의 동영상과 네비게이션용 위치 파일이 나왔다. 웃기는 것은 숨긴 형식으로 된 폴더 몇 개가 보인다는 것이다.
제목이 꽤 웃기다. ‘영강18회차’
슬쩍 미리보기를 보니 18살짜리만 모아놓은 것 같다.
“어, 그건 내 흑역사... 뭐 됐다. 죽는 마당에 뭔 상관이냐.”
삭제하고 싶다는 듯 태블릿을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백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만사 다 귀찮다는 표정이다.
“웬만하면 내가 설명해 주고 싶지만, 앞으로 고작해야 5분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네가 고생 좀 해라. 썩을...”
“왜 이 꼴이 된 거지?”
제황이 물었다.
“다크어스에서 가장 쌘 놈을 만났거든.”
“룰러?”
“룰러? 지배자라... 하긴 지배자가 맞긴 하군. 너도 겪어 본 건가? 설명하긴 편하겠군. 그래. 그놈 맞아. 놈에게 발각당해서 꽁지 빠지게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뭐 덕택에 그 노망난 영감탱이랑 두억시니가 소멸당하고 나도 이 꼴이 되었지만···. 죽기 전에 조언해 주자면 내가 택했던 게이트로는 가지 마라. 내가 분탕질을 좀 쳐놔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제 다 귀찮다. 궁금한 건 영상 뒤져봐라. 난 인제 간다. 그리고 그 흑역사는 좀 지워줘라.”
그 말과 함께 백린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의 발끝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일어나 그의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지 백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잘린 팔에서는 검게 변한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하고 그의 얼굴도 급격히 노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기분 더럽군. 아 그리고 무한고가 해제되면 나올 물건들 중에 편지들이 있을 텐데 그건 네가 주인 좀 찾아줘. 꽤 많을 거야. 한 1000명? 낄낄...”
그 말을 하는 사이에도 검은 기운은 꾸준히 백린을 잡아먹어 들어갔다. 이윽고 머리만 남았다.
“크...크헉.. 큭! 지겨운 무련천가의 종자야. 뭐라고 한마디 좀 해라. 내가 그 개고생을 하면서 알아온 건데”
“...”
백린이 입술을 악물고 중얼거렸지만, 제황은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볼 뿐이다.
“재수 없는 새끼... 젠장 난 죽기 전에 울어줄 사람도 없구나. 영미야. 진아야. 브리짓... 이제 보러 간다. 헉...헉헉...”
머리카락이 마치 물처럼 흘러내렸다. 꽤나 수려한 용모를 지녔던 그는 이제 흉측하기 이를데 없는 몰골로 화해 있었다. 붙잡고 있던 시간이 이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끌끌, 솔직히 지금 이야기하는 건데 너...너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어. 그리고 영감탱이가 그러는데 궁기가 그렇게 쌔끈하게 생겼다며? 부럽다. 새끼야. 맛있게 따먹고 잘먹고 잘 살아..크헉”
죽기 전의 유언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한 악담이다.
제황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검은 기운은 그를 완전히 감싸 버렸다.
제황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그런데 그는 알까. 그 마지막 악담이 그의 안식을 꽤 오랜 후로 미뤄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음... 음... 음... 음... 어, 왜 안 죽지.”
검은 기운이 완전히 가셨음에도 백린은 여전히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아니 이전보다 좀 더 생생해 보인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다시금 역행하고 있다. 듬성듬성 빠져버린 머리에서는 다시금 검은 머리카락이 슝슝 솟아오르고 주름졌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 어어... 이 힘은 뭐야. 허억...”
백린은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는 것도 모자라 줄줄 흘러넘치고 있는 순수한 마나에 눈을 부릅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완전히 그 꼴이 된 형태다.
그때 놀라고 있는 백린의 머리를 잡아오는 섬섬옥수가 있다.
“이 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 맛있게 따먹어?”
“어, 어... 누구세요?”
백린의 얼굴에 창백하게 변했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과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백린은 지금 생각했다. 조금 전 자신이 꽤 멍청한 선택을 했으며 자신의 상대는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것들보다 상식을 우습게 파괴하는 괴물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퍼어억!
“커어어억!”
시체가 되었음에도 느껴지는 이 고통은 무엇일까?
백린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가슴에 박혀 들어간 하얀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백린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 어어! 이건!”
“쉽게 죽여줄 것 같냐?”
#2
“일단 위치는 다크어스 쪽의 남극이라고 보면 될거야.”
백린은 얌전히 서서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을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가슴에는 마나석 하나가 끄트머리만 남은 채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나가 뿜어질 때마다 백린의 몸에 깨알같이 새겨져 있는 상고문자들이 연신 빛을 발하고 있다. 팔 한쪽은 여전히 없다. 궁기도 그것까지 회복시켜 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차원안정화 장치는 어디 있지?”
제황이 조금은 거만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백린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의 곁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이 너무 무섭다.
“던전의 깊이는 대략 50여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잠깐, 던전이라면서 층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50층이라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이루미가 손을 들어 물었다.
보통 던전이라고 하면 그냥 굴을 뜻한다. 몬스터 중 땅을 팔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개미처럼 지하 이곳저곳을 뚫어 끝도 없는 굴을 만든다. 대융합 초기에는 이 존재들이 꽤 성가셨다. 몬스터라는 게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계단 따위를 만들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훨씬 간편한 방법을 취했다.
그것은 바로 탐색용 드론에 생물학 무기를 장착해 들여보내는 것이다. 던전의 크기에 따라 100대에서 200대 정도만 쑤셔 넣고 입구들을 모조리 폭파해 버린다. 예전 대현의 지하비밀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던 검은색의 드론도 던전 내부에 있을 5티어 이상의 몬스터를 레이드하기 위해 개발 중이었다고 했던가.
“고대인들의 작품인 것 같더군. 그리고 입구에 비석이 서 있었는데 글씨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림으로 50층임을 나타내고 있었어. 고작 50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꽤 깊어. 나도 무한고가 없었다면 3층 정도에서 포기 했을 정도로...”
백린의 대답에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직으로 파고 들어갈 수는 없나?”
제황이 의문을 표했다. 층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얌전히 그 층을 따라 이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괴상한 마법이 걸려 있다. 박살 내도 금방 복구가 되지. 그보다 내가 설명 좀 계속해도 될... 아니다. 끙”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백린은 제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붉은머리의 미녀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자 슬쩍 눈치를 보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가 생각한 가능성 중에 살아난다는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거의 모든 힘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탱하는 마나까지 박박 긁어모아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간신히 축지술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찢겨 버린 팔을 치유할 마나 조차 남기지 못했고 팔에서 일어난 대량 출혈로 신체의 혈액 중 80% 이상 소실되는 순간 삶을 포기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과 비슷한 급의 술법사와 최소 9티어 마나석 세 개, 그리고 치유가 끝날 때까지 생명력을 지탱해 줄 고위급 힐러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여기 있었다.
호의 따위를 바라기는 무리인 천주백가에 깊고 깊은 원한을 가진 궁기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제어할 이는 지금 눈앞에 팔짱을 끼고 있는 제황 뿐이다.
“흠흠,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백린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다른 동영상 파일을 열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굴이다. 천장과 벽에는 조명인 듯한 보석이 박혀 있고 그런 공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천장의 높이는 대략 5미터 가량.. 높지 않다.
“본체를 사용할 수는 없겠군.”
“그래.”
제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궁기는 물론이거니와 저런 높이라면 드래곤들도 본체를 현신할 수 없다. 그것들을 제외한다고 쳐도 제황과 비슷한 전투력을 지닌 그들이기는 하지만 본체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적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겠지만 백린의 한마디가 그런 제황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이곳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8티어급에서 9티어 급이라는 거야.”
“!!”
백린의 말에 제황의 눈이 커졌다.
고작 높이 5미터 짜리 던전에서 나타나는 몬스터가 무려 8티어에서 9티어라고 한다. 몬스터의 강력함은 덩치에 비례하는 것이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굳이 물을 필요 없이 그들의 영상이 곧 재생되었다. 일단 형태는 인간형이었다. 껍질이 갑주와 같이 변한 그것들의 형상은 마치 이족 보행을 하는 바퀴벌레와 비슷한 모양새다.
머리가 천장에 달린 보석의 빛을 가려 음영이지는 것을 보면 신장은 대략 4미터가량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통로를 가득 메운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이름은 철갑 바퀴라고 지었다. 이름 그대로 단단하고... 두억시니의 이빨까지 막아내더군. 재생력은 말 그대로 바퀴벌레급에 네 개의 다리를 팔처럼 사용하는데 세 마리가 달라붙으니 9티어몬스터의 공격까지 방어해내는 방어막이 종이짝처럼 찢어졌다.”
“마나를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고 그런 방어막을 찢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이루미다.
“그래. 마나는 사용하지 않아. 그런데도 저정도야. 또 호전성이 무시무시해. 여차하면 팔다리 두어 개는 떨어지고서도 미친 듯이 달려든다. 그리고 재생의 영역까지는 아니지만, 자체 치유력도 엄청나.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으면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다시금 달려든다.”
백린이 설명하는 그것들은 지금 화면에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강대한 몬스터들을 앞에 둔 백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 놓았다. 백린은 단순한 술법사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루미가 사용하지만 창룡신검을 이용한 근접전 능력도 거의 8성 헌터에 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꺼내 든 두억시니와 그 외 몇 마리의 환수가 더 그의 전투를 도왔지만, 순수 물량에서 밀려나는 중이었다. 술법도 소용 없다. 속성 방어력도 있는지 불이든 뇌전이든 모조리 몸으로 뚫고 전진한다.
“저게 고작 3층이라고?”
“그래. 이후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내가 파악한 것은 여기까지야.”
백린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통로를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그것들의 행렬에 기가 찰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모든 것들이 네가 이름 정한 그 ‘룰러’ 라는 놈의 지휘를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