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69화 (269/301)

# 269

심상치 않아-2

#1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그렇게 나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제 목표는 몬스터 레이드가 아닙니다.”

“후우, 네.”

제황의 말에 이루미는 끝내 낮은 한숨과 함께 긍정하고 말았다.

그렇다. 그녀도 안다. 그녀가 짝사랑하는 사람은 명예나 권력 따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수족과도 같은 자신 또한 응당 그래야 하지만 그녀는 아직 제황과 같이 초연하지 못했다.

“그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마나파동”

분위기를 환기하려 제황이 물었다.

레이드를 하며 돌아오면서 감지한 마나의 흔들림에 관해 묻는 것이다.

“네. 알아본 결과 심상치가 않습니다. 현재 제황님께서 말씀하신 현상이 전세계적으로 관측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루미의 대답에 제황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돌아오면서 강렬한 마나의 떨림을 느꼈다. 단순한 게이트의 출현 전 나타나는 마나의 상승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해 이루미에게 조사를 지시해 놓았었는데 그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관측되었다니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엘어스 쪽은 어떤가요?”

“조금 전 들어온 정보로는 엘어스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루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작되는 거군요.”

제황은 우려하던 세 개 차원의 완전한 합일이 코앞에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예전 백린의 말 그대로였다. 늦어도 2~3년 안에 시작될 거라 했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슬슬 전 세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루미가 물었고  제황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세계에도 최후통첩을 해야 한다.  기득권자들은 제황의 말을 허투루 넘기거나 듣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우려했던 대로 그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제황은 조금은 기대했었다. 그리고 저들이 자신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한다면 저들에게 향후 닥쳐올 종말에 대해 말하고 함께 고민도 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저들은 제황이 몰아내 준 9티어 몬스터가 사라진 자리에서 생산된 인간의 힘으로 과거 잘못된 과거를 답습하는 짓을 그대로 자행했다.

'욕망에 충실할 뿐인 존재들'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몬스터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들의 희생을 정당화시켰다. 가진 자는 좀 더 가지기 위해 쥐어짜고 못 가진 자는 가진 자가 만든 테두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린다.

애초에 현 인류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다크어스로 향할 원정대에 저들의 자리는 없다.

제황은 이미 홀로 다크어스에 다녀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레이드를 하며 느낀 것은 자신과 궁기 그리고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존재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뿐이었다. 지구로 건너온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은 솔직히 말하면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던 잔챙이 같은 녀석들뿐이었다.

예전 백린이 억지로 게이트를 열어 도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일 일이 있었다.

당시에 제황은 그 분노로 백린을 죽여버리려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일종의 백신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다크어스로 통하는 초대형 게이트가 도시 한복판에 생기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나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백린의 백신 말이다. 그렇기에 그 불안정한 게이트는 오오가무시만을 내뱉고 소멸한 것이었다.

만약 다크어스의 게이트가 지금보다 훨씬 크다면 인간이 나눈 티어 따위는 의미 없을 그런 놈들이 건너올 것이다. 더욱 공포스러운 건 그 모든 몬스터들이 모두 하나의 존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름 따위는 없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제황은 당황했다.

백린은 그곳이 온갖 최악의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복마전으로 표현했었다.

그렇지만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몬스터만 가득했을 뿐이다.

인간이 호흡하기에 산소 포화량이 좀 높다는 것과 식물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구나 엘어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결론은 그 모든 것이 위장이었을 뿐이다라는 것

룰러(Ruler)

제황의 존재를 놈이 알아채는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놈은 다크어스의 지배자였다.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다. 말 그대로 다크어스 모든 생명체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그런 지배자다.

믿을 수 없게도 놈은 신성도 가지고 있었다. 무척이나 거칠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신성이었다. 제황보다 월등이 강력한 신성을 지닌 존재 그것이 룰러다.

그것과 교감도 나누었다.

아니 교감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통보와도 같았다.

단지 제황에게 감정을 알려왔을 뿐이니까.

그것은 마치 미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계의 존재에 대한 반가움이라던가 같은 신성을 지닌 존재에 대한 호기심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굴종하라는 메시지 뿐...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부터 그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들이 지구에 침범한 몬스터들을 레이드 하듯이 제황을 대상으로 몬스터들이 조직적으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어느 때는 수백 수천의 몬스터들로 사방을 포위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10티어급 이상의 몬스터 수백 마리가 덤비기도 했다.

오오가무시를 닮은 녀석들도 떼거리로 덤벼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오가무시보다 1.5배는 더 크다는 것이다.

녀석들에 비춰볼 때 과거 레이드 했던 오오가무시는 고작 새끼였다.

체고만 거의 400m가량 되는 놈들이 이동할 때마다 대지가 미친 듯이 진동한다. 대지도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룰러의 권역이었다.

몬스터라는 존재 자체가 본래 상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놈들이지만 놈들의 존재형태와 크기는 정말 비정상적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수십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챈 제황은 곧장 지구의 게이트로 탈출했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쪽의 정보를 노출하지 않은 채 레이드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인간의 무기 따위는 저들에게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백린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백린이 차원안정화장치를 찾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이다.

“세계헌터사무국에 이번 일에 대해 심각성을 알렸나요?”

“네. 이번 현상이 차원 완전한 융합의 전조라는 것과 다크어스의 무서움을 알렸습니다.”

“영상은요?”

“영상 또한 공개했습니다.”

제황이라고 무작정 다크어스에 다녀온 것은 아니었다.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을 모두 촬영해 왔다. 다크어스를 이용해 먹을 궁리만 할 한심한 위정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끝내 보류해왔다. 솔직히 그 영상들을 풀었을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자포자기를 할까봐 고민했다. 그 충격을 인류가 이겨낼 수 있을까 망설였다.

이루미가 말했다.

“그렇지만 제황님 저는 저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다지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냉소적인 이루미의 말에 제황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사실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당하는 게 낫지 않는가. 다만 제황은 저들이 최소한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류를 위해 사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올바로 바라볼수록 두들겨 줄 생각이다.

자신이 얼마나 폭력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난 나를 믿을 뿐입니다.”

#1

세계헌터사무국은 특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단순한 소집이 아니다. 매우 비밀스러운 루트로 유지되어 오던 비밀단체의 소집. 인류의 진정한 결정권자들...여기서 결정권자들이라는 건 나라의 대통령 따위가 아닌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계승되어 온 비밀스런 단체의 관련자들을 뜻했다. 각국의 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이나 대통령들이 아닌 이들과 먼저 긴급회의를 진행하게 된 것은 그만큼 무련천가에서 알려온 정보가 인류에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막후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워낙 사안이 중대하기에 회의는 화상회의로 개최되었다.

세계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 사무엘 린은 거대한 납골당과 같은 모양의 원형 홀에 서 있었다. 이곳의 이름은 ‘다크존’ 빼곡이 차지한 모니터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의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리 그가 야망가라고 해도 되도록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세계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 사무엘 린 조차 취임 당시 단 한 번 사용해 보고는 처음 문을 개방한 것이다.

“무련천가에서 알려온 향후 지구의 존망을 건 차원융합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합니다. 사전 정보와 영상은 이미 전해 드렸으니 이제 그에 대한 기탄없는 의견 부탁드립니다.”

사무엘 린이 말했다.

-궁신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다크어스에 대해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 정보들을 모두 무시하고 이걸 믿으라는 건가?

목소리의 주인의 말에 사무엘 린은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 주인공의 가문 구성원 중 하나가 예전 궁신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 궁신의 편에서 이야기 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목소리에는 거북한 느낌이 가득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세계헌터사무국은 궁신의 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꽤 신빙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무엘 린, 책임을 회피하는군. 세계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인 당신은 메신저일 뿐인가?

조금은 조소 어린 목소리...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일에 대해 제 어떠한 판단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무엘 린은 선선히 능력없음을 시인했다.

궁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든 혹 사실이 아니든 그 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크어스의 지배자...룰러. 그래. 궁신측에서 보내온 정보로 따지면 진정한 지배자군. 그것이 조종하는 다크어스의 몬스터들이 우리의 이웃이 된다면 인간의 지위는 단숨에 땅속까지 처박히겠군. 크큿...

-조용히 하세요.

-허허, 단장 감히 내게 말하는 것인가?

모니터상의 인물들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던 한 검은 음영이 다른 이들을 진정시키며 사무엘 린에게 말했다.

-조용. 사무엘 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만약 궁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융합 후 통제가 가능합니까? 저는 당신의 의견을 신뢰합니다. 그러니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혀에 꿀을 바른 듯한 목소리다.

그러나 사무엘 린은 그의 말에 전혀 안도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으로 자신은 세계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에서 사상 최악의 빌런으로 추락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사무엘 린이 말했다.

“지금으로는 불가합니다.”

사무엘 린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궁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 인류에게 답이라는 건 없다.

그나마 발버둥이나 가능할까?

-지금으로는?

“네. 지금의 체재에서의 대응이라면 절대 불가합니다.”

-그 말뜻은 설마?

“네. 과거 60년 전 대융합이 일어나고 논의되었던 전 인류의 최후생존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 린의 말에 장내에는 잠시 고요가 감돌았다. 그리고...

-하하하하...

-호호호...

홀에 음울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사무엘 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익히 예상했었다. 애초에 인류의 최후생존전선이 먹혀들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시험 단계에서만 논의되었던 것으로 저들의입장에서는 ‘다행히’ 시행되지 않은 미완의 몬스터 인류 존속 계획일 뿐이다.

모든 인류의 힘을 하나로 결집 시킨다. 그리고 모든 분쟁과 다툼을 멈춘 채 오로지 인류의 생존만을 우선시하여 무력을 결집시킨다.

모든 경제활동을 중단한 후 전 인류가 몬스터에 대항하는 것이다. 인류 최후의 무기 핵에 대한 모든 리미트가 해제된다. 또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인류를 지킬 최후의 지하요새를 건설하는 한편 그마저도 뚫릴 경우를 가정하여 우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DNA가 담긴 우주선을 발사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한마디만이 홀을 울려 퍼졌다.

-아울러 궁신에게 홀에 직접 출석하여 그 사실을 설명하라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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