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64화 (264/301)

# 264

육아원의제황-1

#1

추위가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계절이 왔다. 아직 새벽 동이 트지 않았지만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제황은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 중이고 궁기는 그 옆에 누워 새로 나온 드라마를 보며 봉지과자를 아삭거리고 있다.

전에는 유명한 곳의 디저트만 찾는 미식가 흉내를 내더니 요즘은 그것도 귀찮은지 그냥 질소충만한 평범한 과자를 찾는 궁기였다. 제황의 곁에 붙어서 하루종일 하는 짓이라고는 뒹굴뒹굴하며 인터넷이나 드라마만 보는 궁기다.

그렇지만 요즘 제황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이불로 몸을 대충 둘둘 만 그녀가 팔을 조금 뒤척이자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이불의 위로 보이는 매끈한 굴곡은 어떤가.

제황이 슬쩍 바라보자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궁기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펄럭거렸고 그때마다 아찔한 풍경이 연출된다. 그렇다. 그녀는 요즘 옷에 뭔가를 걸치기를 싫어하는 병에 걸렸다.

제황이 그 이유를 물으니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요즘 번식기라서 그래.”

“...”

그러면서 제황을 요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아마 평범한 남자라면 눈이 돌아가서 덤볐으리라. 물론 제황도 목석이 아니었기에 궁기와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제황도 신체 건강한 남자다. 미녀가 단둘이 있기만 하면 헐벗은 채 달라붙는데 참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련을 하는 시간이다.

애써 마음을 다잡은 제황은 눈을 감고 상태창을 열었다.

그러자 뒤죽박죽으로 글씨가 깨진 상태창이 나타난다.

제황은 요즘 이 상태창을 분석하는 것에 맛 들인 상태다. 물론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었는데 세이브라는 지구방어시스템의 표면부터 역설계하면서 그곳에 남겨진 신의 자취에 대해 분석하며 새롭게 배우는 중이었다. 웃기는 건 그것이 묘하게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일과 닮아서 전혀 인연이 없던 프로그래밍 책까지 근래 공부한 제황이었다.

제황의 최종 목적은 세이브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지식의 보고에 접속하는 것이다.

세이브는 단순한 가림막일 뿐 그 진정한 상위 시스템은 지구의 모든 지식이 망라된 도서관인 아카식레코드였다. 아니 그것을 아카식레코드라고 부르는 것도 인간의 기준으로 정의해 놓은 것일 뿐 진정한 이름은 아니다.

제황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배우며 요즘 깨닫는 것은 진정한 신이란 오히려 기계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생명의 순환은 모든 생명체에 공평하다. 그렇기에 그것에 선악의 구분을 두는 것은 무의미하며 결론적으로는 선신이든 악신이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 자체로 모든 것들이 자연의 산물일 뿐이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마저도 크게 보면 대자연에 하나일 뿐이다.

신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며 인간에 대한 고찰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눈높이와 인간에서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것은 다르다.

지구라는 것을 생명체로 따졌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오히려 해악과 마찬가지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인간은 암세포다. 너무 극단적인 표현일까?

신의 반열에 한걸음 올린 처지에서 볼 때 인간의 존재는 유익하다기보다는 해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는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자정작용이 가능하기에 그렇게 부정적인 면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굳이 인간이라는 위험한 생명체들을 품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는 이유는 세이브라는 시스템이 생겨난 근본 원인에 대하여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신으로 탈바꿈하면서 제황이 신으로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결정의 순간에 서 있다고 보는 편이 좋았다.

제황이 궁기에게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꾸만 자신의 인성이 마모되어 간다는 느낌에 조바심이 났고 한창 심할 때는 몬스터에 대한 레이드 의지마저도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궁기는 제황에게 그 답을 찾을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탕탕탕...

“조형빈봉사자님! 일어나셨나요?”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황은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린 유니폼을 입은 뒤 머리를 대충 매만진다. 문밖으로 나서자 제황과 같은 봉사자들이 졸린 눈을 비비고 서 있다.

“조회에 늦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네.”

제황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같은 건물에 머무는 봉사자들의 숫자는 대략 50명가량 되었는데 다른 건물들에 있는 이들까지 합치면 거의 200여명이 숙식을 하며 봉사한다고 했다.

“많이 힘드시죠?”

“괜찮습니다.”

“그래도 여기는 시설이 엄청 좋은 편이에요. 여기저기 봉사 많이 다녀봤는데 역시 돈이 썩어나는 헌터가 운영해서 그런지 시설들이 엄청 좋아요. 아휴”

“아. 네.”

“형빈군, 아 형빈군이라고 해도 되죠? 그런데 괜찮겠어? 젊은 사람이 이런 일 힘들텐데...”

“네.”

단답형으로 대답하지만, 여자들은 한 번 입이 터지면 쉴 줄을 모른다. 그 돈이 썩어나는 헌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 그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

-응. 미래 우리 아이들을 위해 미리 체험한다고 생각해.

-하아.

-농담이야. 어머 혹시 애들 싫어해?

-글쎄

아이라는 생명체와 거의 접점이 없었던 제황의 삶이었기에 그것은 미지의 생명체이기도 하다.

-일단 해봐. 인간의 본질을 깨달아라 따위의 거창한 화두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겪어. 쓸데없는 짓은 아닐 거야.

-알았어.

궁기가 말한 것은 사람 사이에 섞여서 삶을 체험하라는 것이었다.

제황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라 궁기는 지적했고 제황도 그 말에 동감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만든 복지지구에 있는 무련육아원이라는 곳에 봉사를 왔다. 물론 신분은 속인 채다.

얼굴이야 제황이 주의를 조금만 흩트려 트리면 웬만한 헌터조차도 제황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기에 이루미의 간단한 지시 하나로 다음날 제황은 조현빈이라는 25살의 어리숙한 대학생 신분으로 육아원에 봉사를 올 수 있었다.

조회를 마친 후 간단한 식사를 하고 그가 배정받은 5세 반의 문을 열었다.

“으에에에에엥!”

“어부아! 아부!...”

제황이 들어서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울고 뛰어놀고 소리지르기 바쁘다.

선생님들은 그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이불을 정리하는 중이다.

꼬마 하나가 침을 질질 흘리며 그의 다리에 붙어서 유니폼 바지에 침을 바르기 바쁘다.

“이불 모두 모아서 카트에 담아주세요.”

밤새 신나게 오줌을 지린 이불들을 떠넘기며 한 선생이 말했고 제황은 문밖에 놓인 카트에 이불들을 한가득 쌓았다.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그것들을 가져다가 세탁실에 배치된 초대형 세탁기에 나눠 넣고는 세제를 넣고 빨래를 돌린다.

차고 넘치는 제황의 돈을 가져다 쓰는 육아원답게 건조까지 원터치로 가능한 세탁기들이지만 워낙 숫자가 많으니 그 작업만 한 시간가량 걸렸다. 이불들이 돌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방 청소를 시작한다.

주위의 눈이 있어 헌터로써의 근력은 최대한 쓰지 않았다.

쓸고 닦는 청소가 끝나니 이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다.

놀이터로 나가니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다.

무련육아원의 특징은 다른 일반적인 보육원보다 훨씬 많은 선생님들을 근무한다는 것인데 그를 통해 선생님들이 받을 스트레스를 줄이고 아이 하나하나에 좀 더 신경 쓸 수 있다고 한다.

제황은 조회에서 자신이 일을 도울 선생을 배정받았는데 채씨 성을 가진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수더분하고 다정다감한 선생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니 그녀가 한쪽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요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에요. 조회시간에 들으셨죠?”

“네.”

최근 육아원에 아이들이 늘어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당수가 엘어스의 삼천교국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약 20여명의 아이들이 놀이터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주위를 노려보고 있다.

“도저히 경계심이 풀리지 않네요.”

다른 아이들이 활기차게 놀고 있지만 그 아이들의 움직일 줄 모른다.

“...”

어쩌면 아이 중 제황이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도 있을지 모른다.

저지른 짓의 규모에 비하면 매우 단시간에 끝났기에 주변의 평가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적었다고 하는데 어쨌건 거의 천여 명이 죽어 나간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가 행한 것을 후회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평범한 방법으로 삼천교국을 와해시키려 했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피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지구에서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는 게 그들의 특성이자 전투성향이었으니까. 제황이 그들의 신앙의 근원부터 부수고 들어가 그들을 이끌 고위층들을 일거에 말살해 버리고 나아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력을 보이자 항복한 것이었지 만약 그 대결이 팽팽했다면 수천 아니 수만의 인명피해가 났을 것이다.

각설하고 고작 세 살에서 다섯 살인 아이들일 뿐인데 주위의 모든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또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조회시간에 아이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정신치료가 병행되어야 할 아이들이지만 아직 인력이 구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악!”

선생님 중 하나가 한 아이의 손을 살짝 잡았는데 아이는 대뜸 선생님의 손을 물어 버렸다.   피가 날 정도로 억세게 물었는지 선생의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한 선생 괜찮아요?”

“네네.”

“어서 양호실로 가세요.”

“네.”

손을 물린 선생을 다른 선생이 양호실로 데려간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교사조차도 거부하는 아이들로 인해 선생들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제황이 다른 이들 모르게 아이들을 향해 신의 힘을 발현했다.

스으으...

제황은 아이들을 향해 의지를 담은 기운을 실어 보냈다. 그 의지는 바로 안정과 평화다. 그 기운이 아이들을 뒤덮자 경계하던 아이들의 눈에 가득하던 두려움이 한결 얇아졌다. 그리고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제황 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온다.

“어?”

“아이들이...”

제황 또한 생각지 못했던 반응에 조금은 당황했다.

신의 힘은 워낙 상위의 격을 지녔기에 평범한 이들은 그 이적을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제황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선생들마저도 그 모습을 놀람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도 다가서기 힘든 아이들이 고작 봉사자 청년에게 거리를 좁히고 있다.

그런데 선생들이 제황에게 다가가려 하자 아이들은 여전히 선생들에게 경계심을 보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형빈씨.”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채 선생이 제황에게 말했다.

“네.”

“첫날부터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이 아이들은 형빈씨를 경계하지 않으니 한동안 아이들을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대신에 자잘한 청소 업무는 열외로 해드릴게요. 담당할 선생님들이 충원될 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조금 전 양호실로 가신 분이 원래 담당이지만 아무래도 형빈 씨가 나을 것 같네요.”

“...”

#2

첫날 의도하지 않은 일로 인해 졸지에 20여 명의 아이를 떠안은 제황은 다음날부터 뜻하지 않은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다. 본래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복지지구 자체가 워낙 지방에 있어 특수교육에 필요한 자격증이 있는 선생을 뽑기 힘들다고 한다.

시설은 좋지만, 아직 기간이 짧아 인력 충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제황은 이루미에게 해당 예산을 대폭 늘리더라도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시를 내린지 하루만에 관광버스 수 대를 나눠탄 수십 명의 교사가 육아원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형빈 선생님 조아요!”

“저리 가!”

“으아앙!”

아이들이 도통 제황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선생들이 어르고 달래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마치 어미 새를 따르는 아기 새처럼 하루종일 제황의 뒤를 쫓아다녔다.

“형빈씨를 왜 이렇게 따르는지 모르겠네.”

채선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저 어리숙하고 말수 없는 청년은 육아에는 단 1%의 재능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살갑게 굴지도 않고 할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도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만을 따른다.

가장 웃기는 것은 아이들을 재울 때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아이들이었기에 잘 때도 경계심이 상상을 초월하는 아이들이었다. 평범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방을 따로 분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각방을 쓰지 않고 모두 모여 함께 자는데 그가 있으면 모두 새근새근 잘 자다가도 그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나 울어댄다.

“하아, 모르겠네.”

그녀가 보기에 저 봉사자청년은 이해불가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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