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비장의한수-2
#1
알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보기만 해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생김새는 엘어스의 고위 몬스터인 만티코어를 닮았다.
다른 점은 붉디붉은 털 위로는 암갈색의 줄무늬가 그려져 있고 그 등에는 보기만 해도 힘차 보이는 날개가 자리해 있다. 문제는 그 무지막지한 덩치다.
‘크군.’
그 자신과 거의 비등한 아니 좀 더 크다. 싸움을 덩치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급의 차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의 크기다. 그 자신보다 두 곱절은 커보이는 거대한 입이 지금 자신을 물기 위해 돌격해 들어온다.
‘흥!’
그렇지만 알은 코웃음 쳤다. 그 자신을 엘과 같이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골드 드래곤인 엘이 다방면에 뛰어나다면 레드 드래곤인 자신은 전투에 특화된 존재였다.
‘죽어라.’
콰아아아아!
마침내 그의 입으로부터 오렌지빛 화염줄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레드 드래곤의 전매특허 파이어브레스다. 골드 드래곤의 브레스와 같은 화염계열이기는 하지만 그 위력은 천양지차다.
둘 사이는 이미 지척이었다. 자칫 궁기가 드래곤브레스에 정면으로 노출될 지경... 그렇지만 알이 전투에 특화되었다면 궁기는 전투의 여신이다.
‘흥.’
알과 같은 의미에서의 코웃음을 친 궁기는 이미 몸을 회전하는 중이다. 그 거대한 덩치가 구현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하고 예술적이다. 전투의 경험만을 따진다면 엘어스에서 절대자로만 살아온 알보다 훨씬 많은 것이 바로 궁기였다. 게다가 그녀가 브레스의 화염 줄기를 어렵지 않게 피해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알이 저지르고 있는 아주 초보적인 실수 때문이었다.
“멍청하군.”
브레스를 내뿜을 곳으로 눈이 먼저 돌아가고 있다. 방향을 아는데 피하지 못하는 게 더 병신이다. 그리고 지금 궁기는 모처럼 정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무대에 섰다. 전투에 목마른 그녀에게는 고통조차고 쾌락과 마찬가지다.
“내 첫 대뷔무대란 말이다!”
퍼어어엉!!!
궁기는 뿜어지고 있는 브레스를 터프하게 돌파해 들어갔다.
브레스의 열기에 궁기의 털에 불꽃이 옮겨 붙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궁기의 투지를 부채질하는 꼴이다.
“이따위 것!”
궁기의 포효와 함께...
퍼어어엉!
브레스를 찢어발기며 궁기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알이 놀랐다. 아니 궁기를 소환한 제황조차도 놀랐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궁기가 알의 면전까지 들이닥쳤다. 그리고...
턱... 우직...
알의 기다란 목을 궁기가 덥썩 물어버렸다.
S급 신화인 모든 것을 물어뜯는 이빨은 드래곤스케일마저도 단숨에 박살 내며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캬아아아아!!”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알이지만 궁기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다.
알의 목을 문 채 궁기의 몸이 공중에서 반 바퀴 회전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함께 꺾여 가는 알의 목이다. 궁기는 몸을 뒤집어 그대로 알의 등 뒤로 넘어갔다. 그러고는 거대한 두 앞발로 알의 목을 끌어안으며 두 발톱을 박아넣었다.
투드드득... 파사삭
마치 잉어의 비늘을 벗겨내듯이 붉은색의 드래곤스케일이 뜯겨 나오고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S)급 신화인 모든 것을 베는 힘이 담긴 발톱의 힘이다. 어느틈에 궁기의 뒷발이 알의 날개를 묶어버렸다.
남은 것은...
“크아아아악!”
떨어져 내리는 것뿐이다.
#2
“허어...”
궁기가 사라져 공중에서 자유낙하하던 제황은 그 꼴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가 알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지만 자신은 엘을 붙잡기 위해 온갖 기만술과 목숨을 건 승부를 겨뤘는데 궁기는 말 그대로 날로 잡숴버리고 있다.
기습의 묘를 두 배 이상 살려내는 궁기의 모습에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저렇게 일을 잘하니 자신은 조금 다른 것에 신경 써도 될 것 같다.
콰아아아앙!!!
속절없이 떨어져 내린 둘은 그대로 메마른 황무지 사막의 대지 위에 처박혔다. 물론 데미지를 입은 것은 알 뿐이다. 알의 등에 올라탄 채 그 자신의 날개로 살짝살짝 조절하자 궁기에게 날개를 봉쇄당한 알은 그대로 궁기의 쿠션이 되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륵!”
“캬아아악!”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전 엘이 처박힌 곳 옆으로 떨어진 알의 목을 문 궁기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후우우웅...
치악력과 목의 힘만으로 수백톤에 달하는 알을 구덩이에서 들어 올려 그대로 반대편으로 내리꽂는다. 힘이 넘쳐나는지 다시금 반대편으로 돌리며 땅에 처박기를 수차례...
그러나 궁기는 물고 있는 목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알이 아닌 그 자신이 공중으로 회전하며 반대로 돌았다. 그러자 목이 물린 상태에서 그대로 회전하듯 비틀자 알은 목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우드드득... 드득...
마침내 알의 목에서 거대한 살 한 움큼이 뜯겨 나와 버렸다.
그러자 궁기는 입안에 들어온 그것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며 다시금 살이 뜯겨 피가 철철 흐르는 곳을 향해 입을 벌려 갔다. 아예 숨통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알 또한 지금이 아니면 자신이 살아날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전력을 다해 저항을 시작했다.
“막아라!”
알의 용언이 터지자 궁기와 알 사이에 붉은 막이 생성되었다.
텅! 텅텅!
그 자신의 피와 살점이 줄줄 흐르는 거대한 입과 살벌한 이빨이 연신 위아래로 움직이며 섬뜩한 소리를 내자 알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 회복의 용언을 걸었다.
파팍! 파파팍!
궁기의 발톱과 이빨이 방어막과 부딪힐 때마다 스파크가 일어났다.
용언으로 만들어낸 방어막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한 알의 머리 위 뿔에서 붉은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 중 가장 빠르고 가장 파괴력 있는 한 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윽고 방어막이 깨져나가는 순간 알은 마법을 발동했다.
‘지옥의 불꽃’
푸화아아악!
선홍색 불꽃이 달려드는 궁기를 향해 마주쳐 간다.
브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불꽃의 색으로 볼 때 족히 수천 도는 되어 보이는 마법이다. 그러나..
“크허어어엉!”
궁기의 입에서 터져 나간 포효에 마주 날아오던 화염의 불꽃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꽉! 콰카가각!
“크악!”
놀랄 새도 없이 알은 또 물려버렸다. 이번에도 머리다. 이제는 물린 곳이 머리라서 뜯겨 나가면 그대로 끝이다.
“크르륵! 크륵! 으르르르!”
투툭! 투투툭! 툭툭!
궁기가 도리질을 칠 때마다 알은 질질 끌려갔다.
획 끌어당겨 내동댕이친 뒤 머리 부분만 집중적으로 땅에 내려치며 두들겨 댔다.
나타났을 때의 거만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남은 것은 온몸이 찢겨버린 넝마 덩이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궁기의 호안이 번쩍거린다. 그리고 알의 전신을 훑더니 이내 알의 가슴 부분에서 멈췄다. 드래곤이 지닌 신위가 뭉쳐 있는 곳이라는 것을 대번에 파악한 궁기가 물고 있던 머리를 놓고 알의 가슴 부분을 한가득 물어뜯었다.
뿌드드득! 파파팍!
그녀가 도리질을 한 번 칠 때마다 붉은 파편이 터져 나간다. 폭포수 같은 피가 뿜어졌지만, 궁기의 주둥이는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아, 안돼!”
이 괴물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챈 알이 뒤늦게 머리를 돌려 궁기의 등을 물었지만 궁기는 그다지 상관없다는 듯 작업에 열중했다. 오히려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코끝으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온다.
이계의 신들이 가진 신위다. 제황이 주는 마나석으로는 기존에 잃었던 것을 보충하는 것만 가능했다면 드래곤들에게서 취할 수 있는 이것은 말 그대로 그녀가 가진 신위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좋은 먹이다.
두득..드득..퍽...
단단하디단단한 드래곤본조차 궁기의 이빨 앞에서는 버티지 못한 채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궁기는 알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던 근육마저 뜯어 버렸다.
이윽고 거대한 드래곤의 심장이 드러났다. 그 덩치가 큰 만큼 그 심장 또한 크다.
펄떡거리는 심장의 빨간 속살이 그녀를 유혹한다.
궁기는는 그대로 드래곤하트를 콱 물어버렸다.
‘신화 요괴를 삼키는 위장’
“크아아아아악!”
알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잡아먹히고 있다. 흡수당하고 있다.
상대는 단순히 드래곤하트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냥 물어뜯어 삼켜 버렸을 것이다. 드래곤 하트에 박아넣은 이빨을 통해 그가 축적하고 있던 신위가 상대의 입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니 그의 신위뿐만이 아니라 마나와 힘마저도 상대에게 흡수당한다.
쿠우웅...
저항할 마나조차 흡수당한 알의 목이 대지에 힘없이 누워버렸고 궁기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려는지 두 앞발을 알의 배 위에 올린 채 주둥이질을 시작했다.
드득..우드드득...
살을 뜯어 먹고 피를 삼킨다. 제황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먹는 것에 환장을 하더니 맛갈스러운 갈비를 부욱 뜯어낸 그녀의 입으로 거대한 ‘한입만’ 이 개 눈 감추듯 사라졌다. 가만 놔두면 정말 모조리 씹어 삼킬 기세다.
그때였다. 열심히 드래곤 고기를 즐기고 있는 궁기의 맞은편으로 제황이 다가왔다.
머리채를 잡힌 엘이 땅바닥에 질질 끌려오고 있다.
“맛있냐?”
-말 시키지 마. 바빠.
입은 열심히 씹고 뜯고 삼키고 있기에 정신으로만 대답하는 궁기다.
“적당히 먹고 빠져. 아직 죽이면 안돼.”
제황의 말에 궁기가 머리를 쳐들었다. 드래곤의 피로 범벅이 된 입가를 혀로 핥으며 궁기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내 먹이야.”
감히 자신이 사냥한 사냥감을 탐내냐는 듯 궁기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넌 내 꺼야.”
“크르르르...”
마치 네가 내꺼니까 네가 사냥한 것도 내 것이라는 제황의 천연덕스러운 논리다. 잠시 갈등하는 듯 보이던 궁기가 이내 쳇 하더니 알의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드래곤의 목을 앞발로 콱 잡았다.
“야. 일어나.”
호랑이의 발치고는 꽤 능숙하게 드래곤의 멱살을 붙잡은 궁기다.
정신을 놓은 듯 대답이 없자 목을 붙잡고 탈탈탈 흔들며 말했다.
“또 까불래?”
덜컥...덜컥...
알의 머리가 힘없이 좌우로 움직인다. 그것이 궁기가 머리를 흔들어서 생기는 움직임인지 아니면 알이 진정으로 고개를 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 비슷한 것을 들은 궁기가 알의 머리를 바닥에 툭 던지고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허어어어어엉!”
우르르르...
진정한 전투의 여왕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3
궁기가 거대한 앞발에서 보검과 같은 발톱을 하나하나 꺼낸 후 하나하나 핥으며 피를 닦아내고 있을 때 제황은 손에 들고 온 엘의 머리를 들어 올린 뒤 그녀의 볼을 찰싹하고 두들겼다.
“깼다는 것 안다.”
제황의 말에 엘의 눈이 살며시 뜨여진다.
잠시 반항적인 눈빛을 보였지만 제황이 지그시 노려보자 이내 황급히 눈을 깔았다. 제황도 두렵지만 지금 그의 뒤쪽에 앉아 앞발에 묻은 피를 핥고 있는 저 괴물이 더 두렵다.
“마음 같아서는 너희 둘을 죽이고 싶지만 기회를 주마.”
“뭐지?”
“내 부하가 되라.”
제황이 말했다. 그러나 엘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감히 네가 우리를 부하로 삼겠다는 거냐?”
“안될 것이 있나?”
“차라리 죽겠다!”
그것은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수천 년간을 살아온 절대자인 자신과 알을 부하로 삼겠다는 제황의 말에 엘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렇지만 상대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피식 웃은 제황이 궁기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냥 그거 먹어.”
“응!”
제황의 외침에 상큼하게 대답한 궁기가 대번에 알의 목을 꽉 하고 물어버렸다.
“크아아... 케엑..켁... 캬아아...”
복부가 처참하게 파헤쳐진 알이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 없다. 궁기는 행여 제황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듯 이빨에 힘을 줬다.
뿌드득.. 드득.. 와드득...
드래곤스케일과 뼈가 통째로 바스라지고 끊어지며 다시금 피가 터진다.
“그...그만!”
엘이 절규했지만, 제황의 말을 제외하고는 귓등으로도 듯지 않는 궁기는 그녀의 외침에 오히려 이빨에 더욱 힘을 줬다. 알은 이미 숨통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다. 아무리 신격을 지닌 몸이라도 이 정도로 타격을 받으면 그 답은 죽음 뿐이다.
“하겠다!”
“뭘!”
“부, 부하가 되겠다!”
엘의 대답에 씨익 웃는 제황이다.
이로서 다크어스 정벌대에 데려갈 놈들이 둘 늘었다.
“궁기! 그만...”
제황이 외치자 눈가를 실룩거리던 궁기가 물고 있던 알의 목을 퉤 뱉으며 중얼거렸다.
“쳇, 입맛만 버렸네.”
“무적성에 가게 차려줄게.”
“정말?”
“그래. 주방보조까지 미슐랭 쉐프들로 채워주면 되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