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제황의반격-1
#1
-네가 막지만 않았으면 저년을 찢어발겼을 거야.
-참아. 아직 전초전이야.
제황은 제멋대로 꺾인 오른팔을 왼손으로 꾹 붙잡았다.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는 했지만, 수확을 생각하면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우드드득...드득...
섬뜩한 뼈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팔이 본래 형태로 돌아간다.
제황의 왼손에 붉은 마나가 서리자 잠시 후 오른팔에 기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급속재생과 비슷한 능력이다.
물론 비슷할 뿐이지 전혀 다르다. 아직 기운의 사용에 익숙지 않아 자체 치유로만 사용할 수 있지만, 회복력은 종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잘린 부분도 가져다 붙이면 다시 치유할 수 있을 지경이다.
-좋아.
-좋기는 뭐가 좋아! 너 죽을 뻔했다니까.
-안 죽어.
궁기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미리 나서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기는 했지만, 궁기의 성격에 참아준 게 용하다.
-괜찮아?
-통각을 차단해서 별로 안 아파.
사실 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끔찍하게 아팠다. 드래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했고 또 강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드래곤을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
드래곤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
은신한 뒤 접근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확실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문제다. 드래곤도 말했지만, 제황의 은신 능력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그 몬스터 무리를 뚫고 드래곤에게 은신 공격을 가하는 것은 매우 난이도 있는 짓이었다.
들킨다고 보장할 수 없지만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기에 제황은 그 방법을 깔끔히 패스했다. 일부러 만들어낸 드래곤과 독대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가 남았으니까.
-이제 다 들켰겠지?
-당연하지. 완전히 속았다는 걸 알았을 거야.
제황이 정보의 유출을 막지 않은 이유였다. 자신에 대해 오판하도록...
업데이트 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장난질을 당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싸움이다.
-속 좀 쓰리겠군.
-그래. 저 간교한 년...
-아, 궁기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뭐?
-저 드래곤이 나와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방법이 있나?
-맹약을 말하는 거야?
-그래.
-당연하지. 신들이 그렇게 약속 잘지키는 모범생들이 아니야. 아니 오히려 사기꾼들이지.
-사기꾼?
-그래. 약속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우회로와 허점을 만들어 놓는데... 아까 그년도 그렇고...
-신과 신 사이에서도 그럴 수가 있나?
제황이 인상을 찌푸렸다. 엘이 자신에게 보인 호의는 진실이라고 판단했었는데 궁기의 말대로라면 자신을 속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 약속이었으니까 그렇지. 신들의 언어는 그런 것들을 원칙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에 허점이 없어. 아니 오히려 그런 허점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 진게 신들의 언어니까.
-그거 나도 배워야 하나?
-흠. 사실 언어라고 말하지만, 언어라기 보다는 그냥 대용량 정보를 빠르게 주고 받기 위한 의지의 집합체야. 인간식으로 따지면 수만 장의 계약서를 한번에 보내고 한번에 보기 위해 필요한 거랄까?
-큭, 그거 보험사에서 하는 짓들과 비슷하군.
깨알 같은 약관으로 장난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건 그렇고 거의 끝나가시는군.
무련천궁단을 깨우고 찰나지만 엘의 이목이 흐트러졌을 때 궁기의 도움으로 몸을 피한 제황이었다. 무련천가의 주인이라는 신화와 무련천궁단 소환의 시너지가 일으킨 한 수... 선조님들과 이야기라도 한 번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목숨을 걸고 붙... 음?
그때였다.
제황은 깜짝 놀랐고 그 덕분에 은신마저도 흔들려 버렸다.
앞으로 있을 드래곤과의 전투를 생각하면 절대 발생해서는 안 될 불상사...
그렇지만 제황은 그런 사소한(?)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그래?
-이거야 원, 무련천궁단 소환이 대박이었나보네.
제황은 상태창을 열고 신위 항목을 바라봤다.
‘신명: 천제황 신위: 100,000k/62,000k.... 63,000k.... 64,000k
신명이라는 수치가 백만 단위로 뛰어오르는 중이다.
그리고...
-304%...307%
온몸의 힘이 넘쳐흐른다.
지이잉...
손에 들고 있던 비천궁 위로 붉은 마나가 일렁거리고 이내 끊어진 시위가 복구되었다. 반대편 손에 비천격을 꺼내든 제황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계획을 조금 변경해야 할 것 같다. 이정도의 힘이라면...
“좀 더 요란하게 놀아도 되겠군.”
#2
쿠오오오...
거대한 황금빛 비늘이 꿈틀거린다.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키자 원근감의 무시마저 일어날 정도다.
네 개의 거대한 뿔이 돋아난 거대한 머리가 공중을 향해 포효했다.
“크허어어어엉!!!”
황금빛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햇빛에 부딪힌 영롱한 빛이 사위를 눈부시게 만든다.
골드 드래곤을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도 황금빛 서기에 밀려 공중으로 찢기며 흩어졌다.
“크르르...”
거대한 파충류의 눈이 주위를 훑는다.
“감히 내 아량에 이런 식으로 답하다니”
완전히 속았다.
쿵! 쿵!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땅이 진동한다. 그녀의 분노를 감지한 몬스터들이 두려움에 질려 땅에 엎드린다.
까마득한 태고로부터 이어 내려온 DNA에 심어진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이 발동한 것이다.
“아니지.”
엘의 발구름이 뚝 멈췄다.
분풀이는 이것으로 끝, 분노하기보다는 적의 공격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파충류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난 화가 난 게 아니야. 난 지금 매우 진지해졌을 뿐이지. 네가 내 마음을 산산이 부쉈어도 난 절대 화나지 않았어. 내 순수한 팬심을 모독한 것 같지만 내 뜻이 제대로 전달 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 생각해. 맞아. 어떻게 인간의 언어 따위로 나를 표현할 수 있겠어? 어림없지. 우린 좀 더 대화가 필요할 뿐이야. 그렇지?”
콰콰콰쾅!
“그렇지만 대화하기 이전에 대화의 자리를 제대로 마련해 봐야겠지. 조금 아플 수 있지만, 넌 내가 이 모습을 꺼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휘이이... 파아앙...
두어 번 날갯짓했을까. 이미 엘의 몸은 까마득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수만의 몬스터들이 그녀를 바라본 채 양복하고 있다.
[가거라! 분노하라! 파괴하라! 인간을 말살시켜라!]
“구오오오옹!”
“크라라락!”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채우고 있던 모든 몬스터의 눈이 붉게 변했다.
주인의 명을 받든 그것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것들은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인간들에게 엘의 대한 공포를 심어줄 것이다. 그 공포를 통해 그녀는 지구에서 인간들에게 신성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제황을 굴복시키면서 인간들에게 경외와 숭배의 플러스 에너지를 뽑아낼 생각이었지만 공포와 슬픔이라는 마이너스 에너지라도 상관없다.
그가 지키려던 것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박살낼 것이다.
그때 드래곤의 거대한 눈동자가 대지 한곳을 향해 움직였다.
몬스터들을 움직이자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하리라. 아니 어쩌면 그 미세한 변화까지도 캐치해 내는 그녀의 가공스러운 능력이 더욱 두려운 것은 아닐까.
드래곤의 눈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역시 인간이란..."
츠츳...츠츠츳...
네 개의 뿔 사이로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하나의 황금빛 구체로 형상화 된다.
“그곳에서 나오게 해주지.”
파파팍! 파팍!
이 세계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지만 상관없다.
이번 한방에 이 도시를 비롯해 이 땅 자체를 들어 엎어버릴 생각이니까.
“숨죽이는 자여. 조용한 죽음의 집행자여.”
드래곤의 두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용언이 아닌 마법이었다. 용언으로 그녀가 원하는 정도의 파괴력을 내려면 신력의 소모가 너무 크기에 그녀는 그 절충안으로 이 마법을 선택했다.
‘카오스 드라이브’
그녀가 사용하려던 마법의 이름이다.
속성과 마나와 신력 모두를 사용해 사용하는 이 마법은 그다지 임펙트 있는 이름은 아니지만, 그녀의 짝인 ’알‘ 이 사용하는 화염계 마법을 제외하고는 가장 범위 공격에 탁월한 공격 수단이다. 파괴력 또한 으뜸이기에 준비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녀의 네 개의 뿔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음?”
마법의 준비가 거의 끝나갈 즈음 엘의 눈이 커졌다.
지상으로부터 오러로 이루어진 화살 한 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문제는...
대체 맞추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를 향해 느릿하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후우, 조금 실망할 것 같은데...”
이전의 그 강력한 공격을 사용하기 위해 모든 힘을 소모한 것이라 그녀는 단정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엘은 그것을 향해 가볍게 요격용 마법을 하나 날렸다.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취소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아까 자신의 방어막을 뚫으려 했던 그 ’신벌의 어쩌고‘ 들이 더 강력하리라.
“혼돈이여. 내 적을 향해 함께 분노하라. 너의 이름은...”
이제 마지막 시동어만 말하면 마법이 발현되려는 순간이다.
느릿하게 날아오르던 그것이 엘의 요격용 마나체와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퍼어엉...
그리 크지 않은 파공음...
그러나 결과는 엘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푸슝...
수백개로 찢어진 그것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엘을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 한껏 움츠린 독사가 독니를 드러낸 채 목표물을 향해 뻗어 나간다.
위험을 알리는 감각에 섬뜩한 경고가 느껴졌다.
엘은 잠시 망설였다. 거의 완성을 앞둔 마법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렇지만 감각이 외치는 경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했다. 마법을 완성하기로...
그 자신의 단단한 비늘을 믿으며...
그러나 그녀는 이때 전력을 다해 이곳을 빠져나갔어야 했다.
분노에 흔들린 이성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은...
큰 후회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파파파파파파파팡!!!
“카오스 드라이...으아아아악!!”
온몸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고통에 엘은 마법의 완성조차 잊은 채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날카로운 뭔가가 온몸을 헤집어댄다. 특히 그 고통은 날개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자신의 날개를 바라본 엘의 눈이 커졌다.
날개를 이루는 피막이 갈기갈기 찢겨져있다.
“캬아악!”
엘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급강하를 시작했다.
날개를 보호함과 동시에 대응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아무리 그녀의 비행이 마법적인 능력으로 구현되는 것이라 하지만 그 베이스는 역시 날개!
그러나 제황의 공격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콰쾅!!!
지상으로부터 다시금 화살이 날아올랐다. 문제는 날아오른 화살의 숫자다.
수십 수백개의 오러에로우가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그녀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감히!”
엘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신속히 대응을 시작했다.
방어막을 펼친 채 날개에 회복술을 걸고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 비행을 도우며 공격이 날아온 곳을 향해 마법을 준비한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성능의 두뇌를 지녔기에 가능한....
이지만 제황에게는 단지 발버둥치는 사냥감일 뿐이다.
팡! 파파팡! 파파파파파팡! 츠츳...
“캬아아악!”
그녀가 펼친 방어막은 단한점을 집중적으로 때려대는 수십 발의 붉은 화살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리고 방어막이 깨진 작은 틈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찾아들어온 붉은 화살들이 그녀의 온몸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