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대적하는 자-1
#1
4일은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피닉스 공격대와 버서크 공격대가 도착했다.
제황이 있는 이곳 제1 네바다 방어기지가 전투의 가장 중요한 위치이기에 가장 강한 두 공격대를 배치한 것이다.
위에서는 그만큼 이곳을 가장 치열한 격전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엠페러스는 이번 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았다. 드래곤이 지구로 건너온 시발점이 미국이었기에 그녀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엠페러스의 참전을 불허한 것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버서크공격대도 거의 우기다시피 하여 합류했다.
이번 레이드에 참가하는 헌터들은 4성 이하가 2만명, 5성 이하가 3천명 그리고 6성에서 7성이 300명가량 참가하였다. 제1네바다기지에 배치된 이들은 총 4000명... 역대 몬스터 레이드 중 가장 많은 숫자였는데 미국은 이번 레이드 방어에 사활을 건 상태다.
만약 드래곤이 말한 대로 몬스터들이 진행된다면 미국의 자존심은 둘째치고 수백만의 사망자와 피난민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미국뿐만이 아니라 지구 자체의 몬스터 방어 전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만큼 미국이 담당하는 몫이 컸으니까.
속속들이 도착하는 헌터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자발적 참여가 아닌 강제징집령으로 동원된 헌터들이다.
웬만해서는 강제징집령을 발동하지 않는 미국이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그들도 강수를 꺼내 들었다.
초거대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단 하루만에 초토화시키고 티브이 생방송을 통해 대량의 식물인간을 발생시킨 드래곤은 이미 신적인 존재로 취급 받고 있었다.
신과의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불안에 찬 눈으로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는 헌터들이었다.
#2
“이...럴 수가...”
제황을 만난 엠페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꾸준한 레이드를 통해 실력을 한층 끌어올린 그였지만 제황은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이제는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위치이다.
그도 8성 끄트머리에 닿은 강자다.
이전에는 ‘저 정도라면 언젠가는’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제황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훌쩍 뛰어올랐으니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엠페러는 의외로 권제와 잘 어울렸다. 셋 모두 근접전과 거친 전투를 기반으로 하는 탱커 계열이었기에 통하는 바가 있었다. 서로 몸으로 좀 투덕거리더니 허허허 웃으며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다가 셋이 기지를 뭉쳐 다니는 중이다.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은 이들도 피해갔다.
이루미는 더위 때문인지 이전에 입던 것보다 좀 더 노출이 있는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그 부작용으로 토르가 침을 질질 흘리며 이루미를 조르르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전에는 안그러더니 이루미에게 노골적으로 관심 있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루미는 역시 철벽 중의 철벽이었다. 단순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왜 따라오십니까.”
“같이 차 한잔하죠.”
“바쁩니다.”
“좀 도와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후우웅!
파카가가가각!
“우와악!”
이루미의 창천룡검이 토르의 목 언저리에서 번들거린다.
토르의 이마에서 한줄기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루미의 눈에 어른거리는 분노를 감지한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 경고는 단 한 번입니다.”
“꿀꺽”
이것을 단순히 경고라고 할 수 있을까? 토르의 뒤편에 있던 험비가 사선으로 갈라져 있다. 너무나 깔끔히 잘려버렸기에 무너지지 않은 채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를 닮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청색 강기가 검에 일렁거린다.
“아니, 난 그저 친하게 지내자고...”
“관.심.없.습.니.다.”
우지직...쿠쿠쿵...
험비가 드디어 주저앉아 버렸다.
뒤를 돌아본 토르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자신은 눈치조차 못 챈 사이에 대몬스터 장갑으로 두른 험비가 주저앉은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예. 예.”
목례를 하며 몸을 돌린 이루미가 사라지자 토르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루미가 바라던 말은 아니었다.
“내 스타일이야.”
그리고 아까부터 건물 뒤에 숨어 이쪽을 바라보던 버서커 공격대의 공대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기를 걸었던 이와 돈을 주고받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안될 줄 알았어. 미친새끼”
#3
3일째 되는 날 밤에는 제황의 앞으로 하나의 상자가 배달되었다.
발신인은 무적성이다. 마치 관처럼 생긴 그것의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푸슉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드래곤 레이드가 결정된 후 무적성의 모든 장인이 밤낮을 들여 제작한 장비입니다.”
갑옷과 함께 온 요원이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주문한 것이다.
은은한 적색의 광택을 내뿜는 전신 스케일 갑옷 세트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스케일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이어 붙였는데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눈부분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뒤덮는 형태다.
“오오가무시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강력한 목 부위의 가죽을 압축가공해 만들었습니다. 이정철 명인의 말씀으로는 드래곤의 브레스도 두 번 이상은 버틸 거라고 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10티어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해 슈페리어 등급을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말에 제황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예상했었다. 숙련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슈페리어급을 뛰어넘는 단계를 바라는 행운 따위는 바라지 않았다.
[용살자 세트] -슈페리얼 등급
재질:오오가무시의 가죽(압축스킬적용)
용살자의 흉갑
용살자의 투구
용살자의 짧은망토
용살자의 견갑
용살자의 궁사장갑
용살자의 완갑
용살자의 바지
용살자의 신발
[세트 아이템 ‘용살자세트’가 완성되었습니다.] -아이템 슈페리얼 세트 (8/8)
[세트효과]
[화염속성방어력 50프로 상승]
[방어력 무시 공격을 50프로 확률로 방어한다.]
[자체수복]
아마 아이템으로 나온 장비들중에서는 가장 비싼 물건일 것이다.
아이템 옵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재질이다. 무려 10티어몬스터의 가장 강한 부분을 압축하여 만들었다.
드래곤의 가진 엄청난 피지컬과 가장 위협적인 무기인 브레스를 염두에 둔 듯 붙은 속성은 화염속성과 방어력 그리고 자체수복기능을 지녔다.
‘드래곤이 이 갑옷의 이름을 보면 좀 기분 나빠 하겠군.’
제황은 속으로 생각하며 요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먼저 나가보세요.”
“옛!”
제황의 말에 요원이 경례를 붙인 뒤 밖으로 나갔다.
굳이 그를 내보낼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 부르려는 이가 꽤 기분이 상한 상태이기에 엄한 곳에 불똥이 튀길 수 있었다.
“궁기”
제황이 그녀를 부르자 제황의 곁으로 궁기가 스르륵하고 나타났다.
아직 기분이 다 안 풀렸는지 볼이 부루퉁하다.
“왜?”
“부탁해.”
“흐흥흥흥흥흥흐흐흐흥!”
요란한 콧방귀를 뀌며 다시 붉은 안개로 변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제황의 손이 궁기의 어깨를 붙잡은 뒤 그대로 잡아당긴 것이다.
“뭐하려는...”
“내 솔직한 표현...”
“에엣! 읍...”
순간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졌다. 제황의 등을 툭툭 치던 궁기의 손이 이내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츄릅...”
조금 거칠지만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약 삼 분간 이어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진한 키스가 끝났다.
“하아...”
입술을 뗀 제황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다. 조금 전 프렌치 키스를 감행했던 박력은 어디 갔는지 눈가가 가늘게 떨린다. 그러다가 궁기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 사이를 잇고 있는 타액의 끈을 발견하고는 다시금 볼이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오이, 우리 제황이 키스도 잘하네.”
“시...시끄러.”
“어? 너 말 더듬었어?”
세상 살면서 제황에게 보기 힘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그가 놀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놀라서 말을 더듬는 것이다. 놀라는 건 몇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그로 인해 말을 더듬는 건 정찰 처음이다.
“호호호, 이리 와봐.”
“왜?”
“후식 먹어야지. 겸사겸사 진도 좀 빼보자. 우리···.”
“으윽!”
그림자가 다시 하나로 겹쳤다.
#4
포만감에 나른하게 풀어진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궁기가 입맛을 다신다.
그녀의 곁에 선 제황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있다. 궁기가 집요하게 키스 마크를 새기려 했지만 붉은 자국이 생기자마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포기한 줄 알았던 그녀는 다시금 이빨로 마구 물어대서 목과 쇄골 부근에 치아 자국이 무성하다. 특히 승모근 부분은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는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미세한 흉터가 생길 것 같다.
“꼭 이렇게 해야 해?”
“응. 내 것이라는 찜이야.”
“끙···. 영역표시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목단추를 잠갔다.
이걸 동철이나 권제에게 들키는 날에는 몇 날 며칠은 놀림에 시달릴 것이다.
“이제 해줘.”
“알았어~♬”
궁기는 콧소리를 내며 스케일 갑옷 위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그녀의 손이 붉게 빛나더니 이내 그 빛은 갑옷 위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붉은빛은 수백 수천 개의 깨알 같은 글씨로 변해 갑옷을 수놓기 시작했고 이윽고 내부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후우, 힘들다.”
갑옷에서 손을 뗀 궁기는 과하게 힘든 척을 하며 슬그머니 손에 9티어마나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하나 먹는다?”
“응.”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아서 이제는 별 필요 없다면서 그녀는 핑계가 생길 때마다 습관처럼 9티어 마나석을 꿀꺽했다.
“쩝.”
이제는 궁기의 뱃속으로 들어간 9티어 마나석이 몇 개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제황은 갑옷의 옵션을 확인했다.
[궁기의 가호를 받은-용살자 세트] - 아티펙트슈페리얼 등급
재질:오오가무시의 가죽(압축스킬적용)
용살자의 흉갑
용살자의 투구
용살자의 짧은망토
용살자의 견갑
용살자의 궁사장갑
용살자의 완갑
용살자의 바지
용살자의 신발
[아티펙트 세트 아이템 ‘용살자세트’가 완성되었습니다.] -아티펙트
슈페리얼 세트 (8/8)
[세트효과]
[궁기의 가호로 공격력 20% 상승]
[궁기의 가호로 마나회복 20% 상승]
[궁기의 가호로 마나량 20% 상승]
[속성방어력 70프로 상승]
[방어력 무시 공격을 50프로 확률로 방어한다.]
[자체수복]
“화신체 스킬이랑 붙은 능력치가 비슷하네?”
“내 신화에 영향을 받으니까.”
“그렇군.”
“어때?”
“아주 좋아.”
아닌 게 아니라 지금껏 본 아티펙트 들 중 최강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비견할만한 것은 비천궁이나 비천격 아니면 창궁룡검 정도일까.
게다가 화염에만 한정되었던 속성방어력이 전 속성으로 확장되었다.
아티펙트라는 것은 오랜 시간을 영웅들의 손을 거쳐 일정 수준 이상의 영성을 얻은 것들을 통칭한다. 영성이 가능하다면 신성은? 당연히 가능하다. 단지 이런 아티펙트 만드는 일에 동참할 신격을 지닌 존재가 지금껏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말 해준 것은 제황의 선임자인 궁기.
무작정 신력을 주입해 봤자 일시적으로 기운을 머금을 뿐 곧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궁기에게 부탁을 했다. 뭐 부수입도 좀 있었지만...
“이로써 준비 완료군.”
#3
드래곤 엘이 약속한 4일째가 되었다.
용살자의 스케일갑옷을 착용하는 것은 궁기가 도와줬다.
투구를 쓰기 전 제황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해준 궁기가 웃으며 말했다.
“여신의 가호”
“쿡...”
같은 반신이기에 실제 가호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동반자이며 조력자이자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동료다. 그녀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제황은 언제나 그녀의 가호가 함께 했다.
“함께...”
“응...함께.”
둘의 입술이 다시 한번 겹쳤다.
잠시 후 제황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오셨다.”
“궁신...”
제황은 볼 수 있었다. 아직 여명이 밝지 않아 어슴푸레한 어둠 사이로 건물 입구에서부터 아트라스라 있는 곳까지 양쪽으로 죽 늘어선 이들을... 그들은 웅성거리며 제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결의에 찬 수백의 눈이다.
저벅저벅...
제황은 그 사이를 묵묵히 걸었다. 중간 정도 걸었을까.
누군가가 외쳤다.
“인류를 위하여!”
그 선창에 모두가 불끈 쥔 주먹을 하늘을 향해 쳐들며 외쳤다.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구하자!”
그들의 거친 함성은 이내 기지 전부를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고 기지 안에 있던 모든 이들도 소리 높여 따라 외쳤다.
“인류를 구하자!!!”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제황은 아트라스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우뚝...
그리고 아트라스의 거대한 문 앞에 섰을 때 제황 또한 말없이 주먹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우와아아아아!!!”
쿵쿵쿵쿵쿵쿵!!!
“인간을 위하여!”
그와 동시에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발구름과 함께 모두가 소리 놓여 외쳤다.
이것은 대융합 당시... 죽음을 각오한 채 전장으로 향하던 이들을 위한 의식이었다.
이제 그 강함을 측정할 수 없는 드래곤을 레이드 하기 위해 홀로 나서는 고독한 영웅을 위한 그들만의 의식이다.
권제는 저도 모르게 뜨거워지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형님의 손자를 바라봤다.
눈에 습막이 맺혀 그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형님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