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그녀의 사정-2
#1
-너 강하더구나. 내 세계에서도 너만큼 강한 존재는 얼마 없을 것이다.
방송을 통해 제황의 모습을 본 모양이다.
-이계의 절대자님의 눈만 더럽힌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호호, 아니다. 마치 오래전 엘어스에 존재했다던 인간들의 용사를 보는 것 같아 눈이 즐거웠다.
황금빛 마나의 공격이 멈추자 제황또한 자신의 마나를 거둬들였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탐색하는 시간이다. 제황이 말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공항에 나타났던 그 몬스터는 혹 엘님께서 보내신 겁니까?
제황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니다. 나도 티브이로 보고서 그게 뭔지 궁금했었다. 내 차원이 아니니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그렇군요.
-네가 하나 물었으니 나도 궁금한 게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이 지구 차원에는 너만큼 강한 인간이 더 있는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강함을 숨긴 이들은 어디든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저도 신격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호호호, 솔직하구나. 초월한 이로써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호감이라도 느꼈는지 조언까지 해주는 드래곤이다.
“그건 그렇고 너 정도의 강함이 더 있을 수 있다니 내가 지구를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놀라는 듯하지만, 목소리에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과연 백린이 말한 대로 추정치 12티어의 절대자라고 할만하다. 그렇지만 너무나 오만하다. 그리고 이제 얻을 건 거의 다 얻었다.
제황은 조금 착잡하다는 듯 말했다.
-엘님과 저는 싸울 수밖에 없는 숙명입니까?
-그래. 나와 비슷한 향기를 가진 너라면 알겠지.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의 중요함을 말이다. 게다가 인간이 엘에서 저지른 짓은 단순히 목숨 몇 개 따위가 아니다. 엘어스에 살아가는 존재들의 숙명에 악영향을 끼친 것도 모자라 비틀어 버렸다. 난 그만큼의 대가를 가져가야 한다.
-그렇군요.
엘의 말이 모두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신 또한 신만의 법칙에 얽매여 산다는 것이다. 그때 엘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싸우지 않는 방법 또한 존재한다.
-그게 뭡니까?
-네가 엘로 넘어와 신이 되는 거지. 지금 네게서 느껴지는 신격 정도라면 인간이 엘어스의 역사에 끼친 악영향 따위는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네가 원한다면 백린이 원했던 그것을 도와주마.
엘의 말에 제황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뭡니까?
-차원 안정화를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내가 도와주지.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녀의 탐나는 제안, 순간 제황은 갈등이 왔다.
-백린에게 듣기로 드래곤은 방관자의 입장이라고 했습니다. 아닙니까?
-맞다. 차원이 합쳐지든 다시금 안정화되든 우린 상관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더 좋다. 차원이 다시 하나가 되고 차원의 격이 상승하면 우린 차원의 격이 낮아지며 봉인되었던 고대의 마법을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필멸자들이야 세상의 멸망이니 하며 떠들지만, 우리야 잠시 스쳐 가는 찰나일 뿐이니.
-그 대가는...
-네가 엘어스에 남는 것이지. 어떠냐.
그녀의 말에 제황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제황이 생각하는 차원분리 방법은 다분히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위험이라는 건 바로 제황이 다크어스에 갇히는 것이다. 물론 궁기가 함께하겠지만 아무리 반신의 존재라도 다크어스에서 살아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 드래곤이 대신해 준단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좋다. 시간은 4일이다. 4일이 지나면 난 본래대로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다른 초월자를 만나 기분이 좋구나. 호호호. 그럼 그때 보자.
슈우우욱...
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임시기지 하늘을 뒤덮고 있던 황금빛 서광이 흩어졌다.
제황이 엘과 나눈 대화는 길었지만 실상 그 시간은 찰나와도 같다.
“어, 없어지네.”
당장이라도 임시기지를 뒤덮을 것 같던 황금빛 서기가 사라지자 동철이 싱겁다는 듯 말했다.
퍽
“멍청한 놈”
“아, 왜 때려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빌어먹을 나도 할 말은 없군. 후우...”
권제만이 어느 정도 눈치챘다. 지금 그의 한숨은 능력이 닿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실망이다.
“제가 대신 때려드릴까요?”
동철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은근히 말했다.
“너 요즘 많이 개긴다? 이제 애아빠니까 목숨관리는 해야지? 너 혼자의 목숨이 아니잖아?”
“아, 그렇구나.”
권제의 말에 손뼉을 짝 치는 동철이다. 그렇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개김성이 살아있다.
투닥거리며 만담을 나누는 둘을 바라보며 제황이 피식 웃었다. 권제와 동철의 궁합은 의외로 좋았다. 권제 또한 과거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철의 개김을 이제는 허허롭게 웃어 넘겨주고 있다. 어깨에서 짐 하나를 내려놓으니 쓸데없는 무게도 잡지 않는 그였다.
“저는 먼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어? 으음. 그래.”
동철과 투덕거리던 권제는 제황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제황의 표정을 보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의 능력에서 벗어난 문제다. 제황만이 고민할 수 있는 문제... 손자가 자신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을 이제야 실감하는 권제다.
#2
제황에게 배정된 방은 웬만한 5성 호텔은 뺨을 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제황에게는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후우”
문을 닫으면 낮은 한숨을 토해낸 제황은 절대권역으로 주변을 살핀 뒤 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잠시 후 힘을 개방했다.
츠츠츠츳...
제황의 몸을 중심으로 찬란한 붉은서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까 엘의 서기에 맞서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그것은 잠시 후 제황의 몸을 중심으로 둥근 막을 형성해냈다. 이 막은 엘이 훔쳐보는 것을 차단하고 기척을 감추는 기능이 있다. 제황이 말했다.
-일단 계획은 성공했지?
-그런 것 같네.
제황이 9티어 마나석을 갈아 넣으며 그런 쇼를 한 것은 꼭 신성을 늘리기 위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바로 드래곤을 자극하기 위한 것.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반응을 기반으로 드래곤의 전력을 가늠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드래곤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했기에 그런 식으로라도 자극하여 반응을 본 것이다.
-결론은?
-강해.
-그래. 까면 깔수록 강해지네. 그리고 오만해.
-그 정도의 너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거겠지.
궁기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서 제황이 보인 모습은 실제 제황의 전력의 30%가량이었다.
딱 9티어 몬스터 두 마리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온갖 화려한 쇼를 했지만, 알맹이는 전부 뺐다. 물론 그 정도는 예상했었다. 제황이 수확이라고 생각하는 정보는 다른 것이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가 드래곤과 힘싸움 할 때 내가 알아본 바로는 드래곤의 신위는 너와 나를 합친 것보다 더 컸어. 물론 상대는 차원을 건넜기에 힘의 연결이 끊겼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양만 따져도 상당해.
-그리고 그 말은 레이드는 역시 나 혼자밖에 할 수 없다는 거지.
-맞아.
다른 이들의 도움은 방해에 불과하다.
힘을 가늠하기에 앞서 드래곤을 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선행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제황과 같은 신위를 지닌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그 신위를 무효화시킬 만한 힘을 지닌 성물을 지니거나 말이다. 이 두 개 중 하나라도 채우지 못한다면 아예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계획대로 할 거야.
-역시나인가.
제황의 말에 궁기가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제황은 쓰게 웃었다. 지금부터는 모두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황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제황은 지금껏 그가 낼 수 있는 진짜 전력을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권제나 동철조차도 모르는 진짜 전력을 이번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역시 인간들은 마음에 안 들어. 넌 이렇게 노력하는데 저들은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잖아.
슈우욱...
툴툴거리며 나타난 궁기가 제황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제는 궁기보다도 좀 더 커버렸기에 제황의 목에 매달린 꼴이다.
“네가 있잖아. 난 그걸로 족해.”
제황의 손을 들어 궁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머, 감히 어디를 만져.”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손길이 그리 싫지 않은 듯 궁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아까 그 드래곤이 신이 되라고 할 때 갈등했지?”
“응.”
궁기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숨길 것은 없다.
제황이라고 싸움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왜 거절했어?”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냥 거부감이 들었달까?”
엘의 제안이 파격적이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느껴졌었다.
“거부감이라. 음. 아직 부족한가. 잘 생각해봐. 힌트를 하나 주자면 엘이라는 년은 아주 욕심쟁이라는 거야.”
궁기의 말에 제황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궁기는 지금 답을 말해주기보다는 제황이 홀로 알아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제황에게 궁기는 동반자이자 동료이며 또한 먼저 길을 걸어간 선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는 제황에게 반신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기보다는 이렇게 제황이 홀로 깨닫게 하는 식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아주 간단한 문제야.”
“간단한 문제...”
눈을 감은 제황은 궁기와 엘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제황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이며 그가 눈을 떴다.
“날 소유하려고 했군.”
제황의 대답에 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신력의 근간은 지구야. 그런데 엘어스로 건너간다? 몸은 반신이지만 신력 나아가 사상력의 근간이 사라져. 저쪽 세상은 저 드래곤년의 세상이니 좋으나 싫으나 넌 저 드래곤의 하위 신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하지.”
“하위 신...내 근간...내 신력...”
제황은 궁기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말에 알 수 없는 뭔가가 머릿속을 간지럽힌다. 마치 장님이 손에 잡힌 뭔가를 유추하는 기분이다.
“진도가 빠른 모범생이네. 상을 줘야지.”
깊은 생각의 잠긴 제황의 귀로 궁기가 나지막이 속삭인다.
“세이브는 신을 흉내 낸 거야. 키워드는 상태창”
궁기의 그 한마디가 촉매였다. 제황은 순간 머릿속을 떠돌던 모든 생각들이 하나하나 올올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답은 상태창에 있었다. 지구방어시스템 세이브가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기적. 상태창... 제황은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진명’
흩어졌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다시금 상태창을 재조립한다.
여의보주의 주인, 마궁의저격수, 무음의 추격자...
이전 상태창에 있는 진명이다. 여의보주의 주인을 끝으로 성장을 멈췄던 그것.
이것이 신을 흉내낸 세이브의 작품이라면···.
“진명은 신화를 흉내 낸 거였군.”
진명을 이루고 있던 지식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아니 부서지는 것이 아니다. 왜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냐는 듯 거칠게 요동치며 하나로 뭉쳐들기 시작했다.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는 듯 잊힌 기억을 끄집어낸 것처럼 그것들은 다시금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신화]
-궁기의 주인(S),활의 주인(S),심판하는 자(S)무련천가의주인(A)
“하아.”
상태창에 새로운 글씨가 생성되었다. 새로운 힘이 차오른다.
제황이 내쉬는 한숨 속에는 기쁨과 더불어 허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본디 자신의 것이었다. ‘신화’ 는 꾸준히 자신을 알아달라는 듯 소리치고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그 외침을 들을 귀가 없었다. 볼 눈도 없었다.
궁기가 말했다.
“부작용이지. 뭐. 여의보주의 조력으로 반신이 되었으니... 당연히 얻어야 할 정보를 놓친 거야.”
“정말 내가 반신이 된 게 신기하군. 아직도 이렇게 서투른데···.”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궁기가 없었다면 수년? 아니 수십 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영 그걸 알지 못하고 긴 세월을 반신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신화로 인정받을 만한 건 네 개인가? 적네.”
“이게 적어?”
궁기의 말에 제황이 반문했다. 저 신화 하나하나가 수치화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습게도 깨달음 하나로 이전보다 강해졌다. 신이 이렇게 가벼운 존재였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당연하지. 내 것 보여줄까?”
자랑스럽게 묻는 궁기다.
“어.”
“좋아. 보고 놀라지나 마라.”
득의양양한 궁기가 제황의 눈앞으로 손을 스윽 움직이자 잠시 후 제황의 눈앞으로 주르륵하고 텍스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화]
-서방을 지키는 자(SS) 진실을 가리는 힘(SS) 천하사흉(S) 궁신의 동반자(S)
-호랑이의 정령(S),모든 것을 베는 힘(S)모든 것을 물어뜯는 이빨(A)
-요괴를 잡아먹는 위장(A)
-혼돈의 요선(A)
...
...
자잘한 것까지 따지면 거의 스무 개가 넘는다.
제황보다 숫자로는 몇 배가 넘는다.
“후후후...어때? 화려하지?”
자랑하는 궁기에게 제황이 물었다.
“다 좋은데 천하사흉이랑 혼돈의 요선은 뭐야?”
눈치 없이 비수를 찌르는 제황
“아, 그런 건 좀 걸고 넘어가지 마!”
쫙!
신경질 적으로 자신의 신화를 닫아버린 궁기가 고개를 팩하고 돌린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것 같다. 입맛을 다신 제황이 궁기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언제나 고마워.”
“흥! 말로만?”
궁기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콧김을 흥흥 내뿜는다.
“말로만이 아니면?...”
제황이 궁기를 가슴 앞으로 돌려 안으며 궁기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음, 아...아니면??”
궁기는 볼에 붉게 노을이 진다. 수천 년을 살아온 세월도 무색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은근히 궁기에게서 피어난 핑크빛 서기가 둘을 감쌌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기운이다.
그리고 제황은 그녀의 빠알간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앞으로 너와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도록..최대한 강해질 거야. 열심히 할게.”
“...”
“...”
“그게 끝?”
“으음, 뭔가 더 필요한가?”
제황의 대답에 궁기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아서? 아니다. 실망에서 시작하여 체념으로 바뀐 그 눈에 분노가 타오른다.
“이 자식아! ... 크아아아앙!”
궁기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오고 그녀의 두 팔이 제황의 목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송곳니가 다닥다닥 돋아난 입으로 제황의 목을 꽉 물어버렸다.
“으아악!”
생각지 못한 궁기의 기습공격(?)에 당황한 제황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듀겨버리꺼야! 듀거! 듀거! 내 식량이 되자! 이 텰벽아!”
“아프다!”
“그름 아푸라고 하쥐! 느 기붕 좋으라고 으르겠느! 이 화당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