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49화 (249/301)

# 249

그녀의 사정-1

#1

공항으로부터 임시기지는 약 세 시간 거리에 있었다.

꽤나 울퉁불퉁한 오프로드 도로지만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길을 따라 피난길에 오른 이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니까.

-다친 곳은 없어?

-멀쩡해.

-아까 변신했던 그 몬스터는 뭐야?

-청룡(靑龍) 신성은 흩어졌지만 9티어 마나석 세 개를 갈아 넣으니까 한 번 써먹을 만하네.

-한 번이라는 건 다시 못쓴다는 거야?

-아니 다시 쓸 수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남은 신성들을 박박 긁어모아 소모적으로 사용했으니 아까처럼은 못 쓰겠지. 9티어 마나석을 갈아넣어도 잘 해야 8티어 몬스터 정도의 힘?

-9티어치고는 꽤 세던데?

크기만 따지면 예전에 레이드 했던 오오가무시 급이다.

만약 그 정도의 몬스터가 작정하고 땅으로 내려와 난동을 부렸다면 아마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횡액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임팩트 좀 주려고 한 번에 폭발시켰으니까.

-결론은 앞으로 쓸모없다는 거군.

-9티어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신성만 남은 녀석들은 꽤 돼. 한 마리 정도는 변신유지할 수 있고, 대신 가성비가 무지막지하게 나쁘다는 거?

-쉬운 일이 없네. 그래도 고생했어.

-호호, 아니야.

궁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황은 그의 상태창을 열었다.

맨 상단에 써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신명:천제황  신위: 20,000,000/11,242,349

그가 오늘 이런 쇼를 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지금도 꾸준히 그 숫자가 오르고 있다.

-조금 보기 귀찮군.

20,000k/11,256k... 11,278... 11, 310

상태창은 단지 직관적인 판단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101%... 102%... 104%

강해지는 건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점점 단단해지는 신성을 몸으로 느끼며 제황은 눈을 감고 음미했다.

세계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에 느껴지는 것도 새롭다. 프로그래머가 말끔하게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 이면의 코드들을 훑어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제황은 자신의 몸에 아직 남아있는 세이브 라는 시스템의 잔재와 새롭게 얻은 반신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익혀나갔다.

#2

“도착했습니다.”

남성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제황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한참을 시스템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마구잡이로 밀려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눈살을 찌푸렸다.

멀리 커다란 바위 언덕 위에 있는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이군.”

권제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건물들을 훑었다.

그러자 안내로 따라붙은 미군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합니다. 저 방벽은 무적성의 외벽구조를 참고해 건설되었으니까요. 이곳 몬스터들 가장 골치 아픈 게 윔 계열인데 그에 특화된 구조를 찾다 보니 무적성이 가장 적당했다고 하더군요.”

안내의 설명에 권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무적성의 성벽 또한 지하를 깊이 파 만든 구조였다.

외부에서 보면 높이 40여미터의 특수콘크리트 방벽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땅을 돋았는지 사람이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지가 예상되는 몬스터 진격로마다 하나씩 설치되었다는데 그 숫자는 총 9개라고 했다. 참고로 이 방벽은 마법진을 그릴 수 있다는 특이 스킬을 지닌 헌터가 마법처리를 마쳐서 7티어 몬스터의 돌격까지 무리 없이 막을 수준이라고 한다.

기지 옆으로 임시로 만든 듯한 너른 편지에 제황의 애마인 쿼드콥터 아트라스가 내려앉아 정비병들의 정비를 받고 있다. 워낙 거대해 기지 안에 있는 헬기 착륙장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아트라스다. 임시방편으로 기지 외부에 땅을 골라 착륙장을 만들었는데 그조차도 비좁아 보인다.

“실수로 저 착륙장 근처에 지원차량 배치했다가 두 대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안내를 맡은 군인이 아트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이루미가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까?”

“근처에 힐러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저희 잘못이죠. 무련천가에서 미리 주의를 보내줬는데 꼰대 같은 정비창 놈들이 FM 이라며 접근시켰다가...”

“그래도 다행이네요.”

아트라스는 무적성 내에도 둘 곳이 없어 외부에 따로 착륙장을 만들게 한 애물단지였다.

얼핏 보면 예전 티브이에서 보던 유에프오를 닮았다. 유성형의 몸체에 사방으로 뻗은 네 개의 로터, 그리고 그 로터를 방비하기 위해 덕지덕지 붙인 이중장갑등으로 인해 거의 120미터 가량의 전장을 지닌 아트라스는 단순한 비행탑승물이 아니었다.

아트라스에는 네 개의 각기 독립된 마나석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는데 사용되는 에너지원은 7티어 마나석으로 한 달에 두 개 정도를 소모한다. 제황에게야 껌값도 아니지만 수십억을 하는 마나석을 고작 비행체 하나 공중으로 날리는데, 소모한다는 비합리적인 상황과 고티어마나석의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상황으로 인해 개발을 완료하고서도 다시 분해당할 뻔한 비행체다.

간단하게 그 성능을 말하자면 사면으로 몬스터 전용탄만을 사용하는 30mm 개틀링포 4문이 장착되어 있다. 네 개의 포문이 동시에 2초씩만 긁어도 3티어 몬스터 무리 하나는 단숨에 박살을 내버린다. 본래가 몬스터웨이브 방어의 근접지상지원 용도로 제작된 쿼드콥터다.

내부에 저장할 수 있는 최대 탄수는 10만 발이다.

본래 폭격용 햇치가 있던 곳은 제황의 저격창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반대급부로 미사일 등을 적재할 공간이 남게 되어 고위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레일건 한 문을 장착했다. 제황만이 할 수 있는 돈지랄이다. 참고로 아트라스 가격보다 그 레일건의 가격이 10배는 더 비싸다. 비록 그 레일건 하나를 위해 그 대부분의 공간을 희생해야 했지만, 분당 3발을 사격할 수 있는 레일건은 6티어 몬스터도 한방에 침묵시킬 수 있는 괴물이었다.

가히 미국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괴랄스러운 비행체다.

바싹 마른 땅에 발을 디디자 대기 하고 있던 이들이 제황을 마중하기 위해 서둘러 다가온다.

“궁신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마치 과거 어느 나라의 독재자를 환영하듯 열렬하게 환호하는 사람들이다. 모두 제황의 위용을 생방송으로 본 것.

멀리서 연구복 차림의 남자들이 마치 제황의 몸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눈을 굴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탈인간의 스펙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리라. 미리 차에서 내린 이루미나 권제, 동철 그리고 무련천가의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에 모두 얼떨떨해 하고 있다.

사람들을 뚫고 일단의 헌터들을 뒤에 거느린 한 여인이 제황에게 다가섰다.

“제1 네바다 기지의 책임자를 맡고 있는 제인 커즌스입니다.”

딱딱한 군인이 책임자로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1기지의 책임자는 여자였다.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었고 더워서인지 앞섶을 상당히 풀어헤쳤는데 구릿빛의 흘러넘칠 듯한 가슴이 차에서 내린 이들의 눈길을 단숨에 붙잡는다. 상당한 동안의 라틴계 미녀다. 제황의 곁을 근접에서 보좌하는 이루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찌는듯한 찜통더위 속에서도 복장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차가운 이루미와 참으로 대조적이다. 게다가 제황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제황이 슬쩍 눈빛만 줘도 그대로 안겨들 것 같은 뜨거운 눈빛이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황을 힐끔 바라본 이루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제황은 눈앞의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여느 때처럼 주변 지리를 눈에 담기 여념이 없다. 그녀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동철이나 체통을 지키려는지 눈만을 힐끔거리고 있는 권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제황이다.

“제황님. 기지 책임자입니다.”

이루미가 주의를 환기시키고 나서야 고개를 돌린 제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황입니다.”

쌀쌀맞은 제황의 말이지만 제인은 그조차도 황송한지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궁신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끈적한 목소리로 답하며 열기어린 눈빛으로 제황을 올려다보는 그녀다.

“안내를 부탁드리죠.”

“예? 예!”

제황의 말에 그녀는 제황의 곁에 착 붙어 기지 내의 시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 건물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주시면 바로 조처해 드리겠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제황이 살짝 목례를 하자 가볍게 경례를 붙인 제인이 조금 아쉽다는 듯한 눈빛으로 제황을 바라보며 몸을 돌린다.

“제황아.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앞으로 좋으나 싫으나 한솥밥 먹어야 하는데.”

제인 커즌즈가 사라지자 동철이 은근히 다가와 말했다.

동철의 물음에 이루미도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제황을 바라봤다. 안내 받는 내내 그녀의 과한 행동과는 별개로 제황의 조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동철의 물음에 주위를 둘러보던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쩍 권제의 눈치를 보니 권제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확실히 이제 다른 차원의 인간이 되어버린 자신에 대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의 제황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영향권 안이야.”

“뭐?”

제황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갸웃한다.

갑자기 뜬금없는 드래곤이 나오자 의문을 가진 것. 적어도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을 드래곤이 여기서 왜 나오는가.

말보다 행동으로 설명하기로 마음먹은 제황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마나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과거의 제황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제황은 꽤 손쉬운 일이다. 여의보주는 세상 그 무엇보다 맑고 투명한 대자연의 마나집약체였다.

그리고 그 여의보주를 용혈신공으로 흡수한 제황은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주변의 마나를 그의 마나로 호응시키면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영향력의 한계는 제황의 의지뿐이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가히 신의 영역...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것을 그나마 눈치챌 수 있는 것은 권제 밖에 없다.

‘거기군.’

제황은 기지를 보고 있는 황금빛의 기운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가 마나로 슬쩍 건드리자 놀랐는지 황금빛 마나의 주인의 놀란 감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추스른 듯 제황의 마나에 공격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제황이 가지고 있던 마나의 지배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들어오기 시작한 것. 그러나 제황은 그 공격에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마나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고만 있다.

파직...파지지직...

임시기지 상공으로부터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고 황금빛과 붉은빛의 스파크가 격돌하는 현상을 본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뛰기 시작하고 임시기지에는 비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상대의 황금빛 마나가 공격을 멈췄다.

-반갑다. 인간의 용사여.

-반갑습니다. 이계의 신이여.

제황은 머릿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답했다.

-호오,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백린에게 들었죠.

-음? 너 백린을 아는가?

-네. 친구입니다.

-호호호, 그렇군. 그래.

엘의 마나에서는 본래 그다지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린의 이야기를 꺼내니 그 적개심이 조금 더 옅어진다.

-좀 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의 만남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아쉽군요.

상대가 나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초월종이기에 제황은 예의를 지키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이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다면 제황과 싸울 이유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 나 또한 내 차원의 존재들과 맺은 맹약이 아니라면 이렇게 기울어진 저울추를 돌리기 위해 이곳으로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은 피곤한 직업이군요.

-호호호, 만약 다른 것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면 내 당장 소멸시켜 버렸겠지만, 너에게는 나와 비슷한 향기가 느껴지는구나.

엘은 꽤 친근한 목소리로 제황에게 말했다. 정말 분위기만 보면 차 한잔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4일은 남은 것 같은데 벌써 공격 시작입니까?

-공격이라기보다는 그냥 호기심이 나던 차였다.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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