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드래곤레이드 준비-1 (수정)
#1
제황이 드래곤과의 전투를 대비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구 저편의 다른 곳에서도 제황의 영상을 보며 얼굴을 붉히며 깔깔대는 존재가 있다.
이곳은 더 팔라스 라스베이거스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다. 한 미녀가 침대라 해도 믿을 거대한 쇼파에 파묻히듯 드러누워 거대한 와이드 TV에서 한창 재생 중인 제황의 레이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중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수 개의 리모콘을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화면이 바뀔 때마다 까르륵거리며 웃고 지랄이다.
“하. 이거 너무 박진감 넘치는데.”
자극적으로 편집된 영상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엘이다.
이미 자신의 선례라고 할 궁기의 드라마 덕질의 역사를 그녀가 알 리는 없지만, 이 덩치 크고 오래 산 생물 또한 이 세계의 중독성 있는 신문물에 한껏 젖어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담배쇼핑이나 하려던 그녀는 이제 지구의 문물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역시! 멋져.”
그리고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적에게 꽂혀버렸다.
“아, SBX에서 하는 ‘세계의 위협! 드래곤과 궁신’을 까먹었네!”
손뼉을 짝하고 마주친 그녀가 익숙한 손길로 리모컨을 조작해 옆에 있는 다른 스크린를 켰다. 이전에 보고 있던 것은 호텔에서 유료서비스로 제공하던 영상이고 지금 켜는 것은 유료 케이블방송이다.
마침 광고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직전이다.
멋들어진 모습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신의 모습과 활을 당기고 있는 궁신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스튜디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녕하십니까. SBX의 사회를 맡은 조쉬 헤밀튼입니다. 1부에서 아메리카대륙을 위협하는 드래곤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면 이제 2부에서는 드래곤의 유일한 대항마라고 불리는 궁신의 대해 집중 조명하겠습니다.
화면이 바뀌며 수십 개로 교차편집된 궁신의 모습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적으로 상대해야 할 이를 이렇게 꼼꼼하게 분석해 주고 있다. 이 웃긴 인간들은 자신이 이것을 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지 지겹게도 방송으로 틀어주며 궁신이라는 이의 스킬을 그녀에게 교육시켜 주는 중이다.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인간 따위는 저울의 추가 다시 평행선이 될 때까지만 밟으면 그만인 열등한 종족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자신에 대한 긴급특집방송이 하루 중 18시간이 넘게 편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대항마로 지목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헌터인 제황에 대해 지겨울 정도로 소개되었다.
한참 티브이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그녀로서는 자신에 대한 방송이 나올 때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듯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 어느 틈에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이 펜트하우스에는 손님이 원하는 모든 종류의 영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순위 1위는 역시 궁신의 영상이었다.
시간을 준 뒤 인간에게 더 큰 절망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준 덕분에 할 일 없어진 그녀는 근 이 주간 궁신의 대한 모든 영상을 섭렵했다. 그리고 하늘의 장난일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은근 제황에게 덕통사를 당한 상태였다.
-9티어 라바골렘을 단 한발의 공격으로 절명 시키는 순간입니다!
쿼드콥터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제황의 눈이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 있을 라바골렘을 향해 강렬한 이펙트와 함께 활을 놓은 모습이 감각적으로 방영되는 중이다.
“모르고 당하면 정말 순식간에 골로 가겠네. 음! 체크체크!”
물론 엘 그녀도 체크를 외치면서도 제황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가 광대뼈로 올라가는 중이다.
-이것은 과거 베히모스 레이드에서 콜로니의 드론에 찍힌 궁신의 초근접전 영상입니다! 와우 화려하군요. 번쩍이는 것 보이시나요? 마치 AOS 게임의 점멸 스킬을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이게 무슨 스킬이죠? 마틴씨?
-높은 민첩스킬과 최고수준의 은신스킬 그리고 궁신의 전략적 움직임이 초당 300프레임의 고화상을 자랑하는 드론으로도 포착하기 힘든 움직임을 만드는 겁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은신 스킬인데요. 저는 이번 드래곤 레이드에서 이 은신스킬이 결정적 역할을 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오가무시 레이드의 경우 6에서 7티어로 평가받는 사케노오스케 숲을 유유히 빠져나온 것은 이 스킬의 힘이 컸다고 봅니다. 향후 전략적 지원을 통해 궁신을 도울수 있다면 10티어 몬스터인 오오가무시를 단 한발에 침묵시킨 궁신이 드래곤에게 신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한 금발 머리에 아이돌같이 생긴 서양인 청년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제황을 칭찬하고 있다.
-음. 마틴 헌터님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미국의 헌터들 또한 그에 뒤처지지 않습니다.
카메라 앵글이 돌아가며 대머리에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험상궂은 헌터의 얼굴이 잡힌다.
그는 이전 방송부터 꾸준히 궁신을 비판하는 처지에 선이었다. 궁신을 덕질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하늘 아래 함께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 격으로 취급받는 그지만 멘탈붙잡기가 유니크 스킬로 등록이 되어 있는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황을 깎아내리기로 미국의 유명인사다.
“아, 저 새끼는 쉬지도 않고 나오네.”
엘은 기습적으로 들어온 안구 테러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방송국으로 날아가 저놈을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고 싶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다.
“이잇!”
끝내 그녀는 테이블 옆에 놓인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당장 방송국에 전화해서 저 면상 어서 화면 밖으로 치워버리고 궁신의 얼굴이나 한 번 더 내보내라고 항의하려 방송국 전화번호를 누른다.
-통화량이 많아 연결할 수가 없...
“이런 갓뎀잇!”
씨끈덕 거리며 몇 번 더 전화를 걸던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는 전화기를 내던졌다.
“뭐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
일주일 뒷면 약속한 한 달이 끝난다. 그때 처리하자고 마음먹은 엘은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그때였다. 방송 화면이 전환되며 긴급 속보를 알리는 로고가 화면을 장식했다.
“어?”
-긴급 속보입니다. 10성 헌터 궁신이 드래곤에 드디어 칩거를 깨고 나왔다는 소식입니다. 무련천가의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신뢰할 수 있는 고위소식통에 의하면 드래곤 레이드에 대비해 그동안 꾸준히 준비해 왔던 만큼 궁신의 드래곤 레이드는 거의 확정적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이에 오랫동안 침묵하던 궁신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당국은 궁신과의 접촉을 통해 향후 일정을 조율할 것으로 봅니다.
“흠. 드디어 나서는 건가.”
순간 엘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은근 푼수끼 있는 덕녀의 냄새를 풍기던 그녀지만 그녀의 본질은 드래곤.
금세 본래의 신색을 되찾는다.
“꽤 재미있겠어.”
궁신이라는 이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
애초에 그녀가 궁신이라는 이 인간에게 주목한 것도 그가 인간의 기준을 완전히 뛰어넘은 초인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말도 안 통하는 원숭이 중에 꽤 잘생기고 지적이며 말도 통하는 원숭이를 만난 것의 경우이리라.
그 관심이 조금 변질되어 덕질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다.
아마 인간의 최강자 정도를 지구에서 지우면 저울의 무게추가 공평하게 바뀌리라.
“뭐 죽기 직전까지만 몰아붙인 다음에 납치해 가도.. 후후.. 괜찮겠지.”
#2
위이이이...
미국으로 향하는 전세기 내의 분위기는 매우 차분했다.
쿼드콥터인 아트라스가 있었지만, 군용으로 제작되었기에 탑승감이 쥐약이라 따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제황은 맞은편에 앉아 태블릿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루미에게 물었다.
“뭐 걸리는 게 있습니까?”
제황의 물음에 이루미가 낮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드래곤에게 거주하고 있는 호텔의 자가발전시설과 통신시설을 제공하고 있는 미국 때문입니다.”
“방송 말이군요.”
“아무리 제황님이 괜찮다고 말씀하셨다지만 상대의 지능이 인간을 상회한다는 결과가 나온 만큼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이런 와중에 이런 방송들이 드래곤에게 제공된다는 건 제황님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준다는 것과 같습니다. 저들이 대체 이 레이드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몰락을 바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속에 쌓인 게 많은 듯 이루미는 꽤 길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의 말에 제황이 피식 웃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예견했었다.
천연덕스럽게 쇼핑을 즐기는 몬스터다. 찾고자 하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는 게 현재 제황의 영상이었다. 그래서 제황은 이루미에게 방송이 나가는 것에 대해 딱히 가로막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의 저를 기반으로 드래곤이 대응한다면 오히려 제가 바라는 바죠.”
“그건 알고 있지만...”
제황이 말하는 바를 알고 있는 이루미다.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숨길 수 없다면 아예 오판하게 한다는 것은 제황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그 위험의 대상이 제황이기에 속편하게 있을 수 없는 이루미였다.
“연합공격대 건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세계헌터사무국과 미국이 발 빠르게 움직여 지금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6성에서 7성의 헌터들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드래곤이 부리는 몬스터웨이브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제황이 드래곤과 확실한 일대일 구도를 만들기 위한 조치다.
철컥... 우당탕!
한바탕 소음과 함께 비행기 통로가 비좁게 느껴질 두 거한이 티격태격하며 걸어들어왔다.
권제와 동철이다.
“아, 애도 생겼는데 머리는 왜 때려요!”
“이눔 자식이... 너 비행기에서 내리면 보자.”
한템포 빠른 임신 덕분에 결혼한 동철은 레이드를 잠시 중단한 상태였다.
동철은 이번 레이드에서 제황이 드래곤과 격돌한다는 말에 이렇게 부랴부랴 따라나섰다. 권제 또한 힘쓸 곳이 없어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핑계로 함께 연합공격대에 참가신청을 하고 미국으로 향하는 중이다.
권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동철은 그동안 간덩이가 배밖으로 튀어 나왔는지 자꾸 불쑥거리며 권제에게 대들었고 권제는 차마 비행기 안에서 난동을 부릴 수 없기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동철의 눈앞에 주먹을 흔들 뿐이다.
“해행! 갈곳이 다르네요. 영감님은 7성으로 등록되어 계시니 연합공격대로 저는 아직 5성이니 제황이나 따라다닐 겁니다. 제가 미쳤다고 노친네들이랑 같이 다녀요.”
“임마. 니가 무슨 5성이야! 7티어 몬스터도 쌈싸먹는 새끼가..”
“흐흐, 7성 헌터 라이센스 만드는 거 까다롭더라구요. 강제각성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이럴 때는 참 좋아.”
강제각성자는 자연각성자인 디바우저에 비해 한단계 낮은 취급을 당한다.
동철이 아무리 무적성 안에서 날고뛰어도 그 고정관념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하, 이번 일 끝나면 헌터사무국 한번 뒤집어 엎어야지. 일을 그 따위로... 아니지 내 당장 전화를 해서 네놈 라이센스 갱신해 버리고 만다.”
“무슨 그런 짓을!”
동철은 권제가 빼든 폰을 향해 번개같이 손을 뻗었다.
“어딜!”
퍼퍽! 퍽! 퍼퍼퍼퍽! 퍽!
순식간에 두 거한의 손이 공중에서 수십 번의 교차가 벌어진다.
둘 강력하기로는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지컬을 지니고 있기에 교차하는 손에서 들려오는 파공음조차 무시무시하다. 손에 강기만 안 씌웠을 뿐 자칫 비행기 동체에 스치기라도 하면 대형사고가 벌어질 판이다.
“에잇!”
파악!
“어엇!”
권제의 손에서 폰을 빼앗기가 수월치 않자 입꼬리를 올린 동철이 주먹으로 권제의 팔을 쳐버렸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권제의 손에서 빠져나간 폰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벽을 향해 날아간다. 그대로 부딪히면 위험할 상황, 그 때 그들로부터 10여미터 가량 떨어져 있던 제황의 손이 가볍게 까딱인다.
그러자 벽으로 날아가던 폰 사라졌다가 제황의 손아귀 안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어어?”
워낙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라 권제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제황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하다고 할 권제도 제황이 어떤 수법으로 폰을 손에 넣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손안에 들어온 폰을 빙글빙글 돌리던 제황이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다.
“여보세요? 사무총장님. 네네. 다른 게 아니라 저희 무적성에서 미국에 파견되는 사람 중에 7성을 5성으로 속이고 탑승한 놈이 있거든요. 네. 마동철이라고요. 이 자식 지금 당장 7성으로 올리고 연합공격대에 집어넣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툭...
전화를 마친 제황의 손에서 떠오른 폰이 둥실둥실 날아가 권제의 손에 쏙 들어간다.
“으허허허! 넌 임마. 이제 나랑 움직여야 돼. 내가 이번에 빡시게 굴려주지.”
권제의 눈이 득의양양하게 변하고 동철은 울 것같은 표정으로 제황을 향해 외쳤다.
“야! 네가 뭔데!”
동철의 말에 제황이 눈을 감으며 답했다.
“너랑 다니면 피곤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