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반신-2
#1
자신이 더 이상 헌터가 아니라는 궁기의 말에 제황의 얼굴에 살짝 당황의 빛이 서렸다. 그러나 그뿐이다. 다시금 원래의 신색을 되찾은 제황이 눈을 감고 본래의 스킬창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귀여운 맛은 없어져 버렸네.’
궁기는 한편으로는 즐거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운함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제황에게서 느껴지는 신기가 제황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아마 끊임없이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으로 선택한 길이었겠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인간으로서의 오욕칠정 또한 많이 무뎌진 것이다.
‘뭐 나쁘지 않지.’
그러나 궁기는 긍정적인 면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이제 제황이 반신이 되었으니 궁기에 걸맞는 최소한의 신격을 갖춘 것이다. 비록 반은 인간이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이지 않은가. 필멸자의 껍질을 벗은 그는 이제 그녀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저 목석을 어떻게 구워삶지.’
과거 온갖 유혹을 해대도 통하지 않던 철벽이었는데 이제 반신이 되었으니 어쩌면 그 신성중 하나가 ‘철벽’ 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구나 하며 새로운 골칫거리에 인상을 찌푸리는 궁기였다.
이윽고 눈을 뜬 제황이 말했다.
“스킬이 사라진 건 아니구나.”
“당연한 것 아니야? 단지 그 주체가 너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웬지 뚱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궁기의 대답이다.
"흠흠."
궁기의 눈치를 살피며 제황은 다시금 눈을 감고 스킬창에 대해 떠올렸다.
어느정도 방향을 잡으니 스킬창을 다시금 재구성하는 건 간단했다.
이미 수천 수백 번을 봤던 것이기에 조금 생각을 정리하자 곧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물론 만들어진 상태창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신명:천제황 신위: 10,000,000/8,242,349
신체활성화: 1,000%
마나활성화: 4,000%
스킬
신벌의 화살
여의용혈신공
진(珍)무련궁술
-비상하는 화살
-춤추는 화살
-폭발하는 화살
-강기의 화살
-소나기 화살
-관통의 화살
절대권역
암혼보
용혈무
명황안
가문의 문장
“괜찮은데?”
세부적으로 좀 더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과거의 느낌은 어느정도 살렸다.
능력치 창은 대충 구색만 맞췄다. 조금 힘을 주니 1,000% 가 순식간에 10,000%까지 뛰어오른다. 아직 지금의 몸이 지닌 한계를 알 수 없다.
“이건 조금 수정이 필요하겠군.”
골치 아픈 건 좀 치우고 다른 것에 주목했다.
일단 기존의 상태창과 가장 큰 차이점은 궁기안과 신위, 빠른 재생과 요리라는 스킬이 상태창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세이브에 의해 얻었던 빠른 재생과 요리는 세이브가 사라지며 아예 함께 사라져 버렸다.
시스템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빠른 재생은 꽤 요긴했던 스킬이기에 조금 속이 쓰린 제황이었다.
궁기안은 제황과 궁기가 동격의 신격을 가지게 되면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별로 아쉽지는 않은 것이 제황은 이미 궁기안 정도의 능력은 자력으로도 구현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격은 제황에게 그대로 흡수되어 레벨과 랭크가 사라지고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저것이 가진 의미도 지금은 알 수 없다. 대략 기존 '신위' 스킬과 비슷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알 것 같지만 자세한 것은 나와있지 않다. 그나마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몸은 느끼고 있다는 게 다행일까.
작은 숨 한줄기 속에서도 세계 속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의 사상력이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이것 참...”
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하고 쓰러질 뻔했다.
“괜찮아?”
“응. 적응하기가 힘드네.”
몸이 힘든 것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강에서 태어난 연어가 바다를 처음 접한 기분이 이럴까?
주위로부터 마구잡이로 밀려 들어오는 온갖 정보와 사상력들이 그를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심해. 넌 이제 갓 신성을 가진 거야. 그것도 여의보주의 힘에 의해 나왔으니 여리고 불안정한 상태지. 앞으로 네가 겪는 것에 따라 네가 악신이 되던 선신이 되던 갈라지겠지만 지금은 얻은 것을 갈무리 하는 것만 생각해.”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제황은 손을 들어 궁기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그녀를 매만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궁기와 제황이 아직도 영혼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궁기는 사실 본래의 신성을 회복하면서 영혼의 맹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맹약의 주체였던 제황의 조상의 영혼들보다 상위의 존재가 되면서 이전의 것들은 모두 무효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궁기는 굳이 그것을 끊으려 하지 않았고 제황 또한 반신의 위에 올랐지만, 그것을 끊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맹약은 이제 신성의 의미까지 하나가 되어 새로운 맹약으로 태어났다.
[신성공유]
둘이며 또 하나이기도 한 그들은 서로의 신성을 공유하게 되었고 그것은 제황의 신성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 줬다. 궁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여의보주가 있었다해도 이렇게 단시일에 영혼이라도 신성을 이루기는 힘들었으리라.
신성의 순환이 일어나자 제황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린다.
그러자 조금 부끄러움을 느낀 궁기가 화제를 돌릴 겸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이루미가 찾아왔었어.”
“아. 이루미...”
궁기의 말에 제황은 궁기옥에 들어가기 전 지구에 닥쳐왔던 위기를 떠올렸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는 기억을 애써 일깨울 정도로 가물가물한 이들이다.
“가봐야겠군.”
제황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떠올리려고 하니 어렵지 않게 이곳의 구조가 생각난다. 그때 궁기가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갈 거야?”
“응? 무슨...아”
궁기의 말에 자신의 몸을 돌아본 제황이 곧 자신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궁기옥에 들어가기 전에는 편한 옷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무한고에 입을만한 옷이 있나?”
“있기는 하지만 맞지 않을걸?”
“어째서? 일단 줘봐.”
“그래.”
잠시 후 무한고에서 궁기가 꺼내주는 옷을 주섬주섬 입은 제황은 옷들이 모두 작아져 버렸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컸나?”
“그래. 지금은 한 2m는 될걸?”
“성장기도 아닌데 어째서?”
“신의 몸으로 재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신성을 품은 몸이야. 인간과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었어. 나와 같은 호랑이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것 참 다행이군.”
인간과 전혀 다른 형태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지금의 몸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제황이었다. 무한고에서 예전에 쓰던 망토를 꺼내 몸을 가리자 얼추 흉한 꼴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슈르르륵...
망토를 걸치고 있자니 궁기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이내 미녀로 탈바꿈했다. 인간의 형상을 취한 그녀가 제황에게 다가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준다.
“머리카락 좀 잘라줘.”
“왜? 보기 좋은데...”
“전투하는데는 불필요해.”
“흐흥.”
제황의 말에 조금 불만을 표한 궁기가 제황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자르려다가 끝내 그것을 한 대말아 휘릭 돌리더니 비녀 하나를 만들어내서 머리에 보기 좋게 꽂아 줬다.
“음? 왜?”
“내 취향이야. 받아들여.”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궁기가 말하자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황이 이내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예전이었다면 고집을 부렸겠지만 이제 그녀의 말을 어느 정도 듣는 제황이었다.
슈유육...
제황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제황의 머리를 다시금 매만진 그녀가 허공중에 사라져 버렸다.
-왜? 그냥 함께 가지?
-난 이게 편해. 가라! 신랑!
-뭐?
-못 들었으면 됐어! 흠흠
-아니 못들은 건 아닌데...
-아! 다시 물어보지 마! 얘는 반신이 되고서도 눈치가 없어!
-뭐 알았어.
궁기에게 한바탕 면박을 먹은 제황은 수련실 밖으로 나서서 기억을 더듬어 무련천가로 향했다.
#2
당연하달까. 53일만에 나타난 제황을 본 이들은 모두 놀라 기겁을 했다.
무련천가 본관에 나타난 제황을 맞이하는 이들은 모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조아렸다.
“모두 오랜만입니다.”
제황은 시간의 괴리에서 오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속에서 일깨우기 바쁘다.
“헛, 제황님이 맞으신지...”
마침 본관에 있던 경호팀장이 달라진 제황의 모습이 적응이 안되는지 당황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 제가 좀 많이 달라졌죠?“
무려 두 달 만이지만 사람이 달라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 아니던가. 외적인 모습도 크게 달라졌지만 가장 큰 것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의 제황은 날카롭고 차가우며 삭막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뭐랄까. 중성적인 느낌마저 드는 외모나 갑자기 커져 버린 키는 둘째치고 같은 인간이라 보기에는 느껴지는 마나가 너무나 맑다.
“제황님”
제황의 소식에 빠르게 문을 열고 나온 이루미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춘 채 반가운 낯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제황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제황의 기파를 파악한 그녀의 표정 속에 이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제황에 대해 아쉬움이다.
‘제황님은 신의 길을 택하셨구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생 많았어요.”
“힘든 수련을 무사히 마치신 제황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 감정이 묻어날까 빠르게 말을 끊으며 사무적으로 답하는 이루미다.
“아닙니다. 그보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좀 변화가 있었던 것 같군요.”
잠깐 둘러본 무련천가 본관의 풍경은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드래곤의 행적을 분석하는 손길로 바빴던 흔적이 가득하다.
“네. 그건 회의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3
제황의 집무실 안...
이루미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들은 제황은 무련천가에서 준비한 드래곤에 관한 자료들을 집무실에 앉아 읽어 내려가는 중이다.
-미국이 그 드래곤이라는 녀석의 심기를 건드렸어.
-응.
미국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나 미국에 대한 드래곤의 불가사의한 공격은 둘째치고 드래곤이 말한 한 달이라는 기간이 이제 고작 일주일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제황은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가급적 그가 가진 신성에 대해 완전히 파악할 시간이 있었으면 했지만 일주일은 너무 짧다. 게다가 이루미가 준비한 자료를 보자면 드래곤은 좀 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 상태다.
-내가 오판했군.
-그러게.
이것이 제황이 없던 두 달간 수집된 자료들에 대한 소감이다.
당시에는 마법적 능력과 고도의 지능 그리고 그 강대한 육신에 초점을 뒀었는데 새롭게 들어온 정보들에서 느껴지는 드래곤의 본질은 제황이나 궁기와 같은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첫 상대가 이계의 반신과의 전투라...
-그 근본자체도 다르다고 할 수도 있어. 종의 우월성도 무시할 수는 없지.
-응. 나도 느끼고 있어.
그 신성의 근본이 전투이기에 제황의 전투적 감각은 궁기에 맞먹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 감각이 지금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와 함께 이미 제황의 머릿속에서는 자료를 통해 보이는 드래곤과의 시뮬레이션 전투가 쉴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끝마친 제황의 표정이 좋지 않다.
-승률이 나쁜편은 아니지만 역시 예외의 상황이 문제구나.
-그래.
드래곤은 양파와 같은 존재였다. 아직 어떤 것을 더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차라리 이럴 때 백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련천가에서 수집한 자료 중에는 드래곤이 백린에 대해 직접 언급한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드래곤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그라면 어쩌면 드래곤과의 싸움을 피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백린은 다크어스에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면 백린과 나눈 전화번호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봤지만, 백린의 전화기는 꺼진 상태다.
“일주일동안 바쁘겠네.”
신성을 확실히 갈무리하고 행여 발생할 드래곤과의 전투를 생각하면 일주일간 잠도 자지 못할 것 같다.
“응. 그동안 부족했던 당보충을 하려면 시간이 부족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