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반신-1
#1
“후우...”
“사무장님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비서가 물었지만 이루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얼음 같은 이루미가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자 비서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서둘러 결제가 끝난 서류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권제가 은퇴를 선언했다고 하지만 내외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권제가 기획한 회심의 탈출플랜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권제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으니까. 미국의 일도 해결되었기에 이제는 드래곤레이드에만 집중하면 되니 한시름 놓은 것 같지만 이루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아”
한숨만이 감도는 사무장 집무실 안...
-제황님은 괜찮으실까요?
-놈이 걱정되는 거냐?
-예.
궁기에게 정신개조를 당해 이제는 완전히 광증이 사라진 신덕은 이루미의 좋은 조언자였다. 물론 제황이 수련에 들어가고 궁기마저도 자리를 비우자 궁기의 주인인 제황을 ‘놈’이라고 표현하며 날이 갈수록 간이 커지기도 했고 말이다.
이루미는 제황이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수련실의 변화에 대해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를 받고 있었다. 내부에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고 식량도 넉넉히 들어가 있지만, 올라온 보고를 꼼꼼히 챙기는 이루미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물의 사용량이 전혀 없어요. 쓰레기 배출도 없고...
뭐 식사할 때 생수를 마실 수도 있고 쓰레기를 안에 쌓아 놓을 수도 있지만, 화장실 물조차도 사용되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컸다. 전기는 그나마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도 아주 적은 수치만이 사용되고 있었다.
-옛날에는 그런 수련이 흔했단다. 최소한의 물만을 보충하며 집중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의 무공에 빠져드는 거지.
-그래도 50일은 너무한 것 아닌가요?
아무리 헌터의 몸이 초인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생리작용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올라온 보고를 분석하면 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무련천가 놈들이 좀 독종이기는 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무련천가 놈들은 아주 태어나면서도 응애하는 대신에 나는 독한 놈이다 하고...
-조상님.
-뭐, 알았다. 뭔 말을 못해.
창궁신가의 멸문이 무련천가에 의해서였을까? 신덕은 무련천가에 은연중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 만의 드디어 찾은 소중한 혈통인 이루미이고 그 이루미가 제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신덕은 근질거리는 입을 애써 닫았다.
-가봐야겠어요.
이루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먼저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행여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이루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는 높이 5미터의 큼지막한 철문 앞에 멈춰섰다.
이곳은 권제의 개인수련장이었다. 제황의 것도 따로 있었지만 이제 권제마저도 훌쩍 뛰어넘은 제황의 능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곳은 무적성 내에서 권제의 수련장이 유일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루미가 잠금장치에 달린 패널 앞에서 다시금 심호흡했다.
신앙과 같은 제황의 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인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마스터코드를 입력하려는 찰나 잠금장치의 SEAL 버튼이 UNSEAL 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내부에서 폐쇄장치를 풀었다는 뜻이다.
놀란 이루미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심스럽게 OPEN 버튼을 눌렀다.
철컥···. 드르륵...푸식···. 쉬이익
상하좌우에 걸려있던 결속장치가 풀리며 천천히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육중한 문틈 사이로 상스러운 붉은빛이 일렁거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무리에 고개를 갸웃한 이루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문안으로 보이는 것은···.
“흐읍!”
이루미는 저도 모르게 벌려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내부에서 보이는 광경과 뿜어지는 에너지가 그녀의 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뭐···. 뭐지?”
수련장은 상당히 넓다.
가로세로 100여 미터에 달하며 높이는 50미터가량 된다. 단 일인이 사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넓지만 지금 그 거대한 공간에는 하나의 생명체가 비좁다는 듯 똬리를 튼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머리로 추정되는 거대한 것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인다. 그 머리가 생명체의 것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 크기가 너무나도 터무니없다. 그러나 몬스터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 아니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 거대한 머리가 이루미를 향해 멈췄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 하나조차도 이루미와 크기가 비슷하다.
-무슨 일이냐.
차가운 미성이 이루미의 머릿속을 직접 파고든다.
신덕과 대화하며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진 이루미가 되물었다.
-누구시죠?
-나? 나는...
미성의 목소리가 자신을 소개할 찰나 신덕의 긴장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궁기... 궁기의 본체가!!
-어쭈, 신덕... 궁기? 말이 좀 짧다?
-히이이익! 누...누님!!!
버릇처럼 이루미에게 말했을 뿐인데 재수없게 궁기에게 들켜 버렸다.
-궁기님인가요?
-너 새끼, 나중에 보자. 그건 그렇고 넌 이 모습은 처음이겠군.
-네.
궁기가 본격적으로 외부활동을 시작하면서 제황은 이루미에게 궁기를 소개해줬었다.
그녀가 인간 세상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녀가 본 궁기의 모습은 붉은 적발의 미녀였다.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황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이야기해줬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가문에 얽힌 비사까지···. 그렇지만 그녀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워낙 거대하여 뒤가 보이지 않지만, 그 머리의 형상만을 두고 보자면 붉은 털을 지닌 호랑이와 비슷한 형상이다. 물론 단순히 덩치만 거대한 호랑이가 아니다. 그 털 한 올 한 올 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루미를 긴장하게 했다.
특히 그 부리부리한 눈은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치면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게 할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제황이 너나 권제녀석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황님은 어디 계시죠?
-제황? 이거 좀 불편한데...
궁기는 그 거대한 몸을 뒤척이더니 힘겹게 한쪽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다. 힘겹게 앞발을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붉은빛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알이 드러났다. 아니 알이라고 하기에는 구슬과 같은 모양이다. 옥색의 커다란 구슬이 옳을 표현이리라.
-제황님이 어디에···.
-제황이? 이 안에 있지.
-저게 뭔가요?
-음. 저건 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본래는 내 힘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제황의 기운이 섞이더니 저렇게 변해 버렸다. 덕분에 나도 간섭하지 못하고 있지. 나쁜 자식···. 거기가 얼마나 외로운 곳인데···.
-네?
-아니다. 이제 궁금증은 풀렸겠지?
-네. 그렇지만 제황님의 안전을...
-그만. 네가 물을 수 있는 자격은 여기까지다. 만약 네가 제황이 소중히 하는 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내 본체를 보여주지도 않았을 것이야.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기다려라.
후우욱...
궁기의 돌아가라는 그 한마디에 기운에 이루미는 몸이 절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느꼈다. 마법의 힘이 아닌 궁기가 가진 신성의 행사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이루미는 힘겹게 몸을 세웠다.
-호오
자신의 말을 거역한 이루미를 궁기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것은 단순한 강함을 떠나서 그 영혼의 크기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래 봤자 궁기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일 뿐이다. 궁기의 눈이 가늘게 변한다.
-네가 제황의 지인이라고 해도 두 번 용서는 없다.
-하나···. 하나만 말씀해 주십시오.
-뭐지?
물음을 허락받았다. 잠시 생각한 이루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황님은 아직 인간입니까?
이루미의 물음에 궁기가 기특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잘해야 무사하냐고 물을 줄 알았건만 꽤 통찰력 있는 물음이다.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그래 아직은 인간이다.
-아직은 이라니요?
이루미는 궁기의 말속에 숨은 작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이대로 반신의 길을 택할지 아니면 인간으로 남을지 그건 제황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반신이라니요. 그건 또 무슨...
-그만! 난 하나의 질문만을 허했다. 이제 돌아가라. 내가 보살피고 있으니 이 세상에 제황을 위협할 것은 없다.
그 말과 함께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기운이 그녀를 문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리고 철문은 굳게 닫혔다.
잠시 후 이루미가 신덕에게 물었다.
-조상님. 조상님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래. 대충은 알겠다.
-저게 뭐죠?
-누님의 말과 알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제황은 지금 전혀 새로운 형태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렇지만 나 또한 저것이 뭔지는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없다. 그나마 하나 말해 줄 수 있는 건 녀석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신덕의 말에 이루미는 한동안 말없이 철문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침묵을 지켜보며 신덕은 안쓰러운 마음을 애써 감췄다.
그가 파악한 것 중 이루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세세한 내막을 이 혈손에게 알려야 할까 망설여진다. 그 진실은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그녀에게는 가혹한 일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덕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있구나.’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둘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2
파삭...파사삭...
옥색 구슬의 표면에 얇은 실금이 갔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잠시 후 실금은 멈추지 않고 구슬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순간 단숨에 내부에서 뭔가가 빨아들이듯 산산이 부서지며 흡수되듯 사라졌다. 구슬이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남자였다.
하얀 피부에 조각과도 같은 피부를 지닌 장신의 남자는 마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깎지 않은 듯 삼단같이 검고 긴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남자는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이미 구슬이 깨지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궁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이윽고 남자의 입이 열리며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한숨을 내쉰 제황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얼굴을 가까이 붙인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궁기의 눈이다.
범인이라면 놀라서 기절할 광경이지만 제황은 표정 변화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끝을 보고 나왔구나.”
“얼마나 지난 거지?”
“정확히 53일 하고 3시간”
그녀의 말에 제황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궁기옥에 있었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의 하루는 궁기옥의 일년이다. 계산상으로는 무려 53년을 궁기옥 안에서 홀로 버틴 것이다. 중간에 궁기가 간섭하려고 했었다. 본디라면 불가능할 일이지만 궁기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제황이 거부했다.
그렇게 홀로 53년을 궁기옥 안에서 수련을 마치고 나온 것이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
53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텼으니 몸상태가 최악이었어야 정상이지만 지금 육 안으로 확인되는 몸은 궁기옥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기분만이 아니라 진짜 좋아졌다. 제황이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있을 때 궁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오래 버틴거야?”
“아니 본래는 20년 정도만 셌어. 나머지는...흠...”
궁기옥 안에서 제황은 여의용혈신공에 대해 참오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의보주에 화두를 두고 용혈신공으로 그것을 녹여내려 했었다. 첫 몇 년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용혈신공에 대한 이해가 끝나 대성을 마쳤을 때 여의보주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중간에 그만뒀을 것이다.
궁기옥 안의 생활은 고독했다.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잠을 자고 식사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조차도 그만둬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조차도 잊은 채 여의용혈신공에 빠져들었고 지금 이렇게 궁기옥에서 현실로 돌아와 있다.
‘상태창’
제황은 습관적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상태창은 자신의 성취도를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상태창이 생성되지 않는다.
“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상태창이 안나와.”
제황의 말에 궁기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바보냐. 이제 그런 허접스러운 시스템 따위로는 너를 담아낼 수 없게 된 거야.”
“뭐?”
“너 이제 헌터 아니라고...뭐 네가 그게 편하면 네가 직접 만들어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