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한미조약-3
#1
약 100여명 정도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출입할만한 거대한 정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금빛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백포를 걸친 장신의 노인과 그를 보좌하듯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인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굳이 권제님이 나서실 것 까지는...”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긴 소매로 입을 가린 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의 권제다.
그러나 표정만 개구쟁이일 뿐 정문 밖에 서 있는 미정부의 헌터들을 바라보는 눈은 흉악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권제님 이건 무련천가의 일입니다.”
“내 손자의 일이기도 하지.”
낮게 읊조리는 권제의 말
그리고 말과 함께 권제로부터 훅하고 밀려드는 투기와 존재감에 이루미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 또한 창궁무가라는 기연과 신덕의 가르침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일취월장했지만, 경지가 높아진 만큼 더욱 큰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권제의 무게감이 그녀로 하여금 물러서게 만든 것이다.
“내 개인적인 볼일도 있고 말이야.”
“후우.”
거인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이루미가 할 수 있는 건 한숨뿐이다.
권제가 작정을 했다.
“어디 한 번 연극을 즐겨볼까?”
권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특작부의 헌터들이 좌우로 쫙 갈라지고 그 사이를 권제가 뚜벅뚜벅 걸어간다. 코쟁이들을 두들길 즐거움에 두 주먹을 풀던 김주한과 살라딘 또한 뒤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파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흐으, 제길 괴물 같은 영감이 좀이 쑤셨나보군.”
이 둘 또한 권제에게 수련을 받았었다.
“비키자. 노인네 사고치려고 한다.”
“그래. 뒷수습이나 해야겠군.”
그들이 자리를 비키자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 앞으로 나아가는 권제다.
이윽고 진테프먼의 앞에 권제의 걸음이 멈췄다.
‘흥, 그래도 권제는 제정신이 박혔군.’
만만치 않은 이들이 앞을 가로막아 긴장하고 있던 진테프먼은 권제가 홀로 나서자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조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 말이다.
그리고 그런 진테프먼을 바라보며 권제 또한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감이 떨어졌군.’
진테프먼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권제는 이미 비밀리에 손을 써 진테프먼의 귀에 착용된 헤드셋을 망가뜨린 상태였다. 제황에게 자극받아 이미 8성 헌터의 영역을 뛰어넘고 있는 권제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사전작업은 끝났다.
“왜 왔냐? 꼴통새끼야.”
“??”
입에서 흘러나온 막말과는 다르게 권제는 정중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권제가 헤드셋을 망가뜨렸기에 한국어를 듣는 진테프먼은 오만상을 찌푸릴 뿐이다. 머리가 나빠 간단한 한국어조차 모르는 그였다.
“뭐라는 거야?”
진테프먼은 말이 영어로 들려온다. 기계가 망가진 것을 확인한 권제의 얼굴에 미소가 한껏 머금어졌다. 권제가 그의 헤드셋을 망가뜨린 이유는 헤드셋에는 타인과 대화를 공유하는 기능도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 발생할 골치아픈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 지금부터 이곳에서 벌어질 일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된다. 절대!
권제는 마치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며 진테프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타인이 보기에는 진테프먼을 반기는 듯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단어였다.
“너 이 새끼 여기가 네놈 무덤인 줄 알아라.”
“?”
계속해서 번역이 되지 않자 진테프먼은 헤드셋에 이상이 생긴 것을 깨닫고는 점검을 하려 했지만 권제가 불쑥 악수를 청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도 지금 수백의 헌터들이 지켜보는 와중이기에 악수를 거절할 생각은 없다.
“어엇?”
그런데 마주 내밀던 그의 손이 그의 의지에서 벗어나 마주 다가오던 권제의 가슴팍을 팍하고 밀쳤다. 돌발상황이다. 멀리서 둘을 촬영하고 있던 수십 개의 카메라가 그 장면을 전세계로 생생히 중계하는 중이다. 마치 권제가 악수를 청했는데 진테프먼이 그 악수를 거절하고 권제를 밀친 모양새가 되었다.
“이게 무슨!”
진 테프먼은 이 당황스런 사태에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앞으로 나서며 권제를 향해 손바닥을 뻗어갔다.
짝...
진테프먼의 손바닥이 물러서는 권제의 뺨에 재차 쳤다.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그 꼴을 목격하는 모두는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눈으로 입을 떡 벌린 채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황스러움과 모멸감이 가득한 눈으로 물러서는 권제였지만...
‘넌 이제 뒈졌어.’
말아쥔 권제의 두 주먹에 뭉클거리며 강기가 피어올랐다.
‘정당방위다.’
퍼퍽!
우직...
“컥!”
권제의 오른 주먹이 진테프먼의 복부방어구에 꽂힘과 동시에 배부분이 움푹 꺼져 버렸다.
이번에 진테프먼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9티어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든 방어구건만 권제의 주먹 앞에서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권제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숙여진 진테프먼의 뺨으로 권제의 손바닥이 작렬한다. 그리 강하지는 않다. 물론 보기에는 말이다.
쩌어어억!
도저히 피부와 피부가 부딪혔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찰진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하얀 옥수수가 파편처럼 튀어 나갔다. 따귀에 맞아 날아가는 것을 기다릴 생각도 없다는 듯 뒤이어 날아드는 건 진테프먼의 쇄골을 그대로 주저앉히는 수도(手刀)를 이용한 도끼찍기!
우지직...
“끄아아아악!”
진테프먼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은 게 아니라 그대로 바닥에 박혀 버렸다. 무시무시한 한 방! 그것이 왜 무시무시하냐 묻는다면 무적성의 앞마당은 강화콘크리트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강화콘크리트를 뚫고 양 무릎이 파묻혀 버렸다..
이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1초... 다른 사람들이 ‘어?’ 할 새도 없이 진테프먼은 곤죽이 되어 버렸다. 세간에 알려지길 진테프먼 또한 권제와 같은 7성헌터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 속사정을 보면 진테프먼은 과거 같은 7성으로 평가 받았을 때도 권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10년... 권제가 꾸준한 실력으로 레벨을 초월한 성장을 이룩한 반면 진테프먼은 훈련에서 손을 놓은 채 정치질에만 치중했다.
그런 그를 권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쓰레기 같은 놈... 실력이 퇴보했군.”
권제와 진테일러는 구면이었다. 과거 진테일러의 취임식 때 권제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진테일러의 미헌터사무국 사무총장에 취임하는 것을 축하해 줬었다.
그러나 동양인인 권제를 백인우월주의자인 진테일러는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권제였지만 당시 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신임사무총장이었기에 당시에는 분을 눌러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는 무적성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구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끄어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권제는 진테프먼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확실한 마무리를 지려는 것, 사실 딱 여기까지가 핑계 대기 좋은 타이밍이지만 생각해보니 이제 별로 참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차피 이제 그의 어깨에는 무적성이 없다. 든든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손자가 있지 않은가.
그를 까마득히 뛰어넘어버린 괴물같은 놈... 뭐 놈이 계속 싫다고 하면 저 뒤에서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는 이루미에게 넘겨줘도 상관없어 보인다. 어차피 무련천가에 무적성을 얹든 무적성에 무련천가를 얹든 ... 김밥이든 누드김밥이든 마찬가지 아닌가.
“크크큭...”
“사, 사무총장님을 구해라!”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이들이 현장에 뛰어들려 하지만 이미 권제의 주먹은 진테프먼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고 지나간 후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투웅...
진테프먼의 머리가 거세게 떨리더니 그대로 축 늘어져 뒤로 넘어갔다. 코와 귀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사무총장님이 살해당했다!”
“이런 미친!”
그 광경을 목격한 미국의 헌터 하나가 외쳤다.
미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이 타국의 헌터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는 곧장 품에서 오러가 담긴 단검을 뽑아들었다.
“죽여!”
“모두 공격!”
사무총장에 죽음에 분노한 미국의 헌터들이 각자 냉병기에 마나를 끌어올리며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권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이군.”
후련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며 권제가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깔끔하게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지만 굳이 그런 골치 아픈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일단 적당히 맞아주고...”
단숨에 수 개의 무기가 권제의 상반신을 갈랐고 권제의 하얀 무복은 금새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봐도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건만 병풍처럼 서 있는 김주한과 살라딘은 태평스러운 표정일 뿐이다. 특작부 요원들이 동요했지만 둘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대형사고를 치실 모양이군.”
그들은 권제의 강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두들겨도 끄떡도 않을 노인이 저렇게 공들여 무기를 맞아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리라.
잠시 후 그 이유가 밝혀졌다.
비틀거리며 물러선 권제의 입가에 살기어린 미소가 그려진다.
힐끔 뒤를 돌아본 권제는 둘에게 눈빛으로 절대 나서지 말 것을 지시한 후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반신을 피칠갑을 했지만 실제 피륙만 상했을 뿐이다. 자체 회복스킬을 발휘하면 이정도 상처야 금방 치유할 수 있지만 앞으로 그가 벌일 짓을 위해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흐흐흐 좋구나.”
권제는 오늘 아주 은퇴식을 할 작정이다.
은퇴식 기념으로 1300명의 피면 딱 적당하지 않은가.
“오늘 진정 무적권의 오의를 보여주마.”
쉬이이잉!!! 파아앙!
세 개의 거대한 대검이 권제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단숨에 그의 목을 날릴 기세다.
파칭! 우지직! 콰아아앙!!!
“꾸에에에엑!”
단 한 번의 주먹질에 세 개의 대검이 박살이 나 하늘을 날고 세 명의 헌터가 사지가 꺾인 채 공중을 날았다.
‘무적권 산들바람’
권제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상체가 숙여진다. 두 팔을 가슴에 모은 채 이제는 제어할 사람이 없는 해일같이 밀려드는 1297명의 헌터들을 바라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심장마비가 올 광경이지만 권제의 두 눈에는 즐거움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쾅! 쾅쾅! 콰콰콰쾅! 쾅쾅쾅!!!
“으악! 아악! 악! 아아악!”
권제의 은퇴쇼가 시작되었다.
#2
[무적성 잔혹사]
이날의 이 일은 이 한 줄의 헤드라인 기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누가 먼저 실수했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당사자라고 할 한명이 현장에서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것은 둘째 치고 선제공격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던 권제는 비틀거리면서도 무려 1300명의 미국 소속 헌터들을 모조리 때려눕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당시 동원된 미국의 헌터들이 3성에서 5성이었다고 해도 80세의 노인이 부린 노익장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떡이 되었다.
또 하나 의심을 부채질 하는 것은 무적성의 지배자라고 할 권제가 진테프먼에게 모욕을 당하고 1300명의 헌터들에게 집중공격을 당했음에도 헌터사무국에서 파견된 특작부는 둘째치고 무적성에서조차 일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적성의 발표로는 권제가 절대 나서지 말라는 사전 엄명이 있었기에 피눈물을 흘리며 지켜봤다고는 하지만 카메라에 잡힌 대한민국헌터사무국 소속의 두 헌터가 피식피식 웃는 게 카메라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다루는 각 세계 언론사들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미헌터사무국 진테프먼을 비난하는 기사로 일관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진테프먼의 과거 행적까지 추적하여 혈맹국인 대한민국의 그것도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적성의 주인인 권제를 그런 식으로 모독한 것에 대해 원색적 비난을 쏟아 냈다.
오히려 이번 일에 책임을 진다는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다음날 돌연 은퇴를 선언한 권제가 가장 큰 피해자라며 두둔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온 거인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 없다며 한국 언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권제에 대한 온갖 우호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평생을 걸쳐 해왔던 모든 일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리고 그 기사들 말미에는 권제의 은퇴는 온 국민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막상 권제 본인이 읽으면 왜 남에 은퇴를 가로막냐고 펄펄 뛸 이야기지만 그의 은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금 광화문으로 나와 하나 둘 촛불을 들기 시작하자 권제는 한편으로는 불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흐뭇한 심정으로 낮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