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갑질하지마라-2
#1
“없어?”
-예?
“예는 무슨 예야. 왜 전화했냐고···.”
-저, 그게 알아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파이브고를 꾹 누르며 사무총장이 턱을 괴었다.
이번 놈은 좀 어리버리하다. 대체 이딴 놈에게 감히 무련천가로 전화를 시킨 놈의 면상이 궁금하다.
궁신에 대한 대책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무련천가의 이루미에게 연락이 왔다.
뜬금없는 업무협조 요청... 급이 높은 사무국 내 요인을 단기로 파견 부탁드린다는 것
이유는 묻지 않고 그 자신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의 직감으로는 궁신이 무련천가의 머슴질이라도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존심? 명예? 위치? 그딴 것은 필요 없다.
‘국가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난 마소(馬牛)라도 될 수 있다.’
누군가는 뒤에서 신나게 비웃을 그런 신념이지만 그는 평생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이였다. 특작부를 은퇴하고 연금이나 타 먹으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지만 지금까지 헌터사무국에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렇게 들어온 무련천가에서 그의 보직은 무련천가 입주민선별팀 팀장이었다. 처음에는 왜 이딴 것에 사무국내 요인이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마소처럼 일한다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누군데 이런 일을...’ 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확실히 굴복시키겠다는 의도구나 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숙이라고 할 때 아예 확실히 엎드려 주려고 최대한 저자세로 나갔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신발이라고 못 핥겠는가.
그러나 막상 실무에 들어갔을 때 그는 알게 되었다.
무련천가에서 그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왜 저들이 자신보고 이곳에 와달라고 한 건지···.
보고 느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특권층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것을 제황은 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다. 그러니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이라도 함께 발맞춰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책임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건 다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파면당한 이이사 같은 것들이 아직도 떡하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간덩이만 커진 것들이 무련천가를 한 번씩 건드려보는 거다.
이것들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인지 아니면 다른 부류인지 간을 보는 수작이다. 같은 부류면 같이 적당히 오물통에서 구르며 나눠 먹기 시작하려 할 테고 다른 부류면 오물통으로 밀어 넣어 자신과 같이 더럽히려는 수작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 상위 0.1프로들의 들의 아주 흔하디 흔한 전통이다.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어. 너 우리가 우스워?”
-죄송합니다.
상대는 아직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끊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가? 아니다. 이런 건 위에 따져 물어야 한다.
“네놈 옆에서 듣고 있을 네 윗대가리 바꿔봐.”
그의 말에 상대측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스톱방의 넷 중 둘을 파산시킨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게임을 껐다.
잠시 후 수화기로 좀 더 높은 직위로 보이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화 바꿨습니다. W그룹 비서실장 장총찬입니다.
대리라는 놈이 전화를 돌린 게 고작 비서실장이었다.
“허허...”
더이상 이놈들에게 용무가 없다.
그룹의 회장으로 보좌하는 비서실장 정도 되는 놈이니 말빨과 눈치는 귀신같은 놈일 것이다. 이런 놈이랑 말 섞으면 골치만 아프다.
“허허, 고작 비서실장이라니... 끊지. 그냥 장회장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저 잠시 고정하시고...
상대의 입에서 감히 VIP의 존함이 옆 동네 노인네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온다.
“아니면 국세청에 전화해 볼까?”
-으음...
“감사원은 어때? 어때? 이제 무슨 잘못을 했는지 파악이 돼?”
-그것만은 제발... 죄송합니다.
“아니지. 불편하게 그럴 필요 있나. 내년 W그룹 8티어몬스터 가공자 자격심사에 좀 끼어볼까? 감당할 수 있겠어?
그는 자신이 꺼내 들 수 있는 가벼운 카드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이 할 수 있는 건 이것 말고도 많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런데 언제까지 실장 나부랭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하군.”
-그게...그게...
“장회장은 말더듬이만 키우나 보군.”
그는 그 후로 W그룹 비서실장을 10분간 신나게 까버린 후 전화를 끊었다. 별로 재미없는 갑질놀이기는 하지만 배우는 것도 있고 느끼는 것도 있다. 게다가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얻는 게 아주 많다.
그것은 바로 궁신과 만날 기회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접수된 게 161건이더군요. VJ건이...”
의자에 등을 기댄 그의 등 뒤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사무총장의 눈이 커지며 입에서는 절로 헉하는 소리가 들린다.
“궁신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하하, 어떻게 이 누추한 곳에...”
“누추하다니요. 모두 제 식구인데요.”
“허허, 식구라니... 듣기만 해도 기분 좋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헌터사무국 사무총장의 권위로 사람 하나를 작살 내던 그가 지금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제황에게 끈끈하고도 끈적끈적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제황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다.
“커피나 한 잔 하시죠.”
“예.예.”
제황은 사무총장과 함께 야외로 나섰다. 제황의 성격이 소탈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제황이 뽑아주는 커피를 황송하다는 듯 받아 들었다.
벤치에 앉자 제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무총장씩이나 되는 분을 모셔다 놓고 VJ 건이나 맡기고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하하,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요. 아주 좋습니다.”
사무총장은 과장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세계최강의 10성 헌터와 테이블을 마주하고 독대할 수 있는 자리다.
제황에게 익숙한 무련천가 사람들에게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하겠지만, 헌터밥을 먹고 있는 이들이라면 수십억을 떠안겨주고서라도 앉고 싶어 하는 자리일 것이다.
먼저 입을 뗀 건 제황이었다.
“할아버지께 사무총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할아버지께 수련을 받으셨다고요?”
제황의 말에 사무총장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작부 시절에 매일 목숨이 오가는 훈련을 받았죠. 허허...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그만큼 보람 있는 나날이었습니다.”
꽤 오래전 이야기지만 사무총장의 삶에서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믿을만한 사람이니 좀 더 기회를 드리라고요.”
“그렇군요. 어르신께서...”
“사실 그때는 홧김에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을 무시하고 세계헌터사무국과 직접 소통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제가 너무 편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제황이 고개를 꾸벅숙였다.
“편협하다니요. 아닙니다. 비록 제가 사무총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것이 변명이 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더 확고하게 휘어잡았다면 감히 그런 짓을 벌이지는 못했을 테지요.”
감히 받기 어렵다는 듯 손을 마주 고개를 숙이는 사무총장이다.
그러나 곧 결의 어린 표정으로 제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처럼 굽실거리는 표정이 아니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은 아직 건강하다고 자부합니다. 이것 하나만 믿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제황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사람이다. 아직 이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권제에게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좀 믿기지 않았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저자세를 취하는 50대 초반의 이 사내가 과거에는 특작부에서 저승사자로 통했다는 걸 말이다. 권제 외에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을 정도로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사내라고 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이가 자신에게 이렇게 한없이 숙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본래 계획을 좀 변경했다.
그도 향후 자신의 계획안에 포함하기로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헌터사무국은 못 믿더라도 사무총장님은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황의 말에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황 또한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는 존중해야 할 인물이니 말이다.
사무총장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커피를 들어다. 다 식어버렸지만, 그 맛이 어느 때보다도 좋다. 그때 그의 기감으로 이상한 게 느껴졌다. 제황의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마나의 기파가 순식간에 그와 제황을 감쌌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를 바라보며 제황이 말했다.
“주변으로 말이 퍼지지 않도록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절대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황의 말에 사무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후로 흘러나오는 제황의 말에 사무총장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 말이 끝나자 사무총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최소 3년 안으로 세 개의 차원이 하나가 될 겁니다. 단순히 세 개 차원의 종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지각변동이 동반될 겁니다. 수천만..아니 수억이 죽겠지요.”
“상상하기도 싫군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백린이라는 자가...”
“예. 그는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다크어스 어딘가에 있을 차원분리장치를 말이죠. 그가 차원분리장치를 찾으면 저는 그곳으로 가서 그와 함께 차원분리장치를 다시 활성화시킬 겁니다. 그러면 더이상 세 개의 차원에 게이트 같은 건 나타나지 않겠지요.”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몬스터가 없다는 말입니까?”
“이미 지구로 와서 지구에 정착한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없을 겁니다.”
제황의 대답에 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비밀이라 하신 거군요. 몬스터의 등장과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기 좋아하는 누군가 들은 무척 싫어할 계획일 테니 말입니다.”
“예.”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던 마나석 산업에 엄청난 타격이 있을 것이다. 기존 지구에 몬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나석 가격이 폭등할 것이다. 차라리 세 개의 차원이 하나로 합쳐져서 다시금 60년전 대융합시대와 같이 피터지게 싸우는 게 더 좋다고 할 이들이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며 말이다.
그렇지만 백린이 말한 다크어스의 몬스터는 현재로서는 핵을 제외하고는 답이 없다. 제황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황의 몸이 수십 개가 아닌 이상 그것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다.
“다크어스로 가셔서 차원분리장치를 다시 활성화...”
제황의 말을 복기하던 그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그 차원분리장치를 다시 활성화시키면 제황님은 돌아오실 수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제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제가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린이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다는 건 밝혀서는 안 될 이야기다.
그러나 사무총장은 제황의 말을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해버렸다.
‘이 친구···. 지금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아들뻘 되는 제황이다. 세계최강이라는 ... 10티어로 평가받던 오오가무시를 한방에 침묵시킨 절대자라는 이면에는 갓 20대 중반의 젊디젊은 청년이 있을 뿐이다. 솔직히 이 젊은이에게는 세 개의 차원을 분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합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세계 각국과 협력하여 그 날을 대비하고 세계 최강자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살 수 있다.
물론 엄청난 희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신화가 될 것이다.
지구 최강자로써 신으로서 떠받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명보다는 자신을 희생해 몬스터를 지구에서 쫓아내는 길을 택한 것이다. 몬스터만이 가득하다는 다크어스에 홀로 남을 각오를 하고 말이다.
“제황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사무총장이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몇 번이고 굽실거리던 허리지만 지금 그가 고개를 숙이는 의미는 이전과는 달랐다.
그것은 진정 마음속으로 감복해버린 이에게 하는 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