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배경싸움-1
#1
헌터사무국 빌런체포조 3조 조장 이진현은 현 상황에서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감히 헌터사무국의 헌터를 앞에 두고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다?
그것도 헌터가? 곁눈질로 바라보니 몇몇이 아직도 상황을 촬영 하고 있다.
‘제길’
카메라는 물론이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체포조 체면에 꼬리를 말 수도 없다.
“흠흠, 우리는 천천히 검문하고 있을 테니 어디 어떤 놈인지 한 번 불러봐라.”
이진현은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제황이 피식 웃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의 두 조원들을 데리고 사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2
뜨르르륵...
-여보세요.
한껏 목소리를 가다듬은 중년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십니까.”
-음, 죄송하지만 혹 누구신지...
스마트폰의 적힌 생소한 번호에 당황했으리라. 지금 제황에게 누군지 묻고 있는 남성의 위치는 상대를 알 수 없는 전화 따위를 안 받는 게 상식인 인물이니까. 아니 애초에 그의 번호는 아무나 알 수 있는 그런 번호가 아니다.
“얼마 전에 제게 명함을 주셨죠. 무련천가의 천제황입니다.”
제황의 입에서 천제황 세 글짜가 나오는 순간 나름 차분하게 가다듬은 듯했던 상대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수화기를 울린다.
-궁신님!
목소리에서조차 감격이 묻어난다.
“예. 전화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전화주신 것만으로도...
그가 크게 외쳤다. 마치 로또에라도 당첨된 것 같은 목소리다. 하긴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 제황이 전화한 번호는 말 그대로 그와 중간을 거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핫라인인 것이다. 세계 최강의 10성 헌터와 곧바로 대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받은 것이다.
그의 뜨거운 반응에 제황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는 전화번호를 노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충동적으로 전화 한 것이었는데 상대가 저렇게 감격을 하니 아무리 감각이 무딘 제황도 조금은 미안해졌다. 그러나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지금은 깨려고 전화한 것이다.
“후우, 사실 지금 제가 전화를 드린 건 얼마 전 제게 주고 가신 헌터라이센스 카드에 문제로 제가 좀 곤란해 졌습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당황하는 사무총장의 목소리... 제황은 간략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제황의 설명을 다 들은 그가 땅이 꺼지는 한숨과 내쉬며 말했다.
-허, 이럴 수가...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군요. 사실 세계헌터사무국과 사전에 이야기는 마쳤지만 카드가 의외로 빨리 제작되어 버려서 궁신님께 그것을 얼른 드린다는 욕심에... 면목이 없습니다. 헌터라이센스가 그렇게 잘 쓰이지는 않는 물건이니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흠, 역시 그렇군요.”
그의 순순한 사과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헌터라이센스는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지갑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무총장의 ‘설마’ 하는 생각이 발등을 찍은 것이다.
“아무튼 좀 난처한 지경입니다. 제가 이들을 앞에 두고 저를 증명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도 좀 우습지 않습니까.”
-지, 지당하십니다. 제가...제가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아니 그 체포조 놈들을...먼저 전화로 !
공사가 다망하신 신임사무총장이지만 지금 그에게 전화를 한 궁신은 지금의 그가 있게 해준 인물이었다. 제황은 모르겠지만 그는 친무적성 성향의 인물로 철저히 권제와 제황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초점을 둔 인사조건으로 지금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제황은 거부의 뜻을 비췄다.
“아닙니다. 행동이 좀 과격하기는 했지만 빌런을 체포하는 공무를 수행하는 중이었으니 그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 역시... 그 능력만큼... 인품도...
찬탄하는 사무총장... 그렇지만 제황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영 제 말이 먹히지는 않는군요. 카드를 주신 사무총장님이 오셔서 직.접 해명해 주셔야 겠습니다.”
제황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챈 그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30분... 아니! 2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군기가 바짝 든 듯한 사무총장의 목소리를 끝으로 위치알림앱으로 현위치를 전송한 제황은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조금 짓궂은 장난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꽤 볼만하리라.
그때... 제황의 귀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가슴이 너무 아파.”
“다리가...”
체포조에 휘말려 다친 이들의 신음소리다.
구급차를 불렀다고는 하지만 심상치 않게 다친 이들이 보이기에 제황이 궁기에게 말했다.
-궁기 이들 좀 치료해줘.
-흠? 왜?
굳이 치유계열 스킬이 있음에도 왜 자신을 찾냐는 눈치다.
-부탁할게. 나보다는 네가 더 빠르잖아.
거리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앉아 제황을 바라보던 궁기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황이 어깨를 으쓱하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심술궂은 표정과 함께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날리며 누워있는 사람들을 향해 또각또각 걸어간다.
“이런...”
제황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채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서히 느껴진다.
궁기가 몸에 걸어뒀던 존재감을 지우는 술법을 풀어버렸다. 문제는 술법을 완전히 풀어버렸다는 것. 제황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예 여과장치를 빼버렸다. 그러자 장내에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억...”
궁기를 군중들을 향해 걸어가자 발견한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홀린 눈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담긴 단 하나의 공통된 감정은 오직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뿐이다.
궁기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걸어가 쓰러져 있는 이들을 가볍게 한 번씩 건드려 주었다. 그녀가 건드릴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신의 은총을 받은 양 넋을 놓았다.
“어엇... 내 다리가...”
“팔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신음하던 그들은 그녀의 손길이 스치는 순간 그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지금 자신들이 상처가 나은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 아무것도 느끼지 것일까 고통이라는 감각의 혼동마저 온다.
궁기는 남자들에게 두들겨 맞아 머리가 터졌던 여자빌런까지 깨끗이 치료해 버렸다. 그리고는 도도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제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위 모든 사람들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미안하다.
제황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나름 꿍꿍이를 가지고 부탁을 한 것인데 그것을 알아챈 궁기가 나름 행동으로 그 꿍꿍이에 답해 줬다.
‘날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게 하지 마.’
완전히 힘을 회복한 궁기는 확실히 ‘착한 신’ 은 아니었다.
과거 고사에 나오는 나쁜 놈은 선물을 주고 좋은 놈은 코를 뜯어가 버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꽤 개성 넘치는 신이 분명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개성 넘치는 신’ 이라고 표현한 것은 솔직히 궁기의 눈치를 보면서 탄생시킨 매우 순화된 표현이었다.
궁기는 다시금 자신이 원래 앉아 있던 밴치로 걸어가 사뿐히 걸터앉았다. 마치 원래 이곳이 그녀의 자리였다는 듯...
“난감하군.”
솔직히 말하면 조금 욕심을 부렸다.
그녀가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졌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궁기는 자신 외의 인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와 상관없는 인간은 동등한 인격체로조차 취급하지 않았다.
#3
사람들을 검문하던 두 체포조원도 미녀의 출현에 하던 일을 멈춘 채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자리에 앉은 궁기가 자신의 존재감을 조절하자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눈을 껌뻑이며 그녀를 바라본다.
여자치고는 그리 작지 않은 키를 지닌 그녀의 매력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에서는 묘한 색기가 느껴진다. 도도한 그 모습에는 여왕과 같은 위엄을... 그러면서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그 미소는 첫사랑을 하는 소녀의 수줍음을 닮았다.
게다가 은연 중 느껴지는 가공되지 않은 야생의 광포함은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그 모습 자체가 천의 마력을 지닌 미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미녀가 저 수상쩍은 녀석의 연인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서로 눈빛만으로 통하는 듯 말이다.
둘의 눈에 질투의 빛이 어렸다. 아니 질투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어떻게 해보고 싶은 음험한 마음까지 비친다.
“큭, 빌어먹을 저렇게 예쁜 년이....”
“남에 손때 묻은 미녀라지만... 그년 참...”
“나중에 조장님이 저 자식을 깨버리면 그걸 핑계로 잡아가 볼까?”
“야, 한번 해볼 만 한데?”
음담패설을 넘어 음모를 꾸미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둘의 뒤로 조용히 다가온 조장 이진현이 둘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이리와 봐.”
“예! 형님”
그의 부름에 둘이 조장 이진현에게 바싹 다가섰다.
이 둘은 이진현의 수족과 같은 이들이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 새끼 아무래도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이진현도 여인의 미모에 혹했지만 곧 냉정한 이성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냉정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는 제황이 고작해야 어디 꽤 큰 클랜의 유망주나 혹은 클랜마스터의 자식 정도나 될 거라고 짐작 했었다. 그 자신도 이쪽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기에 알고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직감은 제황이 그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외치고 있다.
클랜마스터 정도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에 경우 그보다 높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의 말에 둘 중 말쑥한 녀석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이야말로 진짜 다이아몬드 수저시면서...”
다른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자신들도 지금 조장의 밑에 배속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렸던가.
미래의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 줄 그들의 조장은 정말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그 어떤 집안에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배경을 지녔다.
“맞아요. 형님이야 솔직히 사무국 스펙 쌓느라 체포조 따위에서 썩는 거지 옛날 같았으면 바로 지부장 자리 하나 꿰 차야 정상이죠죠.”
“오늘만 해도 고작 체포 출동 두 번째이신데 3성 헌터 중에서도 수위권인 한연수를 붙잡으셨잖습니까. 진짜...형님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 무적.. 흠흠...”
그는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이 튀어나오려 하자 그냥 얼버무렸다.
만약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무적성이 눈치가 아니었다면 이런 한직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보여주기 식 스펙은 필수가 되었다.
이진현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헌터사무국 이사 이상만이었다.
그뿐일까. 그의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대형 헌터전용병원의 주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현재는 야당이 되어 힘이 쪼그라들기는 했지만 무려 5선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장래 목표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고로 본래는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에 전혀 뜻이 없었다. 그런데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다.
이전에야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던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그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요직이 향후 자신의 정치이력에 좋은 한 줄이 될 거라고 판단하고 서둘러 강제각성자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힘으로 사무국 체포조 조장으로 배치될 수 있었다. 물론 명백한 낙하산이지만 그것에 딴지를 걸어 굳이 명을 재촉할 이는 사무국 안에 없었다.
“감이 좋지 않아.”
이진현은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일단 헌터라고 했으니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이사인 아버지라면 자신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잠시 통화연결음이 있은 후 그의 아버지인 이상만이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