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28화 (228/301)

# 228

고독-2

#1

제황은 궁기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쳇”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가끔은 궁기에게도 숨기고 싶은 모습들이 있다.

폭발 속에 죽어가던 그들의 원망 어린 눈···. 대부분 약에 취해 광기에 물들어 있었지만 몇몇의 눈은 절망과 슬픔도 머금고 있었다. 분명 세뇌되다시피 한 충성심만은 아니었으리라. 약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인 건 삶에 대한 욕망이었다. 물론 그들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이미 잘 안다. 테러와 살인만을 일삼는 빌런들... 아마 제황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약자들 위에 군림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살았을 것이다.

사실 처음 계획은 압둘후세인을 저격함으로 일을 깔끔히 끝내려 했었다.

문제는 압둘후세인을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본인 또한 강력한 7성의 은신계열 헌터임과 동시에 분장한 그림자들을 곳곳에 배치해 제황의 눈을 가렸다. 게다가 압둘후세인놈이 자신의 친위대를 자살폭탄으로 손쉽게 사용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압둘후세인은 친위대를 모조리 폭사시킨 후 자신만 도망치려 했던 것 같다.

물론 꼬리를 자르고 사라지려던 그의 계획은 제황의 화살받이가 되는 것으로 무산되었지만 무려 삼천에 이르는 이의 죽음은 제황에게 꽤 충격이었다. 그것이 제황이 그의 대한 비난여론에 대해 반박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리고 제황은 그것을 핑계로 잠시 휴식기를 가지기로 했다.

가끔은 전투에서 동떨어진 삶도 즐겨야 한다는 권제의 조언에 따랐다.

내친김에 한동안은 레이드를 끊을 생각이다. 긴급요청으로 들어왔던 9티어몬스터는 대부분 처리한 상태다. 아직 많은 9티어 몬스터가 세계 곳곳에 있었지만, 그것들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다.

무련천가는 아직도 하루가 멀다하고 그것들에 대한 레이드 요청이 쇄도하는 상황이지만 그건 단지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위한 레이드 요청이니만큼 적당히 무시하거나 간을 봐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몸이 단 그들이 세계헌터사무국과 각 국가들을 압박할 테니까.

아닌게아니라 각국의 유명인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무적성을 방문하고 있다.

제발 제황을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온갖 선물을 싸 들고 찾아오지만, 그들은 이루미의 몫이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

간식들을 모두 먹어치운 궁기는 턱을 괴고 앉아 제황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손님들이 꾸준히 들어왔지만 그들은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둘을 인식하지 못했다.

제황이야 언론에 워낙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아 민얼굴을 모른다고 해도 궁기는 스치듯 바라봐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초미녀이기에 관심을 안 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궁기는 존재감을 흐리는 술법으로 그들의 눈을 가려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제집을 덮은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부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궁기의 은근한 눈빛이 자꾸 부담스럽다.

“산책이나 좀 하자.”

“흐응. 좋아.”

카페의 마스터에게 양해를 구한 뒤 거리로 나온 둘은 가만히 걷기 시작했다.

제황의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어 걷는 궁기다.

“정말 가끔 이렇게 나오는 것도 좋은 것 같아.”

“그래.”

대융합이 나쁜 것만 인류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화석연료와 원자력은 인류의 역사책으로 사라졌다. 화석연료는 그것을 대체할 마나석의 등장으로 그리고 원자력은 몬스터의 습격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거나 폭발하는 문제로 인해 빠르게 정리되었다. 게다가 미세먼지도 거의 사라져 버려 공기는 항상 맑고 깨끗하다.

그리고 궁기와 함께면 사람이 많은 거리도 마음껏 걸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지는 느낌이다.

거리를 걷다가 다시 카페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을 때다.

거리 저편에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춘 제황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도망치는 한 중년의 여자와 그녀를 쫓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보인다.

“비켜!”

“모두 비키라고!”

“으아앗!”

길을 걷던 행인들이 쌍욕을 하며 달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물러난다.

여자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달리는 중인데 세 남자는 사람들을 마구 밀치며 여자를 쫓고 있다. 그들에게 밀쳐진 이들이 밀려나거나 땅에 쓰러지는데도 그들은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여자의 뒤를 쫓았다. 요리조리 도망치던 여자가 뒤를 힐끔 바라보고는 외쳤다.

“멍청한 새끼들아! 민폐 그만 끼치고 포기해!”

“빌어먹을 년이!”

앞서 달리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조롱하듯 외치자 선두에 선 남자가 욕지거리하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꺄악! 총이야!”

“도망쳐!”

아무리 몬스터로 인해 각종 화기와 냉병 기가 익숙해졌다고 해도 그것을 단순히 꺼내느냐 지금처럼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꺼내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남자의 품에서 나온 총에 사람들이 놀라 도망치고 그 와중에 또다시 사람들이 다쳐나갔다.

“야이! 또라이들아! 어디서 총을 꺼내 들어!”

“저년이 진짜!”

여자의 말에 남자는 여자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타탕! 탕!

“쳇! 위험하게!”

그녀는 총알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도망치면 그 총알이 애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품에서 꺼낸 작은 원반으로 총알들을 쳐내 버렸다. 공격을 막기 위해 그녀가 멈춰 서자 두 남자가 각자의 허리에서 묵직한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이것들이 정말 해보자는 건가!”

화가 난 그녀가 손에 든 원반을 그들을 향해 뻗었다. 그러자 원반의 주위로 공기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셋의 표정이 굳어진다.

“빌어먹을! 민간인들 때문에 참는다.”

그러나 힘을 모으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힘을 거뒀다. 여기서 헌터의 힘을 쓰게 되면 죄 없는 민간인들이 휘말리게 된다.

“흥! 허세는!”

방금 자신들이 크게 위험할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그녀에게 접근했다.

“3성 빌런 한연수! 너를 헌터법에 의거 긴급체포한다!”

“웃기고 있네. 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고!”

“조용히 지낸다고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난 최소한 민간인들 있는 곳에서 총질은 하지 않았어. 젠장...애들 전부 외국으로 나가더니 어떻게 함량미달 체포조 애들만 남아 가지고...”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원반을 품에 넣고는 두 손을 들었다.

반항하기보다 얌전히 체포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퍼억!

“아악!”

그러나 그들은 순순히 체포할 생각이 없는지 대뜸 삼단봉을 휘둘렀다.

머리를 두들겨 맞은 여자가 땅에 엎어지고 그들은 그녀의 두 팔을 뒤로 한 채 각성자 용 수갑을 채웠다.

“무슨 빌런 잡는 놈들이 빌런 보다 더해.”

“쉿! 말조심해. 헌터사무국 애들은 헌터법 같은 거 무시한다고...”

“아니 씨발! 저게 말이 돼?”

군중들의 목소리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셋 중 리더로 보이는 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모두 동작그만! 빌런의 잔당이 있을 수 있으니 모두 검문검색에 들어간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자 가뜩이나 총기발사로 성난 군중들이 모두 한마디씩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야! 헌터 사무국이면 다냐!”

“저것들 빌런 아니야?”

“뭐래?! 야 찍어 찍어!”

몇몇이 스마트폰을 들고 그들을 촬영하려고 하자 리더는 한참 촬영 중인 남자 하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으악!”

복부를 얻어맞은 남자가 땅을 구른다. 그는 사람을 친 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지 바닥에 떨어진 폰을 와작 부숴버렸다.

“더 찍는 놈들 있으면 이 꼴 날 줄 알아!”

폰을 부숴버린 그의 으름장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일반 헌터가 민간인을 폭행하면 중죄지만 저들은 국가와 계약한 사무국의 체포조였다.

게다가 요즘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은 무적성의 위상에 편승해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형편이다. 어쨌건 권제는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수석원로니까 말이다.

“이봐요! 다친 사람들 옮기게 해줘요!”

넘어지거나 사람들에게 밟혀 다친 이들을 돌보던 한 남자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검문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사람들이 다시금 웅성거리자 남자는 바닥을 향해 삼단봉을 내리쳤다.

쾅!

“조용히 해! 이 빌런년이랑 같은 꼴 되기 싫으면! 모두 신분증 꺼내고 줄서! 신분 확인만 끝나면 보내준다!”

그가 삼단봉으로 가리킨 중년여자는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머리에 발을 올린 채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그리고 한편에서 궁기와 그 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되도록 지금의 이 데이트를 깨기는 싫었다. 그러나 저들은 한도를 넘었다. 제황이 궁기를 힐끔 바라보자 피식 웃은 궁기가 손을 한번 휙 돌렸다. 그러자 둘을 감싸고 있던 술법이 사라졌다.

제황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리더가 다가오는 제황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너 이 새끼! 줄 서라는 말 안 들려!”

그러나 제황이 지시에 따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대뜸 제황의 어깨를 향해 삼단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인상을 굳힌 제황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버릇없군.”

“엇! 뭐야!”

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완력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느낀 그다.

“놔! 놔라!”

“좋을대로...”

제황이 순순히 손을 놓아주자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시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너 뭐야!”

“헌터다.”

오늘 말이 곱지 않으니 제황의 대답 또한 곱지 않다.

“하? 헌터셨어? 어깨에 힘 좀 들어갔나? 감히 우리 일을 방해하다니! 헌터 라이센스 정지 당하고 싶어?”

그는 뒤에 서 있는 다른 동료들을 돌아보며 비아냥댔다. 흔히 이런 부류가 있다. 헌터라고 하면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니 자신이 뭔가라도 된 듯이 똥오줌 못 가리고 여기저기 끼어드는 인간이다.

“너! 라이센스 내놔.”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만약 그가 제황의 얼굴을 알아봤다면 이렇게 꼿꼿이 서 있지도 못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제황의 맨얼굴을 아는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유명하기는 하지만 언론이나 방송 따위에는 출현하지도 않고 그의 정보는 모든 것이 특급기밀로 취급된다.

“휴우”

제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굳이 본래 신분을 꺼내기는 싫지만, 이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제황이 지갑에서 헌터라이센스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제황의 헌터라이센스를 받아든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그가 알고 있는 헌터라이센스와 다르다. 보통 헌터라이센스는 투명한 바탕에 홀로그램으로 상대의 기본정보와 검은색으로 별의 개수가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받아든 헌터라이센스는 그냥 검은색 이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전면에 커다란 황금색 별 하나와 헌터 고유번호만이 찍혀 있다. 그가 조금만 눈썰미가 있었다면 전면에 음각된 10성이라는 글씨를 발견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그 정도의 눈치는 없었다.

“장난쳐?!”

그는 제황의 헌터고유번호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카드를 제황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제황의 가슴에 부딪힌 카드가 바닥에 떨어진다.

“후우...”

그가 카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자 제황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예전의 라이센스 카드를 가지고 있는게 나을 뻔했다.

지금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는 저놈이 집어던진 카드는 저번 사건으로 새롭게 교체된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신임 사무국장이 무적성으로 직접 찾아와 작은 선물이라며 준 제황만을 위한 특별한 라이센스 카드였다.

세계최초의 10성헌터를 위해 만들었다며 굽신거리며 제발 써주십사 하길래 받은건데 이런 불편한 점이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지갑에서 명함 하나와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 제황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카드 준 놈 좀 부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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