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22화 (222/301)

# 222

평범하지 않은 일상-1

#1

땅을 지글지글 볶아대는 폭염이 모두를 허덕이게 만드는 여름이라는 계절이 왔다.

“허억, 허억...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게... 허억... 이런 말이었...군!”

토르는 한국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대해 소개할 때 뚜렷한 사계절 어쩌고 하는지 이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우스웠다. 얼마나 자랑할 게 없어서 사계절을 자랑한단 말인가.

외국이라고 사계절이 없겠는가. 길이의 차이만 있을 뿐 사계절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이제 훈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계절이 완연한 여름이 되자 그는 왜 한국인이 뚜렷한 사계절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쌀쌀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밤낮으로 찜통이 되어 버렸다. 계절의 차이가 정말 엄청나다.

“힘들면 무게를 좀 줄이시죠.”

“허억허억... 그럴 수는 ... 허억... 없죠.”

숨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채 가볍게 뛰고 있는 제황의 옆으로 숨이 턱밑에 닿은 토르가 두 발을 질질 끌며 뛰고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으아아아!”

옆에서 뛰던 제황이 속도를 높여 그를 추월하자 토르는 비명과 같은 기합을 지르며 두 발에 힘을 주고 그를 쫓기 시작했다. 단순한 조깅이라면 토르는 일 년 내내 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뛰고 있는 곳이 거의 경사 60도에 달하는 절벽이라는 것과 그의 몸에 걸치고 있는 훈련용 무게장갑 때문이다.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디디는 바위는 미끄럽기 그지없다.

입고 있는 장갑은 무려 400kg이다. 제황과 같은 무게... 엘어스에서만 나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이 무게장갑은 오로지 무게만을 위해 태어난 초합금이었다. 문제는 열전도율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내리쬐는 열기를 모조리 착용자에게 전해준다는 것. 권제의 표현으로는 체력단련뿐만 아니라 인내심까지 길러주는 아주 효과적인 장비라고 하지만 입는 처지에서는 저주가 걸린 물건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굳이 제황님께서 속도를 맞춰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황의 앞서 뛰고 있는 이루미가 토르를 힐끔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녀는 토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치 덕분에 제황의 훈련에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본래대로라면 그녀 자신을 훨씬 앞질러 달리고 있어야 할 제황이 토르의 속도에 어느 정도 맞춰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장갑은 200kg 밖에 되지 않는다.

“둘 다 귀엽잖아요.”

공대원들은 모두 평범한 지옥훈련을 신청했지만, 토르는 제황과 함께 훈련을 받기를 원했다. 물론 귀찮은 것이 싫은 제황은 그 요청을 거절하려 했지만, 토르는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처음 봤을 때의 거만함과는 다르게 토르는 의외로 훈련충이었다. 만약 자신이 한 번이라도 훈련 중 포기를 한다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했고 그날 이후로 토르는 제황과 똑같은 입장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뒤쪽에서 헐떡이면서 뛰어오고 있는 엠페러가 똑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니 오기로라도 포기한다는 말은 안한다. 산 정상을 돌아 다시금 내려오기 시작하자 토르와 엠페러가 처음으로 제황을 앞질렀다.

“우와아악!”

“크헉!”

요란한 소음과 함께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데 그래도 나름 탱커라고 벌떡 일어나 또 뛰기를 반복한다. 이마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잘도 따라온다. 괜히 세계랭커가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제황을 발 끝에 속도를 높였다.

“사...살려!”

깊고 깊은 골짜기로 토르와 엠페러의 비명소리가 구슬프게 울리기를 한시간... 구르다시피 내려온 그들이 무적성의 대광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도착 커억! 커억!”

토르가 먼저 무릎을 붙잡고 있을 때 뒤이어 들어온 엠페러가 바닥에 널브러진다.

비틀비틀 다가간 토르가 엠페러의 어깨를 흔들었다.

“헉헉, 좀 더 뛰어야지.”

“Enough is enough! 쿨럭쿨럭...” (충분하니까 그만해!)

구르다가 번역기도 어디로 날아갔는지 엠페러가 마른기침을 하며 영어로 외쳤다.

철컹...철컹..

무게갑옷을 벗은 제황은 온몸에 송골송골 솟아오른 땀을 이루미가 건넨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오늘은 고생하셨으니 특별히 점심시간 이후 집합합니다. 대신 오늘은 대련 강도를 높여드리죠. 두 분과 저 2:1로 대련합니다.”

“omg!”

“으으, 괴물”

굳이 번역기가 없어도 제황의 말을 알아듣는지 엠페러와 토르가 질렸다는 얼굴로 제황을 바라봤다. 쉬는 시간을 늘려준 건 고맙지만 2:1 대련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이전까지는 엠페러의 피닉스 공격대나 토르의 버서커 공격대에서 지원자 5명씩을 받아 돌아가면서 단체 대련에 임했다.

두 공격대의 대원들은 제황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이루미라는 동양미인과 손을 섞을 생각에 너도나도 참가신청을 했지만, 막상 그들의 상대가 제황 혼자라고 하자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제황도 그들 전부를 맨손으로 상대할 수는 없기에 본격적으로 활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황이 주무기를 든 대련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악몽이 펼쳐졌다. 머릿속에 동양미인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몇 번 제황과 손을 섞은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대련을 쉬쉬하기 시작했다.

두 단체의 장인 엠페러와 토르는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참가 중이지만 한계를 초월한 6성 이상의 헌터들이 나누는 몸의 대화는 항시 최하 5성 이상의 힐러가 보조해야 할만큼 살벌하다. 그리고 그런 대련을 이제 엠페러와 토르 둘만을 상대로 해준다니 둘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제황을 바라볼 뿐이다.

“포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엠페러스님이 먼저 떠나셨죠.”

엠페러스는 본래 정한 날짜가 끝나고 이틀 후 본국으로 향했다.

마지막 날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그녀는 토르나 엠페러와 같이 레이드 우선권 따위 보다는 그냥 10성 헌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실물로 보고 싶었다고 한다. 뭐 딴에는 미모를 이용해 좀 친해져볼까하고 접근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세계 전랭킹 1위와 3위인 토르와 엠페러를 개같이 굴리는 것을 보더니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유럽으로 떠나 버렸다..

“아닙니다!”

오기와 독기 섞인 눈으로 답하는 토르를 흐뭇하게 바라본 제황은 그들과 헤어져 새롭게 배정된 숙소로 향했다. 저들과의 훈련은 제황에게도 꽤 도움이 되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몬스터 레이드만을 해서 그런지 대인전투 감각이 많이 죽었지만 베이스는 변하지 않는지 여럿 뭉쳐 놓으면 꽤 위협이 돼서 다대일 근접전 대비에 아주 좋은 연습이 되었다.

그들이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엠페러나 토르와는 꽤 정을 쌓았는데 훈련을 지속하며 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토르의 경우에 그가 원거리딜러를 혐오하는 이유가 과거 하이랜더 공격대의 소속이었을 때 앙숙처럼 지내던 원거리딜러장이 있었는데 그가 레이드에서 돌발상황을 이유로 함부로 빠져버리는 바람에 그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이가 그를 구하기 위해 죽은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엠페러와는 배울 것도 도움받을 것도 많은 그런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는 제황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 기간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던 강자였다.

그렇기에 제황에게 몬스터와의 싸움 외에 세계 랭킹 1위가 신경 써야 하는 것들에 대해 꼼꼼히 가르쳐 줬으며 무적성조차 가지지 못한 세계구급의 넓은 인맥을 제황과 연결시켜 줬다.

그들이 떠나는 날 제황은 직접 공항으로 나가 그들을 배웅했다.

향후 9티어 몬스터 레이드를 함께 레이드 할 것을 약속하며 말이다.

#2

무적성으로 돌아온 후 제황은 홀로 걸었다.

약 한 달간 꽤 시끌벅적하게 훈련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마음 한구석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걸어갔다.

나길환의 권유에 따라 새롭게 옮긴 곳은 권제가 머무는 궁이었는데 이전에 머물던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물론 궁 안도 한산했다. 제황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무적성이기에 근래 바빠진 권제가 없는 궁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뚜벅뚜벅···.

제황은 지하에 있는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전에는 개인 수련장으로 가려면 약 5분가량은 걸어야 했지만 이곳에는 이전에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좋은 수련장까지 지하에 함께 붙어 있어 이동이 편리하다.

수련장 앞에 도착한 제황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개인수련장의 보안장치를 차근차근 해지한 제황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다시금 철저히 문을 잠근 제황이 시선을 돌려 수련장 가운데를 바라봤다.

제황의 시야로 개인수련장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바닥에서 약 1미터가량 공중에 떠서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의 몸 주위로는 거대한 붉은 마나가 마치 그녀를 감싸듯 휘돌고 있다. 심장이 맥동하듯 확장과 축소를 반복하던 붉은 기운 속에 여인은 마치 편안하다는 듯 입가에 작은 미소마저 짓고 있다.

약 한 달간 제황에게 공허함을 선사했던 여인이다.

누군가를 머릿속에 담고 산다는 건 의외로 꽤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그리고 익숙해진 그것이 단절되었을 때 더욱 큰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붉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너울거리는 가운데 그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제황마저도 한순간 넋을 잃었다. 마치 마력과도 같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있던 제황은 기운이 어느 순간 그녀의 몸으로 모조리 흡수되는 것을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마침내 끝이 났다.

붉은 기운이 모두 흡수되고 이윽고 바닥에 내려앉은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 눈은 눈부시도록 맑았다. 아니 단순히 맑은 것이 아니다. 너무나 깊고 깊어 그 안에 우주를 품은 듯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하나로 연결하는 보석과도 같았다.

눈을 뜬 미녀가 제황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그리운 미소다.

제황은 문득 뭔가 멋진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튀어 나온 건 쌀쌀맞은 한마디다.

“끝났어?”

“응.”

활기차게 대답한 미녀가 제황에게 한걸음에 다가와 안기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바라보는 제황은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다.

“옷 좀...”

“아!”

제황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하자 그제야 자신의 꼴을 눈치챈 미녀가 손을 공중으로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너울거리는 천들이 그녀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청초하고 화려한 붉은 드레스로 변한다.

“이제 주인 품 좀 맛볼까?”

덥썩...

제황의 품에 궁기가 안겨들었다.

“오래 걸렸네.”

무려 삼 주가 걸렸다. 제황의 말에 궁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그래도 이제는 다 찾았어.”

“다행이다.”

“응.”

“후우...”

제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오래 걸렸다. 무려 삼 주... 오오가무시의 10티어 마나석은 9티어 마나석과는 또 달랐다. 9티어 마나석이 2중으로 되어 있었다면 10티어마나석은 마치 지금 보고 있는 궁기의 눈처럼 작은 우주를 품고 있었다.

그것을 흡수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자 제황은 행여 일이 잘못되었을까 조마조마했다. 궁기의 대한 믿음과 중간에 건드리면 위험할 것을 알기에 지금까지 참고 지켜봤다. 그리고 지금의 궁기는 온몸에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아니 안겨든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증유의 거력이 느껴진다.

“이제 반신인 건가?”

“그래. 그리고...”

“그리고?”

“이제 난 인간여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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