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20화 (220/301)

# 220

혼자 덤비게 -3

#1

상대를 소개할 때는 그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고작 6성이란다.

물론 6성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은 6성에서 7성으로만 구성된 세계레이드 랭킹 3위의 버서커공격대였다.

아무리 헌터라는 게 체급으로 구분하지 않는다지만 저 가느다란 팔로 자신들의 공격 한 번이라도 방어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 정도로 여인은 왜소했다.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기에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한 남자가 나섰다.

같은 6성이라고 소개했지만 용력만큼은 7성에 버금가는 공격대의 유망주다.

무려 신장 2m가 넘는 그는 대련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여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에 들린 기다란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청초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미인이기에 단숨에 끝내기보다는 손맛을 조금 볼 생각에 지저분한 도발을 했다.

후웅!

몬스터 전용으로 제작된 50킬로는 넘을 듯한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든 그가 그것을 자신의 하체에 가져다 대고 까딱거리자 버서커공격대 전원이 폭소를 터뜨렸다.

뭐...그게 실수였다.

아주 큰 실수 말이다.

엠페러가 생각할 때 이 대참사가 벌어진 건 그 도발로 인해 저 미녀의 머릿속에서 자비라는 단어를 지운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무려 10성 헌터 궁신을 대신해서 나온 여자다. 뭔가 감이 확 오지 않던가.

대검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까딱거리던 그 사내는 그 대검과 함께 중간에 달린 그 물건도 대검과 같은 꼴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허리가 작살나며 대기하고 있던 힐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러 응급실로 긴급히 옮겨졌다.

“나도 한 번 붙어보자!”

말릴 틈도 없이 두 번째로 나선 이는 첫 번째 대참사 주인공의 친구였던 것 같은데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한국식 속담을 몸으로 깨우치며 나온지 1분만에 친구 옆자리로 실려 갔다. 무기를 들고 있던 팔이 흉측하게 구겨진 상태로 말이다.

세 번째 나온 이는 이루미에 대한 분석을 어느 정도 끝낸 버서커공격대에서 가장 연장자인 중년사내였다. 앞서 나온 이들처럼 중병기가 아닌 이루미와 비슷한 모양의 대태도를 쓰는 그는 다른 이들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했다면 꽤 날렵한 몸을 자랑하는 이였다.

그는 이루미를 보기와는 다르게 근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헌터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전의 둘이 그런 식으로 날아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 그는 이루미를 속도로 상대하려고 했다.

심판이 이루미에게 속행할 수 있냐고 묻자 이루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세 번째 대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오판이라는 것은 그가 채 다섯 걸음을 떼기도 전에 잔상을 일으키며 눈앞으로 다가온 이루미의 창궁룡검이 그를 그의 무기와 함께 직각으로 꺾어버리는 것으로 증명해 버렸다.

#2

-시시합니다.

처음 공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감히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제황을 지목하는 괘씸죄를 단죄하기 위해 앞서 나선 이루미는 상대의 역량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의 실력을 확인해보자는 심정으로 제황에게 허락을 구한 뒤 나섰다. 아니 솔직히 마음 한편으로는 그동안 제황으로 인해 은연 중 쌓인 스트레스나 풀자는 의미에서 나서기도 했다.

첫 두 명을 처리할 때는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다. 세 번째도 나름 오랜만에 보는 손맛에 즐거웠다. 그러나 네 명이 되자 더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의욕조차 솟지 않는다. 저런 머저리들을 처리하는데 창궁룡검을 사용한 것이 죄스러울 지경이다.

상대는 자신이 가진 힘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머저리들 뿐이다.

저들은 자신을 보며 ‘괴력’ 이니 ‘근력’ 스텟이니 어쩌고 하지만 실상을 까보면 그녀는 그다지 힘을 쓰지 않았다.

단지 상대의 마나를 역이용해 발산하는 창궁신가의 기초 중에 기초를 가볍게 응용했을 따름이다. 조화와 지배에 특화된 창천신공은 제황의 용혈신공처럼 폭발적인 공격력은 없지만 그 다양성은 무궁무진하다.

-몬스터 잘 때려잡는 것 빼고는 머리에 든 것 없는 놈들이다.

-예.

저들이 약해서 한 방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한 것은 저들의 힘을 되돌려 줬을 뿐이고 이 주변에 있는 한심이들은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것 뿐이다. 물론 그들이 못 알아채는 이유는 그 되돌려주는 동작이 작은 손목의 움직임 하나와 함께 창궁룡검에 내제된 창천강기의 묘용이 일으킨 능력이다.

-이런 놈들과 붙는 건 오히려 네 실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 그런데 이제는 끝내기가 애매해졌네요.

본래는 망언을 한 이 머저리들의 대장까지 처리하려 했었다.

그렇지만 어쩌다보니 손속이 너무 심해졌다.

상대는 손님이다. 너무 심한 망신을 줘버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루미도 할 말이 있었다.

적당히 끝낼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두어 명 이기고 저쪽에서 적당히 빼줘야 하는데 연달아 넷이 나와 버리니 그냥 저질러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 머저리들의 대장은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려 무리수를 두려 하고 있다.

우우우우...

공대원 넷이 당했다.

약속대련도 아니니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치욕적이다. 궁신 본인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그의 밑에 있는 부하에게 당했다. 뭐 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무려 10성 헌터라는 이를 대신해 나왔으니 그만큼 강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모두 한 방에 끝났다는 것이다.

그의 숙적(?)인 엠페러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엠페러스는 조롱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가슴 속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멍청한 놈들...”

토르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 자존심에 비례한 만큼 강한 사내였다.

원거리 딜러가 없는 전원 근접딜러와 탱커로 구성된 그의 공격대가 세계 레이드 랭킹 3위에 달한 이유는 어쨌건 그의 공이 가장 컸다.

토르를 감싼 공기가 나지막이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망치에서 얕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히 회전하며 빛난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자 이루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에서 힘을 다썼다는 핑계로 기권을 해서 상대의 체면이라도 좀 챙겨주려고 했는데 또다시 대가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루미가 자세를 잡았다.

상대는 이전에 나온 이들처럼 가볍게 대할 이가 아니다. 이루미는 저 남자를 잘 안다.

그 이명이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천둥의 신인 이 남자는 엠페러나 엠페러스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전천후 스타일이다. 어린 나이에 각성하여 하이랜더 클랜이라는 곳에서 넘치는 지원 속에 제대로 키워졌다.

단순히 아이템이나 빵빵하게 채워주고 레이드에 빼놓지 않고 다니는 게 아니다. 한명의 전사로 클수 있도록 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공대장으로만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천후다. 레이드 클래스는 딜탱커다. 방어력도 좋고 공격력도 좋은데 공격력은 중거리까지 커버 가능하며 번개 속성을 이용한 광역기에도 특출나다.

물론 과거 엠페러에게 졌던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가 탱킹 능력을 뚫지 못했기 때문이지 약 30분간이나 걸린 난전이었다.

“우리 애들이 실수한 것 같군. 사과하지.”

뚜벅뚜벅 걸어 나온 토르가 이루미에게 사과했다.

그녀를 우습게 본 것을 사과한다는 뜻이다. 한 명의 강자로 인지하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나와 한 번 어떤가?”

“저는... 으음...”

물러서려 했지만, 순간 손끝으로 따끔한 뭔가가 느껴지며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토르가 뭔가 수를 쓴 것 같은데 알 수는 없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물러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는것이다.

“알겠습니다.”

토르의 말에 이루미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가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 도발을 당했는데 무련천가의 사무장이기 이전에 무적성의 헌터인 그녀에게 물러선다는 건 배우지 않았다.

‘이 실수는 차후 용서를 빌겠습니다.’

이루미는 자세를 잡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대련 이후 버서커공격대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될 수도 있다. 토르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북유럽 쪽 레이드를 진행할 때 노골적인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내의 단체들이야 상관없지만 해외는 이야기가 다르다.

제황의 입장에서야 별거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 한 남자의 손이 툭하고 올라왔다.

깜짝 놀란 이루미가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제황이 내려다보고 있다.

어느새 그가 곁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공대장이 나오셨으니 이쪽도 성의를 다해야지. 이루미씨 고생했어요.”

“예. 예.”

제황이 뒤쪽으로 손짓을 하자 이루미가 살짝 목례를 한 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서는 이루미의 눈이 떨리고 있다. 그녀의 머릿 속에는 지금 하나의 물음만이 감돈다.

‘어째서?’

그것은 자신을 대신해서 나선 이유에 관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제황이 적당한 시간에 나선 것은 맞다. 그런데 왜...

‘화가 나 계시지?’

그렇다. 지금 제황은 살짝 화가 난 상태다. 다른 이들은 모른다. 제황이 워낙 표정 변화도 없고 감정표현도 하지 않기에 알 수 없지만, 항상 제황만을 주시하는 이루미는 알고 있다. 어깨에 손을 올린 제황의 손에는 약하지만 흉흉한 기파가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파의 대상은 지금 맞은편에 올라온 상대에게 향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이루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토르의 맞은편에 서 있는 제황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황 같은 사람은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화가 나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상대를 짓밟는다.

‘제발 적당히...’

제황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1:1 수련을 하며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뼛속까지 체험했다. 아니 그녀는 제황이 가진 강함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맞은 편에 서 있는 사내가 제발 죽지 않는 선에서 대련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2

-내 사람을 건드렸어.

제황은 봤다. 이루미가 물러서려 했을 때 토르라는 놈의 무기에서 뿜어진 마나가 이루미를 타격하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미세한 공격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식의 암습을 제황은 무척이나 혐오했다.

이것이 실전이라면 이루미의 잘못이다. 실전에서는 죽는 놈이 병신이니까. 그렇지만 이것은 실전이 아닌 대련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루미가 무련천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황은 이루미를 무련천가의 사람이라고 인정했고 받아들였다.

-감히...

-진정해. 너 이러다가 쟤 죽이겠다.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은 [가문의문장] 스킬의 부작용이야.

궁기가 분노한 제황을 진정시켰다.

이것은 최근 만들어진 스킬 가문의문장 스킬의 부작용이다.

가문 소속원들의 활력과 충성심 그리고 능력을 높여주는 이 스킬이 보유한 부작용 아닌 부작용이다.

-안 죽여.

죽이지 않는다면서 살기는 그대로다.

-야. 넌 그 말이 더 무서워.

궁기의 외침을 들으며 제황은 버릇처럼 끼고 다니는 오른손의 슈팅글러브를 풀렀다. 가벼워진 손을 가볍게 물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맞은 편에 선 토르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긴 활을 쓰는 사람이 슈팅글러브를 풀었으니 뭔가 이상했으리라.

-야, 야! 도망가! 얘 지금 너 패 죽이려는 거야! 단숨에 안 끝내겠다는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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