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13화 (213/301)

# 213

밝혀진 진실-2

#1

“후, 몸이 엉망이군.”

백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창궁룡검을 집어 들었다.

아마 신덕이 마지막에 용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이 깊은 구덩이가 그대로 묫자리가 될 뻔했다. 덕분에 그는 지닌바 힘을 다 소모하며 잠이 들었고 그의 마나엔진인 창천신공과 혈맥도 군데군데 손상 되었다.

백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남자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놈이었기에 다행이다. 자신의 말을 너무 잘 믿어주는 것 같아 조금 의아하기는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거지를 보건대, 진실 유무를 판별하는 특별한 능력이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선조님. 괜찮으십니까?

-...

백일기도 마지막 공격을 방어하며 백린의 몸을 보호하느라 진체의 힘을 대부분 소모해 버려 신덕과 같이 잠든 모양이다.

‘선조님이 왜 무련천가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는구나.’

백린은 과거 백일기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후우, 변명이고 핑계일지 모르지만 내가 성산을 배신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무련천가의 힘 때문이었다. 단 일격이기는 하지만 신에 필적하는 힘을 쓸 수 있는 신벌의화살...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여의보주가 내게는 그것이 너무나 큰 유혹이었다.”

막상 겪어보니 정말 욕심이 나는 힘이다.

‘신의 힘... 오오가무시 정도 되는 몬스터를 단 한방에 침묵시킬 정도의 힘이라니...’

백린은 마음속에 잠시 욕심이 일었지만 이내 그것을 단칼에 지워버렸다. 욕심이 난다고 해도 그 흔적을 가슴 속에 터럭이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경고가 울려오는 것 같다. 그런 낌새를 보이는 순간 죽는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건 상대가 말이 통하고 선조 님이 말한 대로 철혈무정의 살인기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제황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제황의 목소리에서 존대가 사라져 있다.

“엘어스의 오크들과는 어떤 관계지?”

“...!”

제황의 반말에 조금 억울한 표정이 된 백린이 뭐라 한마디 하려 하다가 제황의 눈을 힐끔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헬칸이 저스틴포인트에서 저지른 일을 들었다. 만약 그것과 자신을 연관시킨다면 자신의 대답여하에 따라 피곤죽이 될 수도 있었다.

“엔드릴 오크는 미국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뭐 지금은 덕분에 요원해지기는 했지만...”

“미국과 중국?”

“네.”

그 두 나라를 이야기하며 백린의 얼굴이 착잡함이 떠오른다.

“그들이 차원 안정화의 걸림돌인가?”

“차원 안정화라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지구를 위기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큰 나라니까요. 전 세계를 통틀어 미국과 중국만큼 엘어스 공략에 적극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만약 미국이 과거 식민지에 행했던 짓을 엘어스에 가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 지구차원으로 건너온다면 미국뿐만 아니라 온세계에 대참사가 일어날 겁니다.”

“그들이라면?”

“드래곤들이죠.”

백린의 대답에 제황은 12티어라고 말하는 그 드래곤들이 지구에 나타나는 상황을 상상해 봤다. 제황의 생각을 읽었는지 백린이 말을 이었다.

“아마, 장담하는데 인세의 지옥이 펼쳐질 겁니다. 미국은 아마 핵을 다발로 쏟아붓겠죠. 그리고 실패할 겁니다.”

“그렇게 강한 드래곤들이라면 왜 그들이 직접 나서서 차원안정화를 하지 않는 거지?”

제황이 물었다.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이들이라면 차원 안정화는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이다.

그러자 백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들은 별로 상관없다는 주의입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움직이기를 아주 싫어하는 종족이거든요.”

“이해할 수 없군.”

제황의 소감에 백린도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이해하기를 포기한 종족입니다. 그들의 말로는 감히 인간의 잣대로 자신들을 이해하지 말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그냥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빌어먹을 것들이죠.”

백린은 머릿속에서 엘어스를 양분하고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두 드래곤들을 떠올렸다.

하위 종족들에게는 마치 선악의 대척점인 양 행세하고 있지만 실상을 까보면 밑에 애들을 싸움 붙여서 문명을 조율하는 신 노릇에 맛 들인 놈들일 뿐이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일단 몸을 회복한 다음 하던 일을 마저 할 생각입니다.”

“하던 일이라면?”

“다크어스의 차원분리장치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일입니다.”

“흠.”

그때였다. 제황이 가자미눈을 하고서 백린을 쏘아본다.

“정말 그뿐인가?”

“그렇습니다.”

눈이 더 가늘어진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제황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백린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턱!

“크윽!”

그러나 제황의 손은 번개같이 뻗어져 백린의 목을 부여잡았다. 갈고리 같은 그의 손이 숨통을 쥐자 백린은 목뼈가 어긋나는 고통에 신음을 내질렀다.

“장난치나?”

“그게 무슨...”

“일단 거짓의 대가를 받아야지.”

우드드득

“커억...”

목뼈가 반 정도 어긋나 버리자 백린은 손발의 마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기력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간신히 몸만 회복된 상태다.

활을 쓰는 이답게 제황의 손아귀 힘은 상상을 불허한다. 각성하기 전에도 제황의 손힘은 강하기로 소문났었는데 헌터가 되자 손아귀 힘만으로도 웬만한 쇳덩이는 구겨버릴 수준이 되었다.

제황은 백린을 벽에 몰아 세워놓고 주먹으로 백린의 온몸을 천천히 그리고 잘근잘근 다지기 시작했다.

퍽! 퍼퍽! 퍽! 퍽! 퍼퍽!

한대씩 박아넣을 때마다 백린이 기댄 흙벽이 부르르 떨며 무너져 내린다.

“큭...커억..끄윽!”

제황은 치명적인 급소를 제외한 모든 곳을 두들겼다.

우드득...

두들기기를 멈춘 제황이 갈비뼈를 하나하나 붙잡고 역으로 꺾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백린은 이를 악문 채 제황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조차도 마음에 안드는지

제황은 백린의 양다리를 벌리게 한 채 무릎으로 남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급소를 두 발이 공중에 뜰 정도로 찍어 올렸다.

“아아아아악!”

제황이 잡고 있던 목을 놓자 바닥에 쓰러진 백린은 터져버린 것 같은 그곳을 붙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곳이 불타오르는 것 같다.

“일어나.”

“크윽...”

제황의 말에 백린이 비칠비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눈 속에는 고통을 뛰어넘는 분노가 녹아 있다.

"이게 무슨 짓..."

“아직도 장난을 치고 있군.”

으적...

“컥!”

제황의 발이 백린의 허벅지를 강타하자 백린은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어진 짓밟기···. 유독 집중적으로 몸의 중심을 밟아대자 그것을 막아가는 백린의 손이 애처롭다.

백린은 조금 전 제황에 대해 내린 평가를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제발 그만!”

퍼퍽! 퍽! 퍽!

애걸해도 제황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온몸의 뼈를 한바탕 부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백린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장난질은 그만하지?”

“내가 무슨 장난을...”

퍼석! 으드드득...

“커어억!”

제황의 발이 백린의 목을 그대로 밟아 버리자 백린의 눈이 뒤집히며 혀를 내밀었다. 목뼈가 박살난 것...

시체가 되어 버렸다.

백린을 내려다보는 제황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 있다.

-무슨 짓이야!

궁기가 외쳤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류의 존망이 백린에게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이더라도 지구가 위기에서 벗어나고서의 일이다.

그런데 제황은 그런 백린을 죽여버렸다.

#2

잔혹하게 손을 쓴 제황은 미동조차 없이 묵묵히 서 있다.

그의 발밑으로는 온몸이 걸레가 되어 목이 비틀린 백린이 혀를 빼물고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궁기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참이었다.

죽어버린 백린의 시체 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잠시 후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은은한 반투명의 검은 형상이다.

“어떻게 알았지? 비장의 수였는데...”

입으로 보이는 부분이 달싹였다.

“내가 그걸 말할 이유가 있을까?”

“흠, 그래? 그것 참 실체를 탐지하는 스킬이 꽤 고등급인 것 같군.”

“...”

백린의 말에 제황은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사실 제황도 깜빡 속을 뻔했다. 궁기는 신수로써 참과 진실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황은 궁기의 그 능력을 믿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런데 백린의 술법은 그런 궁기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속여버렸다. 바로 그 주체가 거짓이었던 것이다.

-내가 죽인 건 껍데기야.

-뭐...뭣?

깜짝놀라 외치는 궁기를 외면한 채 제황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린의 술법도 다행히 여의보주의 공능(功能)은 넘지 못했다.

그의 심장에 박힌 여의보주가 꿈틀하는 순간 백린의 몸이 껍데기만 남은 듯 투명하게 보였고 제황은 과감하게 그 껍데기를 죽여버렸다.

"왜 죽였지?"

"허깨비를 세워놓는 장난질을 치는 놈과는 할 말이 없는데?"

제황이 으르렁거렸다.

"이렇게 살벌하게 밟아버리는데 무서워서 앞에 나서겠냐."

검은 형상이 궁시렁거렸지만 제황의 굳은 표정을 풀리지 않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백린이 말했다.

“상황이 꽤 더럽게 변했지만 내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야. 믿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구가 위험한 건 변하지 않아.”

비록 껍데기였을 뿐이지만 그 말은 모두 진실이였다.

그러나 타인을 속이는 방법은 굳이 거짓을 말하는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는 거겠지?”

“쳇, 누구나 그런 거 한두 개는 있지 않나?”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위선을 떨 생각은 없다. 맞아.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그리고 이건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맹세컨대 난 파멸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나를 도와줘.”

“어째서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드래곤들이 차원분리장치가 있는 곳은 거대한 탑이며 그 탑에는 침입자를 가로막기 위해 드래곤에 버금가는 몬스터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곳을 뚫고 올라갈 수 자신이 없다.”

백린의 말에 제황이 한참을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제황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차원충돌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길면 일년... 짧으면 당장!”

"확실한가?"

"맹세할 수도 있다."

“그깟...맹세...후우, 좋아. 돕지."

"고맙다."

제황의 대답과 함께 검은 음영이 뚜렷해지더니 이윽고 한 남자가 지면에 내려섰다. 기다란 태도를 등에 맨 그는  제황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주백가의 백린이다.“

백린이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보던 제황도 이윽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다시 한번 장난치면 진짜로 죽여버린다.“

”어련하실까.“

천년을 뛰어넘어 천주백가와 무련천가가 다시금 손을 잡았다.

#3

백린과는 도쿄에서 헤어졌다.

백린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크어스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기에 오히려 다른 이들의 도움은 이제 불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헤어지며 하나의 부탁을 했다.

두두두두두...

수백 아니 수천의 헌터들도 해내지 못한 불가사의한 업적을 이룩한 이제는 명실공히 세계최강의 헌터로 인정받은 제황이지만 돌아오는 헬기 안은 매우 차분했다.

”제황님.“

”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업적을 이룩한 주체인 제황이 입을 꾹 다물고 분위기를 잡고있으니 함부로 기뻐하지도 못하고 모두 제황의 눈치만 보고 있다. 이루미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제황이 입을 열었다.

”이루미님.“

”네.“

”혹시 사람 잘 찾으시나요?“

"사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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