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밝혀진 진실-1
#1
“포격 중지”
-포격을 중지합니다.
이루미의 대답이 있고 잠시 후 자주포 포격이 멈췄다. 제황은 건물들을 뛰어넘으며 백린이 있었던 이제는 건물들이 빼곡히 차지하는 곳이 아닌 말 그대로 돌 부스러기만 가득한 평지가 되어 버린 곳에 내려앉았다.
그 한가운데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면 검은 음영만 보이는 이 구멍은 제황이 마지막에 쏘아낸 비장의 한 수가 만들어놓은 작품이었다. 마치 거대한 싱크홀을 보는 느낌이다.
“흠”
제황은 그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구멍 한가운데 흙먼지 속에 파묻혀 있는 한 남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크윽...”`
남자의 몸은 참담했다. 사지는 이리저리 꺾여 마치 장난기 가득한 거인이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던져버린 모습이다. 입에서는 연신 피가 울컥울컥 흐르는데 그냥 둬도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제황은 들고 있던 비천궁을 무한고에 넣었다.
상대는 더이상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망가졌다.
제황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백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좋군요.”
“그렇네요.”
조금 전까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지만, 하늘은 너무나 청명하고 맑다.
“큭, 우습죠? 서로 원수와 같은 운명인데 실제 대화는 처음 해보는군요. 백린입니다.”
“제황입니다.”
백린이 제황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기쁘지 않은 것 같네요. 가문의 숙원을 이뤘잖습니까.”
“별다른 감흥이 없네요.”
“좀 기뻐해도 좋을 겁니다. 쿨럭”
말을 하던 백린이 피를 토했다.
곧 죽을 것 같다. 그를 내려다보며 제황이 입을 연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후욱...후욱...뭡니까?”
“삼천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삼천교요? 그들이 왜?”
“몰라서 하는 소립니까? 그들은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놈들입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당신의 주술을 봤습니다.”
“아, 왜 그런 놈들에게 힘을 줬냐는 소리군요.”
“네.”
제황의 말에 백린은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은 죽게 생겼는데 상대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야기가 꽤 긴데 아무래도 저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요.”
백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제황의 손이 백린의 심장 부분을 짚는다.
“긴급재생”
제황의 손이 하얗게 빛나고 그의 재생 스킬이 백린의 몸을 따라 돌며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약 1분여의 치료를 한 제황이 손을 떼자 백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려면 끝까지 해주시죠.”
“죽지 않을 만큼입니다.”
대답한 제황이 냉막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얼굴을 찡그린 백린이 팔다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파서 생각이 잘 안 날 것 같은데요?”
“잘나게 해드리죠.”
그 말과 함께 제황이 백린의 부러진 팔을 지그시 밟아 버렸다. 정말 가차 없다.
“아악! 큭, 알겠습니다! 제길. 역시 무련천가 답군요.”
입술을 달싹이며 한차례 욕을 내뱉은 백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미리 말하지만 삼천교는 제가 없었다고 해도 생겨났을 놈들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대융합 초기에는 저도 놈들이 싫었죠. 그렇지만 아무리 밟아도 밟아도 사이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초기에는 그들의 힘이라도 빌려야 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부족했고 불안에 떠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순작용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들이 몬스터와 전쟁으로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때 놈들은 우리의 뒤에서 서서히 그 몸집을 불려 나갔죠. 아차 했을때는 우리도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요.”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융합 초기 때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요. 대융합 초기... 벌써 60년이 흘렀군요.”
그때를 회상하는 듯 백린의 눈이 아련하게 변한다.
“대융합세대신가요?”
“내 나이도 벌써 83살이군요.”
83살이라는 말에 제황은 깜짝 놀랐다. 83살이라면 권제와 거의 같은 나이다.
“제 시간은 대융합 때부터 멈췄죠. 천주백가의 술법입니다. 부럽습니까?”
“별로요.”
“흠, 그런가요? 제가 늙지 않는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내 몸을 해부해보고, 싶어하는 놈들 천지였는데 무련천가는 좀 다른가보군요.”
“그냥, 마저 이야기 하시죠.”
“네. 뭐 이야기가 새버렸네요.”
백린은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수한 얼굴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그리운 친구의 얼굴, 원수의 얼굴, 그를 향해 희망을 구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를 배신했던 이들도 말이다.
“저는 당시 삼천교 교주의 아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음...그러니까 지금 삼천교 교주를 말하는 거죠. 저는 당시 녀석을 너무 믿었습니다. 삼천교의 미친 교리를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 생각하던 놈이죠. 그놈이 광신도와 술법을 이용해 군대를 만든다고 할 때 처단했어야 했는데 놈을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아차 했을 때는 삼천교가 이미 너무 큰 후였고 게다가 당시 친했던 많은 놈들이 그놈에 교리에 빠져서 제게서 등을 돌렸죠. 그들이 미웠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운 겁니까?”
“도왔다라... 도왔다기 보다는 그들을 엘어스로 가도록 유도했죠. 아마 그대로 대한민국 안에 살게 놔뒀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걸요? 놈들은 기껏해야 세력 조금 큰 빌런 정도 아닙니까. 지금 세계에는 그들보다 더 큰 빌런 단체들이 많습니다.”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삼천교는 대한민국에서나 큰 사회문제지 미국이나 아프리카 정도로 나가면 괴상망측한 교리로 무장한 사이비종교국가들이 수두룩했다.
“뭐, 후일 몇 가지 술법을 그들에게 시험해 보기는 했지만,.. 제가 진짜 놈들에게 힘을 주려고 했다면 그것으로 안 끝났을 겁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네.”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그대로 발을 들었다. 이제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목을 밟아버리려는 것. 그러자 깜짝 놀라 눈이 커진 백린이 외쳤다.
“스톱! 스톱! 잠시만!”
그의 말에 제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뭡니까?”
“지금 죽일 겁니까?”
“네.”
“와, 조상님이 무련천가 무섭다 무섭다 하더니 정말 가차 없군요.”
“그게, 유언입니까?”
“아니, 저한테 하나 물었으니 제 말도 좀 들어줘야죠.”
“제가 굳이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들어서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백린이 말을 이었다.
“지구의 운명과 관계된 일이거든요.”
“...”
그의 말에 발을 든 채 잠시 망설이는 제황이다.
지구의 운명이라고 하니 죽이기가 껄끄럽다. 게다가 웬지 지금 그의 말을 들으면 그를 죽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제황이 발을 든 채 고민에 잠기자 조금 떨떠름한 표정의 백린이 말했다.
“그, 고민할 때는 발 좀 내리면 안 될까요?”
단두대를 바라보는 죄수의 눈빛이다.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단숨에 목을 짓밟을 것 같다.
“뭐, 그러죠.”
“후, 그것참 고맙군요.”
제황이 발을 내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린이다.
“지구의 운명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일단 들어보기로 마음먹은 제황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러자 백린이 제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멸망입니다.”
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하자 백린이 조금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명이 필요하니 손이라도 좀 치유해 주시죠.”
#1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백린은 제황의 빠른재생으로 자유롭게 된 손으로 세 개의 흙뭉치를 집어 들었다.
“과거에 신에 근접한 놈들이 지구를 세 개의 차원으로 분리해 버렸습니다.”
“어째서죠?”
제황이 물었다.
“다크어스의 몬스터들 때문입니다”
백린의 손이 흙덩이 하나를 내밀었다.
“다크어스는 일종의 쓰레기 매립장입니다. 당시 마법을 통해 초문명을 이룩한 이들이 만들어 낸 곤충계 키메라들... 그들을 단숨에 처리하려던 마도의 정점 아니 신의 근접한 이들이 그것들을 차원에서 분리해 버렸습니다.”
“신의 근접한 이들이요?”
“네. 뭐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지만, 신이라 불리는 초고대문명의 상위인간들과 양서류들 중 뛰어난 지혜를 지녀 그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드래곤들 이죠.”
“드래곤이라?”
드래곤은 엘어스에서 두어 번 관측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자료의 신빙성이 부족해 존재가 공식화되지는 않은 몬스터다.
“네. 드래곤입니다. 인간의 강함으로 따지면 대략 12티어 정도로 분류하겠군요.”
“12티어...”
제황에게는 감이 안 잡히는 강함의 수치다.
“오오가무시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가요?”
제황의 팔에 백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장담하건데 그들에게 오오가무시 따위는 식후 껌일걸요.”
믿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적으로 만난 입장에서 굳이 사실을 말할까 싶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백린이 하는 말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해주는 궁기 또한 지금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멸망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그 드래곤이나 다크어스 때문입니까?”
제황의 물음에 백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것도 문제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팍!
“이렇게 되거든요.”
그 말과 함께 백린은 들고 있던 세 개의 흙덩이를 하나로 합쳐 버렸다.
제황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세 개의 차원이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겁니다.”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거짓말 탐지기를 가져와도 됩니다.”
그의 말에 제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전 차원적인 문제라면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백린의 말대로라면 인류는 그야말로 제2차 대융합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어떤 방법이죠?”
“간단합니다. 다시 세 개의 차원을 안정화시키면 되는 거니까요.”
백린은 하나로 뭉쳤던 흙덩이를 다시 세 개로 나눴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네. 제가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다크어스에는 과거 세 개의 차원을 나눌 때 사용했던 장치가 존재합니다. 그걸 이용하면 다시 분리 안정화 시킬 수 있습니다.”
백린은 세 개의 차원이 다시 합쳐지게 된 원인만을 제외한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 합쳐지게 된 원인을 말한다면 아마 눈앞의 남자는 홧김에 자신의 목을 짓밟아 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외 몇 가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의 목적은 세 개 차원의 안정화에 있다.
“그걸 어떻게 자신합니까?”
“엘어스의 드래곤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백린의 대답에 제황의 입이 다물어졌다.
-저게 진짜일까?
-일단, 거짓은 아니야.
-역시 죽이면 안 되겠지?
-그러게... 저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궁기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천주백가와 무련천가의 악연에서 그녀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 또한 그 당사자 중 하나이기도 하며 또한 근 천년에 걸쳐 이어온 무련천가의 비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황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어쩔 수 없네.
제황은 가문의 복수라는 절대과제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조상님들도 이해해 주시겠지.
-...
“후우.”
제황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표정으로 백린을 노려봤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한 이야기지만 지금 당장은 죽일 수 없다. 물론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당장에 심장을 터뜨려 버리겠지만 말이다.
제황의 몸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던 살기가 사라진 것을 느낀 백린 또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되었지만 일단 당장은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