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위기의 백린-1
#1
백린은 정말 오랜만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수십 겹으로 두른 방어술진이 하나하나 깨져나가며 최종적으로 남은 방어술진의 표면으로 탐욕스러운 오렌지빛 화염이 훑고 지나갈 때 그곳에서 전해지는 화염만으로도 피부가 익어버렸다. 만약 현신한 조상님께서 마지막에 힘을 보태지 않았으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후우...”
백린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포격에 어느 정도 익숙해 질 즈음 쏟아진 마지막 폭격이 치명타였다.
자신이 신벌의화살을 가정하여 방어진을 구축할 것을 알고 역으로 이용당한 것이었다.
포격의 강도에 가감을 줘 안심시킨 후 마지막에 강력한 한 방을 후려갈긴다. 정말 몸서리칠 정도로 치밀하고 교활한 놈이다.
현실은 제황에 대한 친교 차원과 더불어 자신들도 10티어 몬스터 레이드에 함께했다는 숟가락 얹기를 노린 주일미군이 날린 거들기였지만 그걸 모르는 백린으로서는 제황의 치밀함에 이를 갈 뿐이다.
-한방 먹었네요.
-그래.
그는 자신이 제황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는 것을 오늘 뼈저리게 깨달았다.
제황은 술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가 상정한 범위를 훨씬 초과한 공격능력을 보여줬다. 그뿐일까. 전혀 뜻밖의 공격까지 선보였다.
‘폭격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반칙이잖아’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저도 전력을 다해야겠네요.
-이제 제대로 할 생각이냐?
-예.
스르릉
백린은 등에 메고 있던 태도를 뽑아 들었다. 삼신가 중 하나였으나 이제는 멸망해버린 창궁신가의 신물이다.
창궁룡검- 슈페리어등급 아티펙트
계승자: 신덕(백린)
절삭력:1000%증가
방어파괴:200%증가
제질: 만년한철(아티펙트)
특수능력
강화(S급)
파괴(S급)
청룡 소환 (쿨타임:10일)
비록 그가 천주백가의 계승자지만 각성 당시 그의 목숨을 구했고 약 20여 년간 붙잡았던 건 창궁신가의 신물인 창궁룡검이었다. 어찌보면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다. 천주백가의 적자임에도 천주백가의 신물은 하나도 계승하지 못했는데 천주백가의 음모로 인하여 무련천가와 충돌하여 멸망한 창궁신가의 신물이 천주백가의 계승자를 지켜준 꼴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템빨로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얼굴은 20대 후반 가량으로 보이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83살이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헌터들을 통틀어 그만큼 많은 경험을 지닌 이는 드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들이 모르는 많은 이면의 비밀과 그만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 손에 창궁룡검을 든 그가 반대쪽 손에 부적 한 장을 꺼내들었다.
“나오막나하반마하밀...”
화륵...
부적이 불타오르며 피어오른 기운이 백린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그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던 누군가를 깨우는 의식이다. 가급적 깨우고 싶지 않은 인물···. 함께 한지 수십 년이지만 아직도 미운 정이 더 많은 인물이다.
[봉인해제]
몸 안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백린은 이를 악물었다.
과거에는 숱하게 행했던 것이지만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는 느낌... 특히나 성격 고약한 늙은이를 다시 꺼내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크크크크... 놈 다시는 날 부르지 않을 것 같이 굴더니...
천주백가의 마지막 가주인 백일기의 목소리도 쇠를 긁는 듯한 소리지만 지금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는 지옥의 유부에서 기어 나온 악령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 목소리에 한기가 서려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어르신? 저주받을 천주백가의 놈팽이가 다시 혀에 기름을 발랐구나. 백일기 그 쥐새끼는 어디 있지?
-여기 있다.
-크큭, 여기 있다? 전에는 내가 나타나면 주둥이 다물기 바쁘더니 그새 나를 잊었나?
-후후, 잊을 리가 있나. 창궁신가의 가주 신덕...
-갈! 감히 그 더러운 입에 창궁신가를 올리느냐.
-지겹지도 않으냐. 신가야
두 노인이 티격태격한다.
지금도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지만 그나마 지금은 서로 대화라도 하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였다. 뭐 아직도 그건 진행중이기는 하지만...
무려 천년이 지났고 그 후로도 둘을 한 몸에 품고 60년 가량을 살아왔지만 신덕은 아직도 원한을 잊지 못한다는 듯 천주백가를 뼛속까지 증오했다.
-무련천가가 나타났습니다.
-무련천가?!
-백린이가 죽게 생겼다. 힘 좀 보태라.
백일기의 말에 신덕이 파안대소를 한다.
-크하하, 내가 왜?
그와 함께 창궁룡검의 위로 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고 창궁룡검을 붙잡은 백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 백린 놈이 살지 못하면 네 숙원도 이뤄주지 못한다.
-흥. 숙원 따위 이제 포기했다. 네놈들의 말을 믿고 힘을 빌려준 지 벌써 반세기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찾지 못하는 핏줄! 이제 그냥 다 포기하고 끝내련다. 너희도 그냥 다 포기해라. 포기하니까 편하더라.
-크...
신덕의 숙원. 그것은 백일기와 마찬가지로 창궁신가의 핏줄을 찾아 가문을 다시 계승시키는 것이다. 과거 백린과 백일기는 신덕에게 창궁신가의 후예를 찾아주기로 약조를 했었다. 만약 그런 약속이 없었다면 신덕은 절대 백린을 돕지 않았으리라.
-아, 네놈은 좀 억울하기도 하겠구나. 약속을 지키지 못해 83살까지 동정이라니... 흐흐흐
비아냥대는 신덕의 말에 백린이 이를 악물었다.
백린은 신덕에게 힘을 빌리는 조건으로 과거 하나 약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몸에 걸린 최악의 저주... 창궁신가의 핏줄을 찾아주기 전까지는 천주백가 또한 혈통을 이을 수 없게 한다는 신덕의 저주였다.
-그러게 좀 더 열심히 찾아보지 그랬냐. 크크큭···. 고자 녀석아.
-크윽!
신덕의 말에 백린의 눈에 핏줄이 돋았다.
그렇다. 백린의 몸에 걸린 저주는 바로 ‘중증 발기부전과 불임’ 이었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천주백가와 창궁신가를 한몸에 품기 위해 그는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신덕!
-왜!
-네 제자다!
백일기가 외치자 껄껄 웃던 신덕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웅다웅하며 싸우기는 했지만 백린에게 무술을 가르친 건 신덕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답하는 신덕의 목소리는 찬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천주백가의 저주받은 핏줄이기도 하지. 난 돕지 않을테니 어디 둘이 열심히 싸워봐라. 뭐 어차피 내가 없어도 그 잘난 술법으로 도망치겠지. 다시 날 부르지마라.
“후우”
한숨을 내쉬며 백린은 뽑았던 태도를 다시 집어넣었다. 신덕의 허락이 없으면 창궁룡검은 사용할 수 없었다. 창궁신가의 적자가 아니기에 계승 받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신덕에게 빌려 쓰는 것뿐이다.
위이잉...
그의 무한고에서 다른 태도가 한 자루 나타났다. 창궁룡검에 버금가는 아티펙트이기는 하지만 능가할 수는 없는 그의 두 번째 부무기다.
“쉽게 죽지는 않습니다.”
태도를 비켜든 백린이 무너진 잔해를 밟고 건물 위로 뛰어 올랐다. 발길이 가볍다. 그 또한 초인이기에 순식간에 건물 위에 도착했다.
옥상에 내려선 그는 처음으로 무련천가의 후예와 눈을 마주했다.
“새끼, 더럽게 잘생겼네.”
수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지만 발달된 둘의 눈은 상대를 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백린이 손을 흔들어 제황에게 인사했다. 지금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기는 하지만 무려 60여년 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무련천가이기에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손 한 번 흔들어 줄법하지만 상대는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무안해진 백린이 손을 내리고는 곧장 무한고에서 부적 다발을 꺼내 손에 들었다. 어림짐작으로 300장은 훨씬 넘을 듯한 양이다.
화아악!
부적을 하늘위로 던져올린 백린이 손에 수인을 맺었다.
“천변분신의 장”
퍼퍼퍼퍼퍼퍼퍼펑!
부적 하나하나가 모두 백린으로 화해 건물 위에 내려앉는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린 백린이 외쳤다.
“가자.”
“우와아!”
#2
-쟤 뭐하는 거지?
-글쎄, 반가운가 보지.
손을 휘적휘적 흔드는 백린을 바라보며 제황이 궁기에게 물었다.
-뭘 하려는 걸까.
폭격을 맞아서 정신이 나간건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어 보인다. 적끼리 손을 흔들며 안부를 묻는 로망 따위는 제황에게 없다.
-방심하지 마.
-알아.
굳이 궁기의 당부가 없어도 방심은 없다. 아직 상대가 꺼내지 않은 카드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당장 그 두억시니만 해도 상당한 강력함을 자랑하지 않던가. 얼마나 더 숨기고 있을지는 본인만 알 뿐이다.
물론 제황도 비장의무기들을 꽁꽁 숨기고 있지만...
잠시 후 백린의 주변으로 수백의 분신이 만들어져 내려앉았다.
보통분신들이 아닌지 단순 육안으로는 진체를 판단할 수 없다.
감탄을 터뜨릴 새도 없이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제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앙! 파아앙!
제황이 몇 대의 화살을 날렸지만 단순한 분신들이 아닌지 그 화살들을 신묘한 움직임으로 피해내며 계속해서 접근해 왔다. 그렇게 거리가 약 300여미터 정도 되었을 때... 제황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단에 어울려 주기 싫어졌다.
“더 볼 게 없네.”
조금 실망한 제황이었다.
뭔가 대단한 한 수를 꺼낼 거로 생각했는데 이런 너저분한 분신공격이라면 더 두고 볼 생각이 없다.
매섭게 당긴 시위를 놓으며 제황이 말했다.
“그냥 죽어.”
파아아아아앙!
맹렬한 강기를 줄기줄기 품은 붉은 빛줄기 하나가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강력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무려 300명이다. 그들은 거리를 넓게 벌리며 붉은 빛줄기를 피해갔고 제황의 손에서 발사된 화살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치는 듯 했다. 그때 분신들을 지나치던 화살이 그대로 직각으로 꺾이더니 한 분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손에 들고 있던 태도로 화살을 내리쳤지만, 마지막 순간에 묘기와 같이 회전하며 분신의 가슴에 작렬했다.
퍼어어엉!
“크악!”
화살에 맞은 분신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자 그를 제외한 나머지 분신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허공중에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 제황은 이미 본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빤히 머리위로 명황안의 추적의 인이 떠 있는데 못찾으면 병신이다.
콰쾅!
인도에 서 있는 차량 지붕에 그대로 처박힌 백린이 밭은기침을 하며 자신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푸슉...
피가 솟구쳤지만, 백린의 손에서 출발한 검은 기운이 상처를 감싸자 피가 멎는다.
“빌어먹을 간파당하고 있었... 우왓!”
상대는 그가 감상을 말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내리꽂히는 수십 발의 강기들을 보며 백린이 이를 악물었다.
“하아아앗!”
지이이이!
백린의 태도가 휘둘러지며 그의 몸 앞으로 푸른 검막이 생성되었다.
콰콰콰쾅!!!
그가 누워있던 차량을 포함해 일대의 도로가 쑥대밭이 되었다. 침음성을 삼키며 태도를 고쳐 쥔 백린이 제황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니 이미 제황은 사라진 상태였다.
“가차없군.”
씨아아앙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이 골목을 돌아 붉은 강기 한발이 날아왔다.
퍼어엉!
백린의 태도가 그 붉은 강기를 향해 휘둘러졌지만 붉은 강기는 또다시 마지막 순간 몸을 꿈틀하며 태도의 궤적에서 벗어나 전혀 엉뚱한 곳을 쳐버렸다. 그곳은 바로 백린이 서 있는 땅
콰콰콰쾅!
“우와앗!”
딛고 서 있던 땅이 폭발하며 파편들이 총알처럼 튀어 그의 몸을 두들겼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뒤로 어느새 따라붙은 두 대의 화살이 백린의 머리를 노린다.
퍼펑! 펑!
검은 보호막이 솟아나며 화살을 막아냈지만, 끊임없이 시차를 두고 날아오는 화살들이 계속해서 그를 때려댔다. 화살은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날아와 꽂혔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죽을 참이다.
-정말 엄청나네요!
-지금 적을 칭찬할 때냐! 왜 이러고 있어!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으아악!
맹렬히 회전하는 화살 하나가 그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복부에 꽂히며 폭발해 버렸다.
입고 있는 아티펙트가 아니었다면 단숨에 절명해 버렸을 공격이다. 백린은 신음을 삼키며 무한고에서 부적 다발을 꺼내 공중으로 흩뿌렸다.
퍼퍼퍼퍼퍼펑!
다시 한번 ‘천변분신의 장’을 통해 분신들을 소환한 백린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