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반칙이잖아!-1
#1
모 광고 CM에 이런 말이 나온다.
‘받은 사랑 큰 기쁨으로 보답합니다.’
비록 받은 것이 사랑은 아닐지언정 제황은 무엇이든 간에 돌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관심이건 사랑이건 질투건 원한이건 간에 말이다. 게다가 선물의 내용은 예측한 바를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수백 마리의 6티어 몬스터와 10티어 몬스터? 이 일을 꾸민 누구누구는 꽤나 기대했겠지만 최대치로 그 정도는 예상하고 온 자리였다.
차라리 10티어 몬스터 한 마리가 아니라 9티어 몬스터 2마리였다면 제황이 오히려 물러났을 것이다. 지진 않겠지만 크나큰 적을 곁에 둔 상태에서 둘을 상대하는 건 제황의 전투철학과 맞지 않으니까.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두 가문사이의 악연을 완전히 끝맺기로 마음 먹었다. 전력을 다해서 말이다.
백린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았지만, 제황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귀에 착용하고 있던 헤드셋을 조작하는 일이었다.
“이루미님.”
-네! 제황님! 고생하셨...습니다.
헤드셋 속의 이루미의 목소리가 떨린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있다. 아마 지금 오오가무시가 쓰러진 걸 그들은 모두 봤을 것이다. 아까는 공포에 휩싸인 비명과 고함이 들렸지만 지금 들리는 건 환희가 가득한 함성뿐이다.
그녀가 제황과 계획을 짜며 조심스럽게 10티어 몬스터의 가능성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급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정이었다. 제황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상식선에서는 10티어급 몬스터는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 가정속에만 존재하던 10티어 몬스터가 나타났다.
고고도정찰기가 보내오는 영상으로만 봐도 그 크기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인 제황은 그 몬스터를 홀로 상대해야 했다.
제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사람들이 공포에 미쳐 날뛸 때는 그녀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제황과 함께 죽겠다는 심정으로 자리를 이탈하는 이는 직접 목을 쳐버리겠다는 살기로 관제실을 제압한 그녀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도 아니다. 압도적이라고 레이드를 끝마쳤다. 실제 전투시간 1.7초로 10티어 몬스터를 침묵시켜 버렸다.
-2차 작전에 들어갑니다. 준비되었습니까?
차분한 분위기의 제황이 말하자 이루미가 언제 그렇게 떨었냐는 듯 명료한 목소리로 답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녀의 그 말에 제황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서 믿을 수 없는 역사를 쓰기는 했지만 이루미가 해낸 것도 정말 대단한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아 자리에 앉히고 그가 미리 말해 놓은 것을 철저히 이행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면 무련천가의 일원으로 충분히 합격이다.
“바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약 1~2분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지만,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좋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제황이 건물 옥상에 있는 벤치에 편하게 앉았다. 아마 예전에 회사 휴게실로 쓰였는지 작은 테이블 몇 개와 의자 그리고 자판기까지 놓여 있다.
자판기에서 음료라도 하나 꺼내고 싶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
그럭저럭 무한고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놓은 뒤 무한고에서 태블릿을 꺼내 군사용 통신 프로그램과 3차원 지도를 활성화시켰다.
“시작하죠.”
권태로운 제황의 손가락이 태블릿에 나타난 지도의 한 곳을 쿡 하고 눌렀다.
#2
-놈이 대체 뭐하는 걸까요?
술법을 통해 눈이 마주쳐 한껏 긴장하고 있는데, 이어진 상대의 행동이 이상하다. 뜬금없이 태블릿과 음료를 꺼내더니 벤치에 앉는다. 누가 보면 싸우러 온 이가 아니라 잠시 쉬러 온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뿐일까. 들고 있던 활까지 거두고 이제는 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태블릿 삼매경에 빠졌다.
-저놈 뭐 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다. 대체...
천주백가의 마지막 가주이며 백린을 만나기까지 근 천여 년의 경험을 지닌 백일기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뒷말을 흐렸다. 제황의 행동을 꼼꼼히 지켜보던 백린이 단정하듯 말했다.
-역시 이쪽을 눈치채지는 못한 게 분명합니다.
백린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만약 저것이 자신을 기만하려 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저치의 입장이라면 가장 먼저 할 것은 그 잘난 은신스킬을 몸을 감추는 것이다. 자신 또한 제황의 무시무시한 은신능력에 중점을 두고 함정을 파지 않았던가.
만약 지금 누군가가 제황의 강점에 대해 묻는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가 가진 엄청난 공격력을 첫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아니 이제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무려 오오가무시를 단 한방에 침묵시켰지 않는가. 핵으로도 장담할 수 없는 초거대 몬스터를 단 한 방에 보내 버렸으니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것이리라. 그렇지만 백린은 제황의 다른 능력이 가장 껄끄러웠다.
그것은 바로 은신 능력.
-은신에 대비해 최고의 탐색술법을 깔아놨는데···. 어째서···.
제황이 백린과 맞붙어서 배운 게 있는 만큼 백린도 제황에 대해 배운 게 많았다. 그 첫 번째는 제황의 은신능력을 잡아내지 못하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래 계획은 오오가무시와의 전투가 시작되면 술법을 가동해 제황의 은신능력을 마비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레이드에서 은신스킬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백일기가 그리도 두려워하던 그 신벌의화살이 자신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인 오오가무시가 본신의 힘을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순간에 삭제되어 버렸다.
-예감이 불안하다. 물러나야 한다.
-안됩니다.
-고집부리다가 정말 다친다!
-지금이 아니면 녀석을 잡을 수 없습니다.
백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황이 보여준 위용은 분명 무시무시했다. 무려 오오가무시를 한 방에 잡아내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나중이 된다고 해서 그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제황은 아직도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나중을 기약한다? 차라리 지금 결판을 내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백린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제황을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모든 술법들이 발동될 것이다. 비록 계획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할 오오가무시가 사라졌지만, 아직 그에게는 숨겨놓은 패가 많았다.
-가장 위험한 신벌의화살을 썼잖습니까. 이제 그 능력은 쓰지 못합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 맞다. 그렇지만...크흐
그의 말에 백일기가 침음성을 삼켰다. 그의 말이 옳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신벌의 화살은 이제 쓸 수 없을 것이다. 신벌의화살은 상대가 가진 전력의 절반이다. 그리고 그가 아는 바로 신벌의화살은 사용 후유증도 컸다.
무련천가의 가주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기억하고 있는 그도 신벌의화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가진바 전력을 모두 쥐어짜야 단 한발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어떤 가주는 여의보주를 지녔음에도 그 단 한 발을 감당하지 못해 주화입마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오판을 하고 있는 것은 제황이 최후에 최후까지 숨기고 있는 궁기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힘을 되찾기 전에 시작해야 합니다.
-알겠다. 나도 최선을 다하마.
백린이 빠르게 수인을 맺기 시작하자 그의 몸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갔다. 삼국시대의 고대복식을 걸친 흰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백린의 뒤로 현신했다. 술법을 통해 천 년간을 살아온 천주백가의 가주 백일기의 진체다.
곧 그 둘을 둘러싸는 거대한 붉은 원진이 만들어졌다.
이 원진은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10km 에 걸쳐 완성되어있는 천주백가 비장의 술법인 ‘백팔천주멸천진’을 가동시키고 조종할 수 있는 진의 심장이다. 한차례 숨을 고른 백린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부터 진정한 천주백가와 무련천가의 싸움이다.
“나모삼만다발타남가가남아난다...”
상고의 비술을 펼치는 백린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피어난다. 끊임없이 읊조리며 손으로는 수인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개진을 알리는 마지막 수인을 맺으려는 찰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출판사 건물을 감싸고 있던 방어진이 충격으로 인해 뒤흔들렸다.
무려 신벌의화살을 가정하고 펼친 방어술진이기에 내부에 피해는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린이 술법을 잠시 멈추고 외쳤다.
“이게 무슨! 선조님!”
“놈이 아니다!”
그가 술법을 펼치는 동안 대신하여 제황을 지켜보던 백일기가 외쳤다. 그렇다. 제황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떨어진 이것은 뭐란 말인가. 문제는 충격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수 겹으로 두른 방어진에 계속해서 충격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폭...폭격이다!”
“예?”
#3
하늘로부터 연속해서 떨어지는 붉은 섬광이 추적의 인이 반짝이는 곳을 쉴새 없이 타격하는데 반경 백여 미터에 수십 발의 포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며 근처의 모든 건물을 초토화하고 있다.
-사람 잡는 데는 역시 화약 무기가 최고지.
솔로 레이드를 준비하며 제황은 권제에게 특별한 부탁 한가지를 했다. 원거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을 타격하며 지원해줄 군병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개인 레이드에 군병력을 동원하는 건 꽤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지만 권제는 고작 일주일 만에 대한민국의 주력 K9M1 자주포 10문을 일본공군기지로 공수해 줬다.
고작 10문이냐고 말할 수 있지만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포병대대가 뒤따랐다. 대융합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포병전력은 그 명성이 자자했다.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포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 전력이었고 대한민국은 가뜩이나 강한 포병전력을 최우선으로 육성했다. 오죽했으면 과거 미국에서 자국의 레이드에 우리나라로 포병전력을 따로 요청했을 정도다.
그 자주포들이 지금 제황이 태블릿으로 찍어주는 곳을 순차적으로 폭격하고 있다.
쿡...쿡쿡...
마치 게임을 하듯 손가락으로 찍으면 그 정보가 실시간으로 이루미에게 전송되고 이루미는 이 정보를 포병대대로 송신한다.
-재미있어 보인다.
-이거 위험한 물건이다.
-한번만 하게 해주라. 응?
칭얼거리는 궁기의 말에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들어올리자 제황의 머리위에서 튀어나온 손가락이 쿡쿡쿡 눌러댔다.
-잘못 누르면 나한테 떨어진다.
-걱정 붙들어 놔! 기문진의 핵심만 박살낼 테니까. 호호...
궁기의 손가락이 신나게 움직이고 잠시 후 그녀가 지정한 곳으로 자주포의 포격이 내리꽂힌다.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제황은 여의용혈신공이나 돌리며 부족한 마나를 채워나갔다.
-너무 잘 맞추는데?
-우리나라가 포병은 또 알아주지.
K9M1 자주포는 과거 K9 자주포의 개량형 버전으로 대몬스터 전용으로 발전된 모델이었다. 사거리는 종전보다 떨어지는 30km지만 분당 발사속도는 최대 5발이며 갖가지 몬스터들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포탄을 사용하도록 개량되었다. 무려 다섯 대의 자주포가 5발씩 분당 25발을 한 지점으로 쏟아붓고 있으니 아직까지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 용하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다섯 대의 자주포는 열심히 궁기가 찍어주는 곳을 타격 중이다.
-호오 드러났다.
-그렇군.
수십 발의 포탄이 떨어지자 아예 가루가 된 건물 사이로 둥글고 불투명한 막이 드러났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떨리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건재해 보인다.
-잘 버티는군. 뭐 상관없지.
제황이 자주포까지 끌고 온 것은 포를 이용해 백린을 격살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궁기가 사전에 탐지해둔 백린의 기문진을 깨버리는 것이다. 제황이 사케노오스케를 레이드할 때 궁기는 백린이 뿌려놓은 진을 파악하는데 노력했다.
백린이 아무리 잘 숨겼다고 하지만 궁기 또한 술법에는 일가견이 있다. 특히 술법은 중요한 곳 두서너 군데만 파괴해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때였던 헤드셋으로 이루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황님. 미공군에서 제황님을 지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예? 미 공군이요?”
이루미의 뜬금없는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계획에 미공군은 없었다.
-저희 쪽에서 빌런들을 잡기 위해 포병전력을 데려왔다는 말에 자신들도 지원해주겠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포탄값을 치룰 생각은 없는데요?
미군이 폭격 한번에 얼마를 쏟아붓는지 아는 제황이다.
-호호, 공짜입니다.
그녀의 말에 잠시 고심하던 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팔 거들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 공짜 아닌가. 제황은 저번 대결 이후로 백린의 처리를 꼭 가문 대 가문으로 한정 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수단은 상관없다. 몽둥이로 때려잡든 주먹으로 때려잡든 잡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바로 가능하답니까?”
-핵을 탑재하려던 전략폭격기가 출격대기 중입니다.
“흠, 좋습니다. 좌표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 10분여가 지났을 무렵 갑자기 자주포 폭격이 멈췄다. 잠시의 소강상태... 그렇지만 그 침묵은 뒤이어 등장할 깜짝 까메오를 위한 배려다. 동쪽 능선을 타고 하나의 검은 점이 나타났다. 느릿한 듯 보이지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것은 미공군의 전략폭격기 일명 죽음의 백조 B-1 이었다. 빠른 속도로 공중몬스터를 따돌리기 위해 좀 더 늘씬한 동체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무려 폭장량 20톤을 지닌 이 폭격기의 B-1의 하부창이 열리며 검은색의 폭탄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콱!!! 쾅쾅쾅!
자주포의 포격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폭발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오죽했으면 상당한 거리에 있는 제황에게까지 충격파가 느껴진다. 자욱한 먼지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제황이 중얼거렸다.
“설마 죽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