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06화 (206/301)

# 206

절대자-1

#1

백린의 두 손이 하늘로 향했다.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수천수만 개의 진언이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껍데기만 남은 듯 허물어진 백린이 바닥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질러버리기는 했는데... 참 뒷감당이 될까 모르겠네요.

-바보 같은 놈 걱정도 팔자다. 어차피 시한부다.

-시한부기는 한데 지금은 팔팔하다는 게 문제죠. 그가 최대한 힘을 빼줘야 합니다.

-크크큭

백린의 말에 그의 선조가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닥치고 지켜봐. 무련천가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면 그딴 부질없는 걱정은 사라질 테니. 저것을 죽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빈사까지는 만들 꺼다.

-설마요.

-내기하랴?

쿠쿠쿠쿠쿠쿠...

게이트에 몸을 걸치고 있던 오오가무시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 거대한 산이 게이트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게이트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천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누군가가 억지로 찢어서 벌려 놓은 게 천천히 아물어가듯 작아지고 있는 것이다.

쩌적...쩌저적...

오오가무시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의 시작은 머리 부분. 마치 고치를 찢고 나오듯 머리에서부터 등까지 쩌억 하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두께 2미터는 될 법한 껍데기가 갈라지고 감춰져 있던 속살이 드러났다.

슈르륵...슈륵...

거대한 늪 속을 가득 채운 지랑이의 모습이랄까.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이지만 밖으로 뻗어 나온 그것의 정체를 누군가 본다면 아마 껍데기가 있었던 편이 좋으리라고 누군가 말했으리라.

-시작되었군요. 제길!

‘복수의 왕 각성의 장’ 이라는 술법을 통해 왕의 씨앗의 성장을 촉진시킨 백린이 욕지거리를 하며 침을 뱉었다. 그 안에서 나온 쏟아진 것은 수천수만 가닥의 촉수였다. 그 수가 너무나 많아 마치 검은 털이 휘날리는 듯 보이지만 분명 그것들은 촉수였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꿈틀거리던 그것들이 어느 순간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왕의 씨앗... 아니 이제 군주라고 해야 겠지.

다크어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과거 떨어져 나간 또 하나의 지구인 그곳을 백린이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정의 내렸다.

‘지구가 세 개의 차원으로 찢어지게 된 원흉들의 집합소’

‘격리된 지구’

과거 지구가 세 개의 차원으로 찢어지게 된 원인은 한마디로 말하면 감당할 수 없는 적을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것을 행한 것은 바로 지구의 신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신적인 존재들이라고 말하는 게 편하리라. 그들은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파멸의 씨앗들을 없애기 위해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바로 차원분리

가장 안정화된 차원장벽을 두르기 위해 고대지구의 차원력을 세 개로 쪼겠다. 물론 공평하게 자른 건 아니었다. 가장 많은 차원력을 가져간 것은 바로 신적인 존재들이 이주하기로 한 엘어스였다.

신적인 존재들은 엘어스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 가장 많은 차원력을 엘어스에 두었다. 그렇기에 지체 높은 종족들은 모두 엘어스로 향했다. 두 번째로 많은 차원력을 가져간 것은 현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다. 그러나 지구는 이주보다는 세 개의 차원을 지탱하는 완충지대의 의미가 컸다.

안정화시키기 위해 모든 마나를 최대한 소멸시킨 일종의 촉매가 바로 지구였다.

마지막으로 다크어스는 당시 지구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최악의 존재들이 격리되어 살게 되었다. 그것이 이미 수십 만 년 전 이야기... 지금 저기 나타난 군주는 그 존재들의 씨앗 중 하나였다.

-그런데 네가 만든 그 웃기는 술법은 확실히 먹힌 거냐?

-당연합니다. 죽어가며 내지른 사케노오스케들의 비명은 심령으로 연결된 오오가무시를 깨우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오오가무시와 사케노오스케의 관계는 일종의 공생체... 완전히 탈피하기 전까지의 오오가무시는 별 다른 전투능력이 없기에 사케노오스케에게 크립을 제공하는 대신 다른 몬스터로부터 몸을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쿠르르르...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험을 느낀 오오가무시가 적을 퇴치하기 위해 조기 탈피를 시작하면 게임 끝이죠. 제 술법은 그 트리거를 좀 더 성대하게 만든 것 뿐이고요.

드드드득...

쪼개진 허물 안으로 칠흑과 같은 검은 구슬이 찰나지간 나타났고 곧이어 수천만 개의 촉수가 그것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마치 웅크린 검은 짐승과 같은 형태... 그러나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체고는 무려 80미터... 체장은 200여미터가 넘는 거대한 사족보행의 몬스터... 검디검은 껍데기는 아직도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안착하고 있었지만 이내 그것들은 번들번들한 광택을 내뿜으며 튼튼한 갑주로 변했다. 머리로 생각되는 부분이 조각조각 갈라지기 시작했다.

촉수의 안착이 끝나자 잠시 후 눈으로 짐작되는 부분이 번쩍 띄어졌다. 그 눈의 개수는 무려 13개... 양쪽으로 6쌍의 눈과 한가운데 거대한 눈 하나가 더 자리해 있다.

눈동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별빛 한 점 없는 오직 검은 무저갱뿐이다.

쩌적...쩌저적...

눈의 윗부분이 쪼개지며 거대하고 날카로운 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 또한 다섯 개였는데 그 하나하나가 5~6미터 가량 되었다. 잠시 후 번들거리던 피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공기를 주입하는 듯 불끈거리는 그것들은 마치 잘 단련된 종마의 근육과 같이 꿈틀거렸다. 마침내 근육들이 이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눈 밑으로 무저갱과도 같은 거대한 입이 쩌억 하고 벌어지고 숫자를 셀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이 가지런히 드러났다.

꾸어어어어어엉!!!

오오가무시가 포효를 내지르는 순간 주변에 있던 크립들이 폭탄이 터진 듯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너무나도 강렬한 충격에 백린이 자리 잡고 있던 (숨어있던) 출판사 건물마저도 우르르 하고 진동이 전해졌다. 지금 저것을 현 헌터 체계에서는 뭐라고 말할까.

-지긋지긋한 악연으로 묶인 무련천가의 후예여. 10티어의...군주다. 자! 이제 넌 어찌할 거냐.

백린은 술법을 통해 만들어 은폐시켜 놓은 눈으로 제황을 노려보며 바라보며 말했다.

10티어 몬스터, 지금껏 지구에 나타난 역사가 없는 몬스터다. 백린이 알기로 저 ‘군주’ 는 현 인류 사상 그 어떤 헌터가 와도 이길 수 없다. 아니 인류가 가진 최강최악의 무기인 핵이라 할지라도, 피해는 줄지언정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백린이 대책없이 저것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저 군주가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 이른 탈피를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성장에 쏟아 부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남아있는 힘마저도 모조리 소모하도록 힘을 촉발시켜 놓았다.

한마디로 지금 저기 나타난 ‘군주’ 는 시한부 인생인 셈이다.

-그 시한부 인생이 일본 하나로 끝나면 다행... 응?

순간 백린의 말이 멈췄다. 순간적이나마 제황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린은 곧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절대 자신을 알아챘을 리가 없다. 그는 지금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은폐술을 광범위하게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그뿐일까. 은폐술을 다시 은폐하기 위해 차원력장을 비롯하여 절대적인 감각의 장벽, 그리고 수십 개의 환영도 뿌려놨다.

상대가 자신 수준의 술법가가 아닌 이상은 절대로 알아챌 수 없다.

고개를 저은 백린은 다시금 ‘군주’를 주시했다. 지금은 한시라도 저 초월적 존재에게서 눈을 떼어서는 안된다. 차후 세 개 차원이 합쳐지며 차원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그들의 최대 최악의 적은 바로 저것들이 될 것이다.

백린이 저 군주를 지구에 풀어놓은 것은 일종의 예방백신과 같은 성격이 짙었다.

마치 사람의 몸에 힘을 약화한 세균을 투입해 백혈구에 세균에 대한 방어능력을 키우는 것처럼 인류도 대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에 백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간이 진정 저 몬스터에게 대항 할 수 있겠느냐는 일말의 불안감과 함께...

#3

몸을 최대한 낮춘 제황의 눈꼬리가 실룩였다. 때 아닌 소음에 노출된 귀청이 따끔거려 기분이 좋지 않다.

-제황님!!!

헤드셋으로 이루미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주변은 상당히 소란스러웠는데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이 여과 없이 들려온다.

“네.”

-지금 곧 헬기를 보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대피하셔야 합니다! 공군기지에 있는 일본의 병력은 모두 철수에 들어가며 약 한 시간 이내에 핵을 떨구기 위한 미공군기지에서 전략폭격기가 이륙할 겁니다.

이루미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제황의 전투는 이틀 동안 초고고도 정찰기와 드론을 통해 빠짐없이 지켜봤다.

수백 수천의 헌터들과 수백억의 자금을 쏟아 부어도 막아내지 못한 몬스터들을 제황은 단신으로 레이드했다. 너무나 어이없는 레이드 방식에 뒤늦게 일본이 수저를 꽂아보려 했지만 이루미가 지그시 째려보는 것 한번으로 모두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녀가 강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섬기는 제황이라는 막강한 헌터의 힘이다.

그러나... 추정치 10티어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확인 되었을 때 기지는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방송이 되지도 않았건만 이미 수만에 이르는 피난민들은  식구들만을 챙긴 채 바리바리 육로로 도망치고 있다.

공군기지 내의 군병력도 그들과 별반 차이 없었다.

수뇌부들은 나타난 몬스터의 추정등급이 출력되어 나온 순간 가장 먼저 헬기에 올랐다.

몇몇 정신 못 차린 일본의 고위 장성들이 제황이 타고 온 헬기를 노리고 강제징발에 나서려고 했지만 이루미가 발 빠르게 나서서 그것을 막아냈다.

물론 저들이 미쳐서 이루미에게 덤빈 것은 아니었다.

10티어 몬스터 출현이 전해진 세계헌터사무국은 그들의 직권을 이용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미공군기지에 핵 투입을 지시했고 동시에 해당 보고를 받은 미국 대통령은 그것을 승인했다.

사람들의 대피와 전략물자의 이동 그리고 안전한 데이터 파기를 휘애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핵이 떨어지는 순간 도쿄시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아니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공군기지도 휩쓸려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도쿄 내 벙커에 숨어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은... 10티어 몬스터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제황의 물음에 대답하는 이루미의 목소리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녀 또한 몬스터로 인해 비극을 겪은 이로써 죄 없는 이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아무리 핵도 버틸 수 있는 벙커에 숨어있다지만, 핵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구조할 수 없는 실종자가 된다.

“이루미님.”

-네. 제황님.

“제가 말한 계획은 그게 아니지 않나요?”

이루미의 머릿속에 의문 부호만 가득해진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루미가 제황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전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무려 10티어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 크기는 9티어 몬스터 베히모스의 근 네배...

어찌 보면 저것을 10티어 몬스터라고 단정 짓는 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에는 꽤나 과학적인 근거가 있었다.

덩치가 일정 크기 이상 넘어가면 그 몬스터는 더 이상 순수한 근력으로는 지구의 중력을 이기지 못한다. 마치 바다의 고래가 지상으로 올라오면 그 무게로 인해 서서히 질식하여 죽는 것처럼 지구의 중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순수한 근력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마나. 한 마디로 그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례하여 보유한 마나도 커진다는 뜻이다.

“저는 철수하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렇지만...

“계획은 그대로입니다.”

제황의 말에 이루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황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아니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아니었다.

그녀는 제황의 목소리 속에서 어떤 확신을 느꼈다.  저 10티어 몬스터를 레이드 할 수 있다는 확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 인류 최강의 헌터인 9성의 좌에 있는 제황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있는 이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저것을 레이드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다시 불러들이세요. 필요하면 협박해도 됩니다.”

-제, 제황님. 설혹 저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해도 핵은 제 힘으로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9성 헌터를 보좌하는 무련천가라고 해도 세계헌터사무국과 미국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다.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제황이 물었다.

“한 시간이라고 했죠?”

-예. 한 시간 내에 이륙할 겁니다.

이루미가 착잡한 어조로 말했다. 한 시간... 사실 제황을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가기도 촉박한 시간이다. 이루미조차도 지금 교신을 끝내면 현장을 정리할 생각이다.

“그럼 그 안에 끝내죠.”

-네...네?!

“한 시간 안에 끝내겠습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갑니다. 참고로 일본은 이번 계획에서 완전히 배제합니다. 그들에게 맡기려 했던 것은...”

제황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수정된 계획을 말하자 한동안 그것을 듣고만 있던 이루미가 곧 침착한 어투로 답했다.

“조치하겠습니다.”

“네.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되며 필요하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맡겨 주세요.”

이루미는 다짐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제황을 부정한다고 해도 그녀만큼은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설혹 그가 말한 바대로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녀가 핵폭발에 휘말린다 해도 그녀는 제황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제황과의 통신이 끝난 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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