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04화 (204/301)

# 204

2차대결-1

#1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제황의 몸을 암혼보가 감싸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이트라는 것은 그 범인으로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백린이군.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주변 탐색은 그대로 진행해야지. 지금부터 부탁할게.

-그래.

궁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제황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크립 주변에 있는 건물들과 지형을 모두 익히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갱신된 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정밀 영상이라 할지라도 실제 그곳의 공기 혹은 마나의 성질 등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특히 제황이 신경 쓴 것은 도심의 건물로 인해 변하는 바람의 방향 등이었다. 스텟의 보정과 스킬의 힘으로 어지간한 바람은 극복할 수 있지만 스킬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도 미세한 간극을 조절하여 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제황은 모든 것을 꼼꼼히 살피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 거의 자정을 넘겼을 때  제황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드디어 찾았다.”

엘어스에서 얻었던 명황안이 드디어 발동한 것이다.

지이잉

명황안이 발동하자 시야 한 편에 검은 문양 하나가 생겨났다. 검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듯한 기괴한 눈이다.

그곳으로 정신을 집중하자 그 눈이 마치 살아있는 듯 제황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어느 곳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마치 그곳에 네 적이 있다는 듯이···.

동시에 아주 먼곳으로 검은 기운이 뭉쳐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게 추적의 인이군.”

레벨이 A랭크로 올라서며 보상으로 얻은 추적스킬 명황안 웃기게도 숙련도가 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다. 벼르고 벼렸는데 한 달간 추적할 수 있다는 스킬에 적혀 있는 내용이 거짓은 아닌지 작동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명황안에 이상이 생겼다.

명황안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하나가 아니었다. 추적의 인의 개수는 총 세 개... 그것들이 모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기다려봐.

휘이잉

매로 변한 궁기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잠시 공중을 한 바퀴 선회한 후 돌아왔다.

-탐지방해주술, 환영주술, 은신역장술, 역탐지주술 다섯 개야. 저 세 개 모두 정답이 아닐 수도 있어. 확실히 널 겨냥해서 술법을 펼쳤네.

-그렇군.

제황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황안이 만능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크게 기대를 걸지는 않았었다. 궁기에게 들은 천주백가의 실력이라면 오히려 이 정도가 정상이다.

-어떻게 할 꺼야? 만약 지금 당장 공격하는 건 반대야. 전에 말했지?

-그래. 준비된 술자 만큼 무서운 이도 없다.

제황은 궁기가 예전에 말해줬던 내용을 곱씹듯 말했다.

-맞아. 그리고 상대는 이제 너에 대해 잘 알지.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그에 걸맞게 준비했을 테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제황을 불러들인 것일 테다. 물론 제황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온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백린을 때려잡기 가장 좋은 적기라고 제황은 생각했다.

-그래. 일단...

그 말과 함께 사케노오스케들이 우글거리는 크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제황이 말했다.

“차려준 밥상이나 먹으면서 어떤 후식을 준비했는지 보자고... 사냥은 이제 시작이니까.

#2

한 남자가 푹신한 쇼파에 반쯤 드러누워 손에 든 만화책을 읽고 있다.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갖가지 컵라면이며 과자 봉지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이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배부른 파리들이 남아있는 찌꺼기들에 붙어 열심히 식사를 하는 중이다.

-이놈아. 언제까지 만화책만 파고 있을 거냐!

머릿속을 왕왕 울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잔뜩 찡그린 사내가 만화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백린 이노옴!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왕왕 울린다.

”아우! 뻐근해요.“

우드득..우드득..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만화책을 읽다 보니 온몸이 삐거덕대는 모양이다. 기지개를 켠 백린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미지근한 캔 음료 하나를 따서 입으로 가져다 댔다.

꿀꺽...꿀꺽..

-아오, 냉장고가 없으니 미치겠네.

-놈이 왔다.

-알고 있습니다.

뭐 그런 걸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냐는 듯 백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근방에 펼쳐놓은 탐지술법만 수십 개다. 자신이 있는 이 출판사 주변으로는 수일을 공들인 술법진들이 그를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놈이 지닌 추적스킬이 널 찾았다.

-아, 아까 느껴졌던 그 꺼림칙한 느낌이 그거였군요.

백린은 손바닥에 새겨진 검은 눈 문양을 반대편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러자 마치 물에 닦여 나가듯 사라진다. 명황안으로 인해 새겨진 추적의 인이다.

-아, 배고파.

-어떻게 할 거냐. 신중한 놈이니 당장 쳐들어오지는 않을 테지만 놈이 마음만 먹으면 넌 똥싸다가 뒈지는 거야. 그거 봤지?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화살을 막 날려서 9티어 몬스터 죽여버리는 거! 당장에 저 벽을 뚫고 화살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아!

-아, 거 꼭 예를 들어도 똥을...

테이블 위에 던져놨던 먹다 남긴 카레를 한술 듬뿍 떠서 입안에 넣으려던 백린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탕하고 내던졌다.

-답답해서 그런다! 생사 대적이 문밖에 서 있는데 이렇게 속 편한 짓만···.

-그래서 이렇게 주변을 꽁꽁 둘러막았지 않습니까. 그 뭐냐. 핵폭탄이 떨어져도 여긴 까딱도 없다고요.

-이놈아! 굼벵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는 소리소문없이 뒈져. 내가 저 활 귀신들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조상님.

-왜.

-신(身)을 다지고 신(神)을 연단하고 술(術)과 법(法)을 뛰어넘으면 그 길의 끝은 심(心)이죠?

-그래.

굳이 자신이 가르쳤던 술법의 기초를 말하는 백린의 물음에 아니꼬운 어투로 답하는 선조다.

-저는 지금 제 심(心)을 온 힘을 다해 갈고 닦는 중입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준비가 어디 있습니까.

-이···. 이이···.

보고 있던 만화책을 팔락팔락 흔들면서 답하는 후손을 바라보며 어디 그따위 만화책에서 숭고한 심을 찾냐며 한마디 구수한 욕설을 내뱉으려는 찰나 백린이 솜씨 좋게 그 욕설의 서두를 가로막았다.

-이 만화책이 하잘것없어 보이시겠지만, 이 안에는 그것이 궤변이든 혹은 싸구려 진실이든 화자(話者) 각자의 심(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무한한 상상력은 덤이죠. 인간의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바로 책입니다. 그것이 설령 쓰레기라도···.”

읽고 있던 만화책을 덮어 무한고에 던져넣은 백린이 손을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영감도 얻었다고요. 마침 괜찮은 술법 하나가 떠올랐는데 한번 봐주세요.”

그의 레전드 스킬 ‘술(術)의 주인’ 이 발동했다. 그의 양손에서 만들어진 붉은 원 사이에서 입체적인 둥근 원이 둥실 하고 떠올랐다.

“파멸···. 압축···. 흡수···. 형질···. 회전···. 주력···. 대기···. 희생···. 압축···. 상생···! 각성···.”

그의 입이 끊임없이 달싹일 때마다 붉은 원이 검은 글씨를 토해내며 둥근 원에 새겨지듯 파고 들어갔다. 마침내 그의 입이 멈췄을 때 둥근 원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원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글씨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백린은 자신의 손안에 완성된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멋지죠?

-그 끔찍한 혼종은 뭐냐.

후손이 만들어낸 스킬을 한차례 훑은 선조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끔찍한 혼종이라니요. SSS급 닌자에서 주인공 사부가 사용하던 최종 비술이 베이스라고요.

-뭐냐. 술언(術言)은···. 너의 희생으로 다 같이 힘을 내? 너만은 살아남아? 깨달았어? 뭘 깨달아. 우리 함께 힘을 내요? 이거 술법 이름이 뭐냐. 닭살 돋게···.

원의 주변을 돌고 있는 글씨들을 읽어본 백린의 선조가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 만화가 좀 꾸덕꾸덕하고 찌질하거든요. 그렇지만 힘은 확실하죠. 이름은 복수의 왕 각성의 장입니다.

-왕이라니···. 왕이 어디에···. 음? 각성? 너 설마?

백린이 구현한 술법이 어떤 것인지 눈치챈 선조가 외쳤다. 만약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도쿄가···. 아니 일본 자체가 지도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지금 이곳에서 왕의 씨앗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백린이 불러낸 다크어스의 몬스터... 왕의 씨앗... 그 왕이 개화한다면 모르기는 몰라도 일본은 정말 끝장이다.

백린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둥근 원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린이 두 손을 뻗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중얼거린다.

-제황이라는 그 친구 신중하네요. 공격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아마 제가 차려준 밥상이나 먹으면서 기다리겠죠. 선조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사냥꾼이니까. 제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네요. 그 신중함이 독이 될 겁니다. 저는 그 사이에 이것이 잘 익기만 기다리면 되겠죠. 아마 저 숫자를 모두 레이드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아도 일주일 정도겠군요. 후후···. 일주일 정도면 차고 넘치죠.

-그걸 진정 풀어놓을 참이냐. 어쩌면 너와 내 계획에 큰 차질을 줄 수 있다.

선조의 목소리가 신중하다. 그만큼 저것은 보통 술법이 아니다.

-후후···. 무련천가라면 이 정도는 감당해 주겠죠.

-미친놈···. 나도 미친놈이지만 너도 어지간하다.

-천주백가의 핏줄이 원래 이렇다면서요.

-빌어먹을···. 그래. 못 먹어도 고다.

#3

제황이 백린의 움직임을 읽고 있는 것처럼 백린 또한 제황의 움직임을 철저히 읽었다.

그의 예상대로 제황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명황안이 가리키는 곳을 아슬아슬한 사정권 내에 걸친 곳에 자리 잡은 제황은 쉘터를 설치하고 그날은 푹 쉬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사케노오스케의 레이드를 준비했다.

그렇지만 백린이 하나 실수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제황이 레이드 시간을 잘못 예측한 것이다.

백린이 생각한 시간은 일주일···. 비록 6티어몬스터지만, 크립 안에 있을 때는 7티어급의 방어력과 짜임새 있는 무리 공격으로 7티어급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사케노오스케였다.

그러나 사케노오스케에게 제황은 처음부터 최악의 상성을 지닌 포식자였다. 최신예 초정밀 지대지 미사일을 방불케 하는 사거리와 정확도 그리고 몬스터의 방어막을 전문적으로 파해하는 강기

마지막으로 백린이 아직 모르는 것, 그것은 바로 제황이 가진 일반 헌터의 수배에 달하는 마나량이었다.

드드드득...

시위를 당긴 제황의 눈이 매섭다. 짧게 호흡을 가다듬던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줄을 놓았고 비천격에 담긴 애기살이 강렬한 파공음을 만들어내며 튀어 나갔다.

‘비상하며 춤추는 강기의 관통 화살’

퍼어어어엉!

강렬한 소닉붐과 함께 붉은 섬광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마침 크립의 외곽을 유영하던 사케노오스케 한마리다. 여덞 개의 발은 사용하지 않은 채 몸의 꿈틀거림만으로 크립 속을 헤치고 다니던 사케노오스케는 날아오고 있는 화살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돌연 여덞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크립의 심층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어떤 화기도 크립을 뚫지는 못한다. 한참을 내려간 사케노오스케는 안심하고 위를 바라봤다. 이전에 날아왔던 것들과 같이 이곳까지 공격이 닿지 않으리라. 그렇게 안심한 그 순간 붉은섬광은 사케노오스케의 두부 정중앙을 거침없이 파고 들어왔다.

퍼서서석...

푸석푸석한 흙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사케노오스케의 두부가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케노오스케의 입으로 푸른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울어져 크립 밑으로 가라앉는다. 단 한발로 그대로 절명!

-확실히 약점이군.

한 마리의 사케노오스케를 완전히 침묵시킨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무한고에서 화살을 꺼내 비천격에 걸었다. 공군기지에서 포획된 사케노오스케를 정밀부검한 결과 사케노오스케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부분은 총 두 군데였다. 하나는 눈 정중앙 사이에 있는 거의 퇴화하다시피 한 코가 있는 부분의 연골과 배 쪽에 있는 생식기로 보이는 곳이다.

물론 안다고 해도 쉽사리 저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게다가 크립이 지닌 외부공격에 대한 방어력은 어마어마하기에 그것을 뚫고 공격해야 한다. 그렇지만 제황은 그것을 아주 손쉽게 해결해 버렸다.

관통의 화살

바로 화살에 엄청난 회전을 가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행할 수는 없는 것. 그것을 제황은 해냈고 지금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증명이 끝나면 이제 활용해야 한다.

“좋아. 이틀 안에 끝내주지.”

쉬이이이...파아아앙!

한발의 화살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뒤이어 꼬리를 잇듯 수십 발의 붉은 섬광이 하늘을 수놓았다.

“미친...”

그리고 그것을 술법을 통해 관측하고 있던 백린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삼일 안에 끝날 것 같다.

“제길, 안심할 때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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