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203화 (203/301)

# 203

일본의 꿍꿍이-2

#1

“이럴 수밖에 없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도쿄시는 레이드를 성공시켜도 빚더미로 도산입니다. 게다가 궁신님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철수하게 된다면 이 일로 발생할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케이스케가 사정하듯 말했다. 궁신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철수하는 건 그들의 시나리오에 없었다.

“그런가요? 재미있네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좀 다른데.”

그 말과 함께 이루미가 아공간에서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태블릿을 켜고 하나의 영상을 재생시키자 바로 약 한 시간 전 지하로 보이는 회의실에서 이번 게이트 활용방안에 대해 일본정부의 각료들이 논의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대략 그 내용을 간추린다면 이런 것이었다.

게이트의 상업적 이용 시 발생될 기대수익 그리고 게이트로 인해 발생한 역대 최대액수가 될 보험금 지급을 최대한 늦출 방안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것을 영영 묻어 버릴 방안들도 버젓하게 논의대고 있었다. 그것도 일본국민들을 대표하는 이들의 입에서 말이다. 간간이 9성헌터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에 대해서도 논의하며 껄껄 웃는 이의 얼굴도 적나라하게 찍혀 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지요. 저희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지 마시라고요.”

“이, 이걸 어떻게...”

“그걸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이루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이 영상을 찍어온 것은 제황이었다. 아침조회가 끝나자마자 밀령의 정보력을 최대한 이용해 위와 관련되어 있을 법한 정부각료들의 동선을 모조리 파악하라 지시했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이 공군기지 지하에 있는 벙커에 모인다는 것을 파악한 뒤 제황이 직접 그곳으로 침투하였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과거 대현클랜 지하의 비밀연구소에서도 신나게 박살을 내고 다녔음에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던 제황이었다. 열화상카메라든 CCTV든 광학장비로는 제황을 절대 잡아낼 수 없다.

그런 제황에게 이런 영상촬영 정도는 아침운동거리도 되지 않는다. 아니 마음만 먹었다면 그 벙커 안에 있던 이들은 지금 숨쉬지 못했을 것이다.

“어때요? 잘 찍혔죠? 이 영상”

“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케이스케다. 저 영상이 풀리면 자신은 물론이고 일본정부는 말그대로  사면초가에 직면한다. 아무리 일본국민들이 정치에 무지하고 가끔 가해자와 피해자를 혼동하는 개돼지라고 해도 이렇게 노골적인 내용이 유출된다면 정부를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는 희생양을 만들어 이 일을 수습하려 할 테고 그 일 순위는...

“원하는 것이요? 음... 영상 속에 나온 이들이 모두 전격 사퇴하는 건 어떤가요?”

이루미의 조롱하는 듯한 말에 케이스케가 이를 갈며 답했다.

“일본정부를 너무 우습게보시는 건 아닌가요? 고작 그런 영상 하나 풀린다고 저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국민들이 끝내 선택할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의 쥐어짜는 듯한 대답에 이루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전혀 웃기지 않다.

“영국 속담에 제집 문 앞에서는 개도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 딱 그 짝이군. 너야말로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

“우리가 고작 이것을 언론에 폭로하는 짓이나 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런 거야?”

그녀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하는 케이스케였다. 무릇 정치인이라면 목전에 닥친 죽음과도 협상을 해야 한다고 아버지께 배웠지만 지금 그녀의 눈은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야당에 넘기기라도 할 건가?”

보수여당의 총수의 아들인 그의 입장에서는 야당에 자료가 넘어가는 게 가장 껄끄러웠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이루미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상상력이 정말 빈약하군. 우리가 그것만 할 것 같아? 난 이걸 가지고 세계헌터사무국 내의 일본의 영향력을 모조리 지워볼 생각인데... 무려 7성 이상 헌터들을 소집시켜놓고 뒤로는 은근슬쩍 게이트를 보존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세계헌터사무국에서 쫓겨난 일본의 헌터들이 이 사실을 알면?”

꿀꺽...

그녀의 말에 케이스케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은 고작 일본 내에서의 자신들을 걱정했는데 상대는 일본 전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스케일이 아예 다르다. 그런 식으로 써먹는다면 어쩌면 오늘을 기점으로 일본의 레이드 산업은 암흑기가 도래할 수도 있었다.

“원하는 게 뭐지?”

“이번 사태에 대한 모든 작전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국 내에서 벌어진 작전권을 외국의 세력에 맡긴다니 상상할 수도 없다.

그게 외부에 알려지면 그건 일본 정부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격이다.

“내게는 그 정도의 권한이 없어.”

케이스케는 잘라 말했다.

“흠, 종전에는 일본 총리의 직인이라도 받아 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더니 역시 일본의 정치인들은 주둥이가 너무 가벼워.”

“큭.”

마땅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케이스케다. 그리고 그런 케이스케를 냉랭하게 바라보며 이루미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의 작전권을 요구하는 거야. 미쳐서 언제 어느 때 우리를 배신할지 모르는 족속인 것을 잘 아니까. 물론 우리도 당신들의 체면은 지켜주지. 9성헌터를 전담보좌하는 우리 무련천가가 일본정부의 작전고문이 되어 주는거다.”

“작전고문...”

이루미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던 케이스케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정도면 그 영상을 지워주는 건가?”

어차피 그녀가 저 영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일본정부가 꾸민 큰 계획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케이스케의 말에 이루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당신들의 입을 믿지 못한다고 이야기 했어. 과거 우리 대한민국이 당신들의 가벼운 입에 얼마나 많이 속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 당신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우리가 했던 약속에 대한 기억력만큼은 확실하니까.”

이루미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쉰 케이스케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회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마음에 드는군요. 아, 혹시 허튼 짓은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으니까.”

이루미가 태블릿을 까딱까딱 흔들며 케이스케에게 말했다.

케이스케는 흔들리는 태블릿을 바라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런 영상을 저런 구도에서 촬영할 수 있는 정보력이라면 그들이 숨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2

-제황님. 말씀하신대로 끝났습니다. 장악이 모두 끝나는대로 두 번째 계획을 진행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제황님께서 다 하신 것을 마무리 짓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분석이 끝나지 않은 몬스터를 그것도 홀로 레이드에 들어가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한 번 제고하심이... 그리고 제황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이루미가 뒷말을 흐렸다. 이제는 제황이 ‘저는 사실 신입니다.’ 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그녀지만 추정 티어 측정불가 몬스터와 백린이라는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수 있는 제황이 우려스럽기 그지없었다.

케이스케에게는 제황이 철수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제황은 지금 오오가무시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좀 더 시간을 두고 레이드를 결정하라고 조언했지만, 제황의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믿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제황의 단 한마디에 이루미는 가타부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믿으라고 한다면 이루미는 그냥 믿기로 했다. 제황은 그녀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존재 자체가 불가해하며 그녀가 알고 있는 제황의 업적 또한 불가능한 것들뿐이었고 모두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이루미가 생각하기에 만약 제황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과 같았다. 그것이 행여 제황의 대한 호감 때문이든 아니면 궁기가 사용한 술법 때문이든 튼튼한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무련천가 구성원들의 결속은 더욱 강해졌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이루미와의 통화를 끝낸 제황은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달리는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속도가 빨라지자 주위 전경이 뒤로 물러나는 속도가 빨라졌다.

제황은 몬스터자원팀장의 사케노오스케나 오오가무시의 대공능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예상에 따라 최대한 헬기를 타고 이동한 후 도보로 이동하는 중이다.

굳이 예상이 아니라도 실제 사케노오스케의 워터브레스는 공중 공격이 가능했었다.

탁! 타탁!

마치 과거에 봤었던 인적이 사라진 도시에서 살고 있는 단 한 명의 인간이 된 기분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제황이다. 네비게이션을 통해 수시로 위치를 갱신하며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한 대로를 따라 묵묵히 이동하는 제황이지만, 혼자라는 고독감 따위는 전혀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말 못하는 개 한 마리가 유일한 친구였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훨씬 수다스러운 아가씨가 하나 있었으니까.

-랄랄라! 혼자 다 먹는다! 냠냠냠! 마나석아 기다려라! 마나석은 모두 내꺼! 9티어도 내꺼! 10티어도 내꺼! 제황이 파이팅!

-머리 울린다.

-호호, 알았어. 근데 우리 조금 돌아가면 안 될까? 여기 근처에 미슐랭가이드 별 두개짜리 제과점이 있는데 분명 근사한 게 남은 게 있을 거야!

뭐 그리 좋은 일이 있는지 오는 내내 수다가 끊이지 않는 궁기다. 평소에도 일상과 같은 일이지만 이상하게 어제 제황이 이루미와 나눈 대화를 들은 후로 그 수다스킬이 더 강력해졌다.

-약탈이 목적이냐.

-약탈이라니! 어차피 주인도 없을 것! 우린 정당하게 보급을 받는 거라고! 보급 몰라?! 치중! 원래 빈털터리 주인공들이 남에 집에 당당하게 들어가 물건 털잖아.

-게임 이야기 따위를 실생활에 접목시키지 마.

-음? 그래도 모두 정의의 사도라고 칭송하던데. 아니야?

뻔뻔함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황이 말했다.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이 이미 다 털어갔을걸.

이루미의 보고로는 현재 도쿄 내에는 정부의 피난명령을 무시한 약 오십만 명의 시민들이 남아있다고 했었다.

-음. 그런가. 쳇. 그럼 역시 일본 맛집 탐방은 힘든 것인가. 저번에 털린 간식창고를 다시 꽉꽉 채울 역사적 사명이 있건만...

베히모스를 무한고에 쑤셔 넣느라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던 초콜릿에 대한 미련이 아직 많은 듯 보이는 궁기다. 더이상 궁기와 헛소리 문답을 나누기를 포기한 제황은 슬슬 속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제황은 레이드 시작 전 지형탐색과 함께 최적의 저격장소 및 변수 출현에 대비한 1차 2차 3차 안전지대 확보를 위해서는 최소 이틀 정도 크립이 있는 부근을 탐사할 생각이다. 궁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번 일에 백린이 연관되어 있다는 심증을 가진 제황은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고된 작업이지만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 꽤 많이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도 안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연히 모두 벙커에 들어가 있지.

-에. 그렇다면 절대멸망 디스토피아 시티는 없다는 건가.

-미드 좀 그만 봐라.

근래 볼 한국드라마가 없다며 슬슬 온라인게임과 미드로 넘어가고 있는 궁기의 말에 제황이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마 그녀가 요즘 보고 있는 게 좀비로 가득 찬 도시에서 살아남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미드 같은데 그 안에서 보면 사람들은 좀비들 뿐 아니라 인간과도 서로 투쟁하며 하루하루 생을 연명한다. 물론 이쪽 현실도 좀비 영화를 우습게 뺨칠 정도로 스펙타클한 몬스터와 싸우는 동네지만 최소한 이쪽 동네에는 습격에 대비할 벙커시설이 확실히 구비되어 있다.

물론 물과 전기가 끊긴 건 변함없기에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일 테지만 최소한 영화에 나오는 그런 세기말 막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타탁! 탁탁! 탁!

-좀 더 빨리 가야겠어. 부탁해.

-응.

건물 벽을 마주 박차며 공중으로 뛰어오른 제황을  붉은매로 현신한 궁기가 솜씨 좋게 낚아챘다.

-택시비 6티어 10개!

-내릴래.

-싸게 5개에 모십니다.

-얼른 가자.

적당히 유지해야할 긴장까지 흩어 버리는 궁기의 농담을 한 귀로 흘리며 전방을 주시하는 제황이었다.

#3

쏴아아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동한 제황은 고작 3분도 되지 않아 멀리 오오가무시의 거대한 몸집이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크립이네.

-응.

제황은 사면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빌딩 옥상에 내려섰다. 옥상 끄트머리로 가서 밑을 바라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라색의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다.

마치 바다로 보일 정도로 거대하지만 파도나 일렁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보라색 액체를 헤치고 솟구치는 거대한 몸체들이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킨다.

“생각보다 크네.”

여덟 개의 다리를 배면에 붙일 채 크립 내부를 유영하는 사케노오스케는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거대했다. 그러나 저 멀리 뿌옇게 보이는 오오가무시를 보면 사케오노스케가 피라미 정도로 보일 지경

일렁거리는 거대한 게이트에 반신을 걸친 오오가무시의 몸에서 흐르는 크립은 마치 점액질로 이루어진 폭포와 같은 느낌이었다.

-표현이 더러워.

-적절하다고 해줄래? 그보다 정말 크군.

-그건 동감.

구오오오...

오오가무시로부터 시작된 은은히 느껴지는 진동파가 크립의 호수에 거대한 파형을 일으켰다. 밑을 자세히 보니 수면 속으로 거대한 발들이 보였는데 그것들을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다.

“후우”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제황의 일차 목표는 저 거대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오오가무시를 한참을 노려보던 제황이 궁기에게 물었다.

-어때?

-게이트가 불안정해. 인위적으로 만든 게 맞아.

-역시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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