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99화 (199/301)

# 199

선남선녀-2

#1

“감히 내 구역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나를 방해해!”

사쿠라 클랜의 클랜마스터 유키오가 허리춤의 일본도를 뽑아 들었다.

한 마리의 용이 음각된 은은한 검은색의 명도다.

“흐읍!”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기합을 외치자 도신으로부터 수증기가 일렁거리듯 붉은 마나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하나로 뭉쳐 휘감았다. 마나를 무기에 주입할 수 있는 5성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이기는 하지만 일단 마나가 덮인 무기에 평범한 헌터들은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너희가 아무리 여자라도 내 검에 자비는 없다. 그렇지만 이번만 특별히···.”

나름 멋지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을 끊은 츠카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각성하고 지금껏 그 수준에서 멈춰 있는 주제에...”

촹!

츠카사라는 여인 또한 창을 곧추세웠고 그녀의 창두에서도 일렁이는 푸른 아지랑이가 일어나 하나로 뭉쳤다.

“너야 말로 물러나지. 피보기 전에...”

“칫, 정말 한번 해보자는 건가?”

비장의 무기를 꺼냈건만 상대 또한 그와 같은 수준이다. 붙으면 분명 곱게 끝나지는 않을 테지만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저 미녀의 앞에서 꽁무니를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리고 이 일촉즉발 속에 휘말린 제황이 피곤한 눈으로 둘을 바라본다.

-뭐냐? 저 중2병들은...

-매우 상투적인 클라쉐인데 의외로 많이 벌어지는 상황?

-저 여자는 또 뭐야.

-네가 하나 꼬신거지 뭐. 축하해.

-하아.

궁기의 경쾌한 답변에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고 저거고 간에 기분 전환은 애초에 물 건너갔다. 제황은 그들을 무시한 채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냥 가?

-내가 저기 손을 섞으면 흉본다.

-그건 그렇지만...에이, 뭐 어쩔 수 없지.

뭔가 재미있는 상황을 기대했던 궁기 또한 김빠진 표정으로 제황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저들은 저 쪽팔린 상황에서 제황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저 자식 뭐야!”

“도망친다! 막아!”

사쿠라 클랜의 클랜원 하나가 빠르게 막아서더니 제황의 얼굴을 향해 대뜸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서 일어나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그 주먹질에 제황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것은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헌터는 기본적으로 인간 병기이기에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헌터응시시험 필기과목 중 윤리와 헌터법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헌터가 괜히 손 한번 잘못 놀리면 그대로 사람이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것을 이렇게 함부로 휘두른다는 건 평소 상대가 인명을 얼마가 가볍게 여기는지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주먹을 날리던 그는 상대가 자신의 주먹에 맞아 떡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먹이 거의 상대의 얼굴에 닿을 즈음 그는 상대의 눈과 마주쳤고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그것은 유리알처럼 무감각한 무기질을 바라보는 눈이다.

투툭...

남자의 주먹은 허무하게 공중을 갈랐고 그는 마치 실 끊어진 꼭두각시마냥 그대로 바닥에 툭 쓰러져 버렸다.

“뭐야? 쟤 왜 저래?”

“무슨 일이야?”

헛손질을 한 건 둘째치고 공격하던 동료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자 사쿠라 클랜원들은 당황했다.

“야! 일어나!”

“뭐하는 짓이야!”

몇몇이 그 남자에게 외쳤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하긴 완전히 정신을 놓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 꼴을 지켜보던 반요 클랜의 츠카사가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호호호, 저거 쪽팔려서 못 일어나는 것 아니야?”

“크윽”

그녀의 비아냥에 사쿠라클랜의 유키오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치워!”

“예!”

그가 외치자 몇몇이 나서서 바닥에 쓰러진 그를 부축한다.

그 와중에도 사내 셋이 제황과 궁기를 촘촘히 포위하기 시작한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셋이 제황을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움직이면 죽여버린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방만한 태도가 아니다. 상대가 허접스러운 헌터가 아니라 걸 깨달은 것이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동네에서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지만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강자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굳이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당장 스마트폰을 켜고 영상 검색만 해도 인간 같지 않은 괴물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자신들은 꿈에 볼까 두려운 5티어 6티어 몬스터들을 밥 먹듯이 레이드 하며 다니는 진짜 헌터들은 알아서 피한다. 알아보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그 실력에 준하는 화려한 방어구, 혹은 무기들을 자랑스럽게 패용하고 다니고 또 그런 것이 없더라도 벌어들이는 돈이 워낙 어마어마하기에 몸에 걸치고 다니는 명품들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지녔음에도 지금 제황을 못 알아보는 건 그의 복장 때문이었다. 일본의 헌터들은 외출시에 대부분 방어구를 착용한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 경보를 만날지 모르는 건 둘째치고 그 자체가 자신이 헌터라는 걸 증명하기 때문에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입고 다니는 편이다. 그렇지만 제황은 청바지에 운동화는 둘째치고 위에는 가벼운 후드집업을 걸쳤다. 모르고 본다면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리라.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마나의 흔적조차도 없었다.

강력한 마나엔진을 지닌 헌터들은 항상 마나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흘러나온다.

가만히 있어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물론 그것은 제황에게 그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 건 여의용혈신공의 격이 너무나 높아 마나에 대한 통제가 워낙 강력하여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리고 오늘 재수 없게 제황을 만난 셋은 앞에 쓰러졌던 이와 똑같은 자세로 나란히 허물어져 버렸다.

투툭...툭

또다시 벌어진 괴사에 사람들이 모두 제황을 주목했다.

아무런 공격도 보이지 않았건만 이번에는 셋이 쓰러진 것이다.

그때 클랜마스터인 유키오가 사방을 돌아보며 외쳤다.

“누구냐! 나와라!”

그의 상상력으로는 지금 가만히 서 있는 제황이 뭔가 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외부의 조력자가 저 남자를 돕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제황은 저치가 떠들든 말든 제 갈 길만 가고 있다.

저들과 손을 섞는다는 건 마치 프로 UFC 선수가 유치원 꼬마들과 진지하게 시합에 임하는 것과 같기에 진지하게 임하려야 임할 수가 없는 것. 그러나 제황의 그 행동이 오히려 유키오의 심기를 자극했다.

만약 저놈을 그대로 보내게 된다면 자신들은 더 이곳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를 질끈 깨문 유키오가 외쳤다.

“어쩔 수 없군. 야마다상!”

“의뢰인가?”

유키오의 외침에 걸쭉한 목소리와 함께 뒤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클랜원들이 모두 뛰어나올 때도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뒤늦게 합류한 남자다.

스르릉

등에 걸려있던 거대하고 묵직한 대검을 뽑아 어깨에 짊어진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단신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자 반요 클랜의 츠카사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금 등장한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었는데 그녀가 보기에 그는 절대 이런 곳에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설마! 천황클랜의 야마다? 축출되었다더니 왜 여기에!”

“흠, 입을 함부로 놀리는 아가씨군. 축출이 아니라 내 발로 걸어 나온 것이다. 그건 그렇고 꽤 예쁜데? 일 끝나면 보자고...”

“흥!”

츠카사의 몸을 게걸스럽게 훑으며 답하는 그는 본래 천황클랜에서 공격대장까지 지냈던 고위헌터였다. 비록 여성 헌터들에게 벌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쫓겨나기는 했지만 천황클랜 내에서는 6성에 다다랐다고 평가받던 근접딜러계열의 디바우저였다.

“전부 제압해주면 되는 건가?”

“그렇소.”

“저년도 내가 먹는다. 불만 없지?”

“끙···. 알겠습니다.”

그가 궁기를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유키오가 이를 갈며 답했다.

그를 부른 순간 이미 여자는 단념했다. 지금은 클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할 때다.

“일단 저 버릇없는 애새끼 발목 먼저 잘라 놓으면 숨어있는 놈들도 나서겠지.”

타탓! 퍼어엉!

말과 함께 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너무나 빠른 움직임에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가 사라진 것처럼 느낀 것이다.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순식간에 제황의 옆으로 날아든 그의 대검이 제황의 다리를 휩쓸었다. 말 그대로 발목을 노린 한 수!

“위험해!”

츠카사가 외쳤지만, 막상 그 당사자인 제황은 태평하다. 양손마저 윗주머니에 넣은 제황이 한 것은 발을 가볍게 든 것뿐이다. 그의 발밑으로 대검이 휩쓸 듯 지나가고 들었던 발끝을 가볍게 뻗어 야마다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푸욱...

“커헙”

숨이 멎는 소리와 함께 야마다의 허리가 새우처럼 휘어졌다. 빠른 공격도 아니건만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뻗어진 발끝이 그의 명치를 찔러 버렸다.

“이, 이자식이!”

그러나 야마다는 그것을 버텨냈다. 찰나지만 그의 체내마나가 그 공격을 어느정도 방어해 낸 것이다. 그가 이를 갈며 대검을 쥔 손에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대검에서 막대한 마나가 뭉치기 시작했다.

상대를 죽여버리겠다는 살기로 불타오른 그가 전력을 다해 대검을 올려친다.

“흠...”

나름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회심의 한 수였건만 상대가 버텨내자 제황은 이채롭다는 눈으로 야마다를 바라봤다. 이 전까지는 적당히 하기 위해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목숨을 내놓고 사는 헌터라지만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상대는 맨몸으로 상대하면 좀 골치 아파 질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쉰 제황은 아직까지도 상대의 명치를 찌르고 있는 발의 발바닥을 가볍게 붙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마치 대포에서 쏘아낸 듯 뒤로 날아간 야마다의 몸이 건물 벽에 처박혔고···.

쾅! 쾅! 콰쾅!

세 번의 요란한 소음이 더 울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쉬이이...

“허어어어...”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상황이다. 그러나 명명백백 현실 속에 일. 무려 6성헌터가 옆차기 한방에 벽을 뚫고 날아간다? 몰래카메라라도 이 정도면 개연성이 너무 없다고 욕할 미친 상황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특히나 가장 놀란 것은 사쿠라 클랜의 유키오였다.

“뭐...뭐...뭐야.”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6성헌터를 데려오기 위해 그가 야마다에 입에 쑤셔넣은 돈은 클랜이 보유한 자산에 10프로에 달했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옆에 붙여준 여자들만 해도 열손가락이 모자랄 지경

그뿐일까. 워낙 콧대가 높아 일을 의뢰하면 따로 의뢰비를 주기로 계약까지 한 상황이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그의 힘을 보려 했건만 믿고 믿었던 에이스 카드가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허망해서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그리고 이 상황의 범인인 제황은 뻗은 다리를 가볍게 접어 이내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기는 했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이대로 돌아가 그냥 잠이나 잘 생각인 그였지만 또다시 그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위이이잉! 끼이이익!

무려 세 대의 무장버스들이 나타나 현장에 모여있는 헌터들을 둘러쌌다.

동시에 무장버스의 문이 열리고 일본헌터사무국의 제식 방어구를 걸친 수십 명의 헌터들이 쏟아져 나와 주위를 촘촘히 포위했다.

“모두 꼼짝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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