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98화 (198/301)

# 198

선남선녀-1 (수정)

#1

“드론에 부착할 예비부품 박스는 옮겼나?”

“아직입니다.”

“베이스센터가 완성되는 즉시 모두 옮길 테니까 적재창을 깨끗이 비워. 헬기는 언제라도 날아오를 수 있어야 돼. 20시까지 끝내고 모두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가자.”

한 무리의 건장한 남자들이 그의 말에 답한 후 타이타이아 MV-1 초대형 수송헬기 뒤편의 화물 적재문으로 신속히 걸어 들어간다. 그들을 지켜보던 운영지원팀장이 들고 있던 태블릿으로 헬기에서 내린 적재물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던 중 문득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제황님.”

“고생하시네요.”

“아, 아닙니다.”

황송하다는 듯 굽신 거리는 운영지원팀장이다.

“쉬엄쉬엄 시키세요.  아직 레이드 일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황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 레이드 일정은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세계헌터사무국에서 꾸준히 몬스터와 현장 정보를 보내주고는 있지만 서류와 현장의 상황은 언제나 다른 법이다. 정오에 이곳 요코다공군기지에 내려서자마자 각 팀장들은 주일미군이나 자위대등과 접촉하며 본격적으로 현지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제황의 말에 운영지원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제황님을 완벽히 서포트하기 위해서는 유사시에 모두 한 몸과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꾸준한 반복만큼 좋은 게 없죠. 모두 한창 열의에 빠져 있어 오히려 지금 제대로 잡지 않으면 앞으로 더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예.”

“알겠습니다.”

이런 쪽으로는 굳이 참견할 생각이 없다. 그 자신보다 팀장이 훨씬 더 잘 알테니.

“불편하신 점은 없습니까?”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다. 다만 저걸 보면 좀 씁쓸하네요.”

팀장의 말에 고개를 돌린 제황 또한 팀장이 본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군기지에 광활한 활주로는 수천 개의 천막이 점령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어깨가 축 늘어진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인들이 있기에 기본적인 치안은 잡혀있지만 워낙 비좁은 공간 안에 수만 명이 몰려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 힘들어 보인다.

생필품이 부족한 건 당연하고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조차도 힘들다. 모두의 얼굴에는 피곤과 불안함 그리고 슬픔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나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도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워낙 많은 까닭에 그들에게 대피하라는 방송조차도 못하고 있는 게 작금의 도쿄였다. 그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 졸지에 도쿄 안에 갇힌 이들은 전기와 물조차도 끊긴 곳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아주 악취미입니다.”

“네?”

팀장의 씁쓸한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팀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부러 이쪽이 잘 보이도록 위치를 배정한 겁니다. 저들을 보고 제황님이 부담감을 느끼도록...”

“설마요.”

“사실입니다.”

“흠”

제황의 이맛살이 꿈틀했다.

저들의 고통이 가짜는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 저것을 제황에게 보이는 것이 누군가의 연출이라면 매우 기분이 나쁘다. 물론 그것이 저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짓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최소한 제황이 이곳에 와서 본 일본 고위관료들의 생활환경을 보자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꺄아아”

“나 잡아봐라!”

그나마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진 곳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뛰어노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제황에게 팀장이 말했다.

“바람 좀 쐬러 가시죠. 근방에 헌터들이 주로 이용하는 번화가가 있으니 기분 전환이 되실 겁니다. 낮동안에 많이 좀 시달리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모로...”

"그렇죠. 후"

의미심장한 팀장의 말에 제황이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군시설이기에 기자따위가 얼씬하지는 못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 때문에 심력을 쏟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예. 맡겨 주십시오."

이때까지 제황은 몰랐다. 지금의 외출이 앞으로 더욱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 될 줄은 말이다.

#2

“아이잉, 인상 좀 풀어.”

“그. 코맹맹이 소리만 좀 없애봐.”

제황은 그의 오른팔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 나 정도의 미녀로도 성이 차지 않는 거야?”

“...”

그녀의 말에 제황이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자 마치 그 시선이 부끄럽다는 듯 볼을 빨갛게 붉히며 몸을 베베 꼬는데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이들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남성들뿐만 아니라 일부 여성들까지도 그녀를 보며 감탄과 함께 열기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은 진정 성을 초월한 매력이리라.

9티어 마나석 3개에 자잘한 것까지 치면 거의 수도권 도시 예산 정도 되는 금액을 꿀꺽한 궁기는 이미 과거의 4티어 마나석 잘못 먹고 배탈 나던 궁기가 아니었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그녀는 제황의 마음마저도 흔들 지경이 되었다.

제황 또한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느낌이지만 이내 여의용혈신공의 힘으로 그것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쳇, 재미없어.”

“재미없으면 떨어져.”

“흐흥, 그건 싫어.”

궁기의 표정은 언제나 싱글벙글하다. 제황이 이렇게 무심한 듯 말해도 세상에서 제황에게 가장 중요한 게 누구인지 알고 있는 궁기였다. 심령으로 이어져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피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게 편하다.

사방을 둘러보던 궁기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여기 참 웃기네.”

“뭐가?”

“뭐긴 개나 소나 전부 후드를 쓰고 다닌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제황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 말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갖가지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후드 축제라도 하냐고 물어볼 지경이다.

후드라는 옷은 헌터들이 많이 애용하는 패션아이템인 것은 맞다.

머리에 뒤집어쓰는 형식이니 야전에서 주로 활동하며 마주치는 강렬한 햇빛과 오염물질 따위를 막기도 좋고 결정적으로 얼굴을 감춰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적격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거의 모든 헌터들이 후드가 유행을 타게 된 건 제황의 책임이 컸다.

“화, 아주 종류별로 파네.”

궁기가 제황의 손을 끌고 옷가게의 쇼윈도로 향했다. 그곳에는 약 삼십여 가지의 후드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가장 많은 건 지금 제황이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다.

“덕분에 네가 안 튀어서 좋잖아?”

“그건 그렇군.”

전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오히려 안 쓰고 있는 게 이상하다.

패션에 무감각한 제황도 후드 모으는 취미는 있기에 진열된 것을 하나하나 살핀다.

그때였다. 거대한 손 하나가 제황과 궁기 사이를 파고들어온다.

“흐흐흐... ”

그 손의 주인은 뒤쪽에서 성큼성큼 접근해 온 반짝이는 대머리의 거한이었다. 검붉은 피부에 두툼한 근육이 인상적인 그는 대끔 궁기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물론 붙잡으려 했다는 것뿐이지 궁기가 순순히 붙잡혀 줄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손이 순간 잔상을 일으키며 사내의 턱을 올려쳐 버렸다. 아주 짧은 간격 안이지만 찰나의 순간에서도 완벽한 펀치를 올리는 궁기였다.

퍼어어어억! 쿠웅

“커억...”

궁기의 원인치 어퍼컷에 얻어맞은 거한이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동시에 쇼핑 중이던 제황이 고개를 돌려 거한을 바라봤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사방이 제황의 간격 안이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파악했다.

“귀찮아질 것 같은데”

거한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지만 문제는 멀찌감치 서서 그 꼴을 지켜보던 그의 친구들이다.

“뭐야! 사토시가!”

“야! 정신 차려!”

큼지막한 벚꽃이 음각된 방어구로 통일한 다섯의 사내가 거한을 둘러싸고 있다가 제황과 궁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외쳤다.

“감히 우리 사쿠라 클랜을 건드리다니!”

그들이 내뿜는 흉악한 기세에 거리를 걷던 이들이 모두 분분히 도망친다.

사쿠라 클랜은 이 번화가 주변을 세력권으로 삼고 있는 클랜이었는데 질이 안 좋기로 유명한 중소 클랜이었다.

일본의 클랜들은 주로 과거 번성했던 야쿠자들의 조직 형태와 운영방식을 클랜이 차용하여 발전시켰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야쿠자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본래는 일본을 지배하는 천황클랜 산하의 클랜이었으나 근래 천황클랜의 수뇌부가 일제히 증발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천황클랜이 내치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되자 서서히 자신들만의 세력을 키우며 세를 불리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웬걸 단물 좀 빨려 했더니 도쿄 중심에 갑자기 초거대 게이트가 나타나 도시 전체가 어수선해지고 군이 치안을 맡으면서 헛짓거리 하기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그래서 기분 좀 풀 겸 클랜회식을 나왔다가 눈에 번쩍 띄는 미녀를 발견하고는 평소 하던 데로 수작을 부렸고 결국 이 꼴이 난 것이다.

단 한방에 클랜의 3성 헌터 사토시가 인사불성이 되자 상당히 강한 헌터를 건드렸다고 생각한 무리 중의 우두머리가 외쳤다.

“상대는 헌터다. 클랜 전부 나오라고 해!”

“예!”

그의 명령에 두 사내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근처 식당에서 수십 명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순식간에 제황과 궁기를 수십 명의 헌터들이 둘러쌌다.

“무슨 일이냐.”

헌터들을 헤치고 머리하나는 더 큰 중년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일본 전통의 무사복과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입은 그의 허리춤에는 두 개의 검이 패용되어 있다.

“클랜마스터, 저 년 놈들이 감히 사토시를...”

“뭐?”

고리눈을 한 채 아직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한을 바라본 그가 고개를 돌려 제황과 궁기를 노려본다.

“누가 감히! 호오...”

한바탕 노호성을 치려다가 궁기의 얼굴을 보고는 금세 그 표정에 음심으로 가득해진다.

이미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있는 그였지만 단연코 저런 미녀는 난생 처음 봤다. 일생에 단 한번 볼까 말까한 초미녀의 등장에 그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팔짱을 끼고는 제황을 향해 말했다.

“어이, 난 사쿠라 클랜의 클랜마스터 5성 헌터 미시마 유키오다. 보아하니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손을 쓴 것 같은데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줄 테니 그 여자만 놓고 가라.”

“흐흐흐”

그 말을 하면서도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궁기의 전신을 훑는데 정신이 없다. 보면 볼수록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그는 속으로 좋아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진정한 내 반려를 만나는구나.’

그가 제황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아량이 넓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남자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줘 여자로 하여금 실망하게 만들기 위한 노림수인 것이다.

“썩 안 꺼지고 뭐하는 거야!”

“자식이 감히 어디서 주먹을 써!”

실제로 저 사토시라는 거한을 떡으로 만든 건 궁기였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궁기의 공격을 본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빠름이라는 단어를 넘어서서 극쾌의 한계에 다다른 그녀의 주먹을 그나마 눈치라도 챈 건 바로 옆에 서 있던 제황 밖에 없었다.

설마 저 여리여리한 미녀의 주먹이 한 짓이라고는 생각 못한 채 옆에 서 있는 허우대만 멀쩡한 제황이 범인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쿠라 클랜이었다.

“흐음”

물론 궁기와 제황의 얼굴에는 일점의 긴장조차 묻어있지 않다. 오히려 조금 귀찮다는 표정의 제황이 왠지 흥미진진해 보이는 궁기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결자해지”

“에?!”

제황의 말에 궁기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제황을 올려다본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하는 그녀지만 지금의 장면은 그녀가 좋아하는 막장 헌터드라마 클라쉐로 보자면 남자 주인공이 멋지게 나서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주인공의 얼굴에는 귀찮음만이 가득했다.

“허...”

이 모습을 보는 사쿠라 클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궁기의 삐죽거리는 얼굴마저도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저 허우대를 치워버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여인의 저 사랑스러운 표정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그런데 이때 정말 의외의 반전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한 떼의 여성들이 대치 현장에 끼어들었다.

모두 같은 클랜인지 전부 붉은색 일색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시원하게 가슴이 파여 노출이 심하다. 모두 등에 기다란 창을 맨 그녀들은 일사불란하게 나타나 제황과 궁기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순식간에 두 세력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그녀들의 선두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흑발의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여인은 고혹적인 붉은 입술에 얇은 미소를 지닌 미녀다.

평생의 동반자가 될 여인을 만나 들떠있던 미시마 유키오는 대끔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는 여자들의 선두에 서 있는 미녀를 바라보며 외쳤다.

“스즈무라 츠카사! 너희 반요 클랜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

“흥! 도쿄가 위태로운 이때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런 짓을 하다니! 나 반요 클랜의 스즈무라 츠카사! 좌시할 수 없다.”

그 말과 함께 뒤로 고개를 슬쩍 돌린 츠카사라는 여인이 제황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호홋, 제가 지켜드릴게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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