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Legacy -2
#1
이루미는 제황의 뜻을 매우 완곡하며 부드러운 어투로 바꿔 세계헌터사무국에 전달했다. 비록 기자회견에서는 그들을 비판하고 대립각을 세웠지만 세계헌터사무국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해야 하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단체였기 때문에 행여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이라면 그들 또한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사무국장처럼 권위주의에 찌든 고집불통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제황의 필요성을 절감했든 혹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든 기자회견이 끝나는 즉시 일본의 입김이 들어갔던 것이 분명한 ‘참고인 소환’ 이라는 카드를 거둬들임과 동시에 곧바로 제황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날렸다.
비록 그것이 격식을 차린 정식 사과라기보다는 세계헌터사무국의 공식 SNS 계정을 이용한 사무총장의 사과 메시지뿐이었지만 제황은 그 정도로도 만족했다. 장문의 한글로 이루어진 메시지 속에 세계헌터사무국의 사무총장이라는 이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후 레이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일체 신경을 끊기로 한 제황은 무련천가에 향후 있을 도쿄 레이드에 대비하여 새롭게 출현한 두 몬스터에 대한 자료를 모으도록 지시 내렸다.
일본은 어서 빨리 도쿄에서 몬스터를 몰아내달라고 언론을 통해 연일 징징거렸지만, 레이드라는 건 그렇게 기분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게이트가 안정화되긴 한 상태이니 일단 진득하게 관찰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새롭게 발견된 신종 몬스터들임과 동시에 매우 신기한 물질을 전투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보라색 액체의 성분 구성표입니다.”
몬스터자원팀장이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화면상에는 수십 개의 화학식 기호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글씨들이 빼곡히 나타났다.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제황마저도 멀미가 나는지 눈살을 찌푸린다. 눈치 빠른 운영지원팀장이 말했다.
“그걸 보여주신다고 우리가 압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음, 생각 같아서는 저 보라색 액체에 대한 레포트라도 써오라고 하고 싶지만 여긴 대학이 아니군요.”
“아 또 나오셨어. 레포트 폭격”
“아, 조별과제의 악몽이 떠오르는군.”
죽이 잘 맞는 운영지원팀장과 대외업무팀장이 서로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 대외업무팀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 조별팀장이었군요. 아마 무슨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삽입해서 조 전부가 D를 맞았었지요?”
“네. 조원 놈들이 죄다 핑계를 대며 조별과제에 참석을 안 하기에 그냥 자폭해 버렸죠. 물론 당시 저 빼고 전부 커플이라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닙니다.”
“오호, D학점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그런 비극이...”
“제가 저만이라도 따로 레포트 대체 해달라고 사정사정을 했지만 끝내 외면하셨지요. 물론 당시 악몽에 뒤끝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하하하하”
그들의 만담에 브리핑룸에 있는 이들의 입에서 모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중국레이드를 준비할 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는데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건 원래 과묵한 경호팀장과 브리핑룸에 각팀장들이 대동하고 들어온 과장급의 인물들이다.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보라색 액체가 가진 가장 대단한 능력은 바로 모든 외부공격에 대한 탁월한 방어 능력일 겁니다. 재미있는 건 이게 아주 간단한 과학적 상식으로 이루어진 능력이라는 건데 모두 과학시간에 ‘점탄성 원리’ 라는 것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
그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자 머쓱해진 노교수는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 점탄성 원리는 흔히 녹말풀에 충격을 가했을 경우 고체와 같이 단단해지는 원리를 말합니다. 저 보라색 액체는 이 원리를 기반으로 데미지를 흡수하는 거지요. 물론 그 보라색액체가 녹말 따위로 되어 있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훨씬 더 강력한 성질로 되어 있어서 보시다시피 벙커버스터류의 미사일까지도 가뿐히 방어합니다. 액체이니 화염계 데미지에 특히 강점을 보이는데 파해 방법으로는 보라색액체의 냉각이나 혹은 점탄성 원리를 무력화할 물질을 대량 살포하는 게 답입니다. 제황님 같은 경우라면 보라색액체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유인하신 후 저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시겠죠.”
“그렇군요.”
몬스터자원팀장의 말이 끝나자 다음으로는 운영지원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브리핑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브리핑이 끝나자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고래모양의 몬스터인 사케노오스케는 액체 밖으로만 유인하면 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세계헌터사무국에서 보내 준 자료에는 액체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공격했을 시에는 헌터들의 공격이 꽤 잘 먹힌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입에서 내뿜는 액체브레스를 제외하고는 특이점이 없었습니다. 아 물론 다크어스의 몬스터 답게 상위티어 치고는 협동공격에 익숙하다는 것도 특징이겠지요.”
“그 말은 이번 레이드의 가장 관건은 그 오오가무시가 가장 문제라는 건가요? 티어 측정조차 되지 않는...”
“예. 현재 집계된 숫자로 451마리의 사케노오스케가 도쿄를 점령하고 있지만 레이드의 성공 여부는 바로 오오가무시의 레이드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루미의 말에 지원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다지 대단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오오가무시였지만 그 몬스터는 존재만으로도 문제였다. 사케노오스케의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보라색 액체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액체를 항상 몸에 두르고 있어 방어력이 무시무시하다. 게다가 그 자체로도 강력한 마나 방어막을 지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크기는 무려 체고만 100미터... 말이 100미터지 그냥 어지간한 산크기다. 단순 계산상으로만 그 방어력을 계산해도 오오가무시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핵폭탄급의 파괴력을 일시에 퍼부어야 한다는 계산이 도출되어 장내의 있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오오가무시가 지닌 능력이 고작 그것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운영지원팀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스크린에는 특정시간대별로 움직이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그려져 있다.
“추정 상으로 오오가무시는 사케노오스케의 무리군주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무리군주요?”
“예. 당시 관측 결과 사케노오스케는 매우 유기적인 협동공격 패턴을 보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오오가무시가 있었지요. 또한 그에 뒷받침할 근거는 일단 다크어스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 중 위와 같은 무리군주가 다스리는 군집체 성향의 몬스터가 다수 존재한다는 것과 오오가무시가 주일미군에 의해 직접 공격을 당하자 사케노오스케들의 오오가무시에 대한 방어가 더욱 촘촘해졌다는 것을 근거로 할 수 있습니다.”
오오가무시의 대한 폭격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오오가무시를 중심으로 뭉치는 사케노오스케의 움직임이 그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오가무시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느냐가 관건이군요.”
“예. 저희들이 내린 결론도 그렇습니다.”
장내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분석이 끝나기는 했는데 딱히 이렇다 할 공략점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오오가무시의 방어력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 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침묵을 깬 제황이 입을 제황이 몬스터자원팀장에게 물었다.
“몬스터자원팀장님.”
“예. 제황님.”
“팀장님이 생각하기에 오오가무시의 방어력을 최대치로 추정했을 때 대략 얼마 정도 될까요?”
제황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곧 자신의 앞에 놓인 태블릿을 빠르게 조작하더니 이내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이건 정말 단순 계산을 통한 겁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계산 결과 대략 강철판 5000mm 정도라고 나왔습니다.”
“허어, 5000mm”
그의 말에 경호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이 5000mm지 단순히 말해서 5미터 가량의 두께를 지닌 철판을 몸에 두르고 있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맞다면 인류가 가진 최강최악의 무기인 핵조차도 오오가무시를 죽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뜻과도 같다.
“감이 잘 안 잡히네요.”
고개를 갸웃하는 제황이다.
“대략 블랙사이클롭스의 방어력에 5배 정도라고 할까요?”
“흠. 그렇군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제황이 생각에 잠시 잠겼다. 그러자 브리핑룸에 있는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봤다. 자신들이 아무리 날고뛰어 봤자 실제 레이드에 들어가는 것은 제황이다.
이루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연합공격대와 함께 움직이시는 건 어떨까요?”
그녀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아무리 제황이 9성헌터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몇백 마리에 달하는 고위급 몬스터다. 거기에 측정조차 되지 않는 보스몬스터까지 버티고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홀로 그곳에 들이박는 건 개죽음이나 자살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이리라.
그들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오오가무시는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그때였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제황이 웅성거리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나와 보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제황이 브리핑룸을 먼저 나서자 모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브리핑룸의 문이 다시금 열리며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브리핑룸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두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담담한 표정의 제황만이 자신의 태블릿을 집어 든 채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모두 해결된 것으로 알고 앞으로 사흘 후에 오오가무시 레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이루미 조차도 충격이 컸는지 말을 더듬으며 제황의 말에 답했다.
피식 웃은 제황이 브리핑룸을 나서자 사람들은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키며 헉헉거린다.
특히나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충격이 심한 듯 보이는 것은 경호팀장이었는데 그는 테이블에 비치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천장만 바라봤다.
“아까 그게 뭡니까?”
그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이라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이루미조차도 지금 자신의 볼을 꼬집으며 조금 전 자신이 본 게 혹 꿈은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다.
“휴우, 하나는 확실하네요.”
조금 진정이 된 이루미가 몬스터자원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오가무시 사체의 정확한 가격 책정과 연구에 필요한 부분을 생각해 두세요. 크기가 워낙 커서 이동이 불가하니 현장에서 해체해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루미의 머릿속에는 레이드를 어떻게 성공시키느냐는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레이드 후의 후속처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만큼 그가 남긴 여운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너는 계속 성장하는구나.
-음, 무슨 말이야?
궁기의 말에 제황이 반문했다.
-아니, 무련궁술을 소화하기도 벅차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무련궁술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잖아.
-그런가?
제황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제황이 조금 전 한 것은 별 것 아니었다. 능력이 필요하다는 마음과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두 가지가 이 무련궁술을 한 차원 높게 만들었다.
진(珍)무련궁술 유니크 스킬 (숙련도-)
-비상하는 화살
-춤추는 화살
-폭발하는 화살
-강기의 화살
-소나기 화살
-관통의 화살[new]
근래에 들어서는 딱히 인첸트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의 능력을 섞어서 쓰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오오가무시의 방어력에 대해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것이 바로 관통력이었다. 그리고 관통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격에 회전을 주는 것이다. 간단한 드릴의 원리.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격력 하나만큼은 최강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무련궁술이기에 딱히 그부분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는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즉석해서 완벽하게 구현했다. 그리고 세이브는 그 스킬을 무련궁술과 하나로 받아들였다.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우르르릉...콰콰쾅! 쾅...
멀리서 뭔가 거대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황은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것이 비록 무적성의 뒤편에 위치한 바위산에 있는 개인적으로 권제가 참 좋아하는 바위산봉우리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