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96화 (196/301)

# 196

Legacy -1

#1

이루미가 준비한 것은 대규모 기자회견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호텔의 홀을 빌렸음에도 호텔 안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세계 최초이자 최강의 헌터라는 9성 헌터 궁신이 입장을 밝히는 자리이기에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 클랜의 관계자들까지 합쳐져서 그 숫자가 이미 수백 명이다. 국내 기자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기자들로 북적거리는데, 유독 한쪽에 모인 한국인 기자들의 분위기가 수상쩍기 이상했다.

무려 9성 헌터가 침묵을 깨고 입장을 발표하는 특종이건만 그들의 얼굴에는 특종에 대해 기쁨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무련천가라는 곳에서 오늘 폭탄선언을 할 거라고 하던데요?”

“무슨 폭탄선언말입니까?”

“어쩌면 그동안 비판기사를 낸 언론들에 대한 법적 대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기자의 말에 그의 주변을 서 있던 다른 기자들의 표정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끙...”

“젠장, 그럼 가장 말단인 우리만 X 된 거 아닙니까. 분명 위에서는 정정 보도 정도 하고 해당 기자 정직으로 무마하려고 들 텐데···.”

“글쎄, 그 정도로 끝나는 거면 그나마 다행인데···. 뭐 어차피 정직하고 몇 달 쉬다가 슬슬 복귀하면 그만이니까.”

머리가 횅한 한 기자가 별것 아니라는 듯 호기롭게 말하지만, 표정이 좋지는 못하다.

그 자신도 위에서 시키니까 먹고살기 위해 위에서 원하는 대로 쓴 죄밖에 없다.

아니 아예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주관적인 추측이 좀 섞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기자가 자기 기사에 추측 정도는 실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됐어. 이렇게 모여있는 것도 그리 좋지 않게 보일 테니 일단 흩어지자고···.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일단은 모두 안테나 바짝 세우고 있어 봐.”

“예.”

가장 연장자인 기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삼삼오오 찢어져 이 수상쩍은 낌새의 정체를 밝히려 할 때 찌라시로 유명한 J 일보의 기자가 배불뚝이 사내와 함께 기자회견장의 으슥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황형, 그게 정말입니까?”

기자의 물음에 배불뚝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헌터사무국 고위층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야.”

“허...”

배불뚝이의 말에 사내가 허탈한 한숨을 내쉰다.

“아니 궁신씩이나 되는 헌터가 뭐가 아쉬워서 국적을 버린단 말입니까.”

“모르지. 듣기로는 사무국장이 연관된 일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사무국 내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아.”

“아니 그래도 무적성 소속인데···. 무적성이면 애국심이 높고 헌터들에 대한 대우도 꽤 좋다고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이봐. 명색이 9성헌터야. 그리고 아무리 무적성이라도 세계로 나가면 똑같아. 일단 그 그릇을 품을 수 있느냐가 문제 아닐까? 무적성의 지배자인 권제가 7성인데 그 밑으로 9성헌터가 있는 거라고... 아예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어쩌면 그 천제황이라는 헌터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환멸을 느끼는 걸 수도 있고...”

“그럴 수가...”

J일보 기자가 허탈해할 때 배불뚝이 사내가 말했다.

“그리고 자네들이 한 짓도 생각은 해야지.”

“예?”

“그동안 실컷 물고 뜯고 했잖아. 설마 자네들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뭘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게 다 먹고살려니 한 거죠.”

“그래서 인정 못한다고?”

“험험, 예. 인정합니다. 인정해.”

남들 다 쓰는데 자신들만 고고하게 있으면 당장 광고가 떨어지고 보도국장이 입에 거품을 문다. 그렇게 서로서로 베껴가며 쓰다 보면 기자들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던 뇌피셜들이 하나하나 섞이게 되고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소설 하나를 완성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 대상은 진실과 상관없이 걸레가 되어 있는 일은 이미 다반사였다.

“대체 그 궁신이 게이트의 확장을 촉발시킨다는 기사는 어느 새끼 우동사리에서 튀어나온 거야?  너냐?”

“그, 그거야. 위에서 시키니까.”

당장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뜨는 게 기자라지만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그였다.

“아무튼 정부 쪽이 심상치 않아. 가뜩이나 새정부 들어서서 모두 몸사려야 하는데... 아. 이제 기자회견 시작인가보군. 나 먼저 가보네.”

“어? 황형! 그건 또 무슨!”

J일보 기자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배불뚝이 사내가 휭하니 가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말에 복잡한 머리를 굴리던 기자는 곧 스피커에서 울리는 안내방송에 얼굴을 구긴 채 자신의 몫으로 지정된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단상에 홀로 나온 이루미의 발표와 함께 질문을 받는 형식으로 본격적인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2

“세계헌터사무국의 제황님에 대한 레이드 참여 요청은 현재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묻고 싶은 건 일본 천황클랜의 간부 증발 사건에 대한 참고인 소환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묻고 싶습니다. 단순한 참고인 소환이라고 일축했지만,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단순한 소환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세계헌터사무국의 소환에 불응한다는 말인가요?”

일본인 기자의 질문이다.

“불응하고 자시고 할 게 없는데요? 저희는 이미 위 사건과 관련하여 천제황님의 무고를 증명하는 자료를 모두 넘긴 상태입니다. 뭐 그것을 믿지 못하겠다면 저희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싶군요. 각 언론사에도 모두 배포한 것으로 아는데 당신도 우리 말을 믿지 못합니까?”

언론사 나부랭이 주제에 9성헌터와 기싸움 한번 하고 싶냐는 이루미의 의미심장한 말에 일본인 기자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그렇다면 세계헌터사무국에서 참고인 소환을 취소하면 레이드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겁니까?”

“그 전에 해당 문제에 대한 사과가 먼저겠지요. 뭐 잘 마무리된다면 레이드 참가는 당연합니다. 제황님은 헌터의 본분에 충실하신 분이니까요.”

이루미의 말에 한 한국기자가 손을 번쩍 들고는 외쳤다.

“헌터의 본분에 충실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헌터사무국에서 밝힌 바로는 불참하겠다는 입장표명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대한민국헌터사무국에서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그게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발표인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익명의 고위관계자인가요?”

“그건...”

이루미의 반문에 힘차게 손을 들고 질문하던 기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건 익명의 고위관계자라고 밝힌 이의 말일뿐 출처도 불명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당신들이야 제보자를 보호한다는 상투적인 대답만 하겠지만 차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 무련천가와 제휴 중인 무적성의 로펌에서 해당 기사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 대하여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임을 분명히 하는 바입니다. 아마 지금 질문하신 기자분도 무관하지는 않으시죠? 기대하세요. 그 허위보도와 관련된 이들은 지독하기로 유명한 ‘무적성 방식’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험하실 테니까요.”

“아아...”

그녀의 대답에 질문한 기자는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방금 질문을   날린 기자가 소속된 신문사가 그 문제를 가장 먼저 보도했다.

이루미가 날린 선전포고로 인해 한국 기자들이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미국인 기자가 손을 들었다.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유창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현재 궁신 천제황님께서는 단순히 대한민국이 아닌 전세계인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곧 범세계적인 활동이 필요하실 텐데 그 파트너로서 각국의 역량 있는 클랜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웅성웅성

그의 질문에 장내의 모든 기자들이 일제히 이루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지금 한 질문은 9성헌터가 발생시킬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대한민국 하나에 국한시키느냐 아니면 전세계 혹은 다른 특정 국가가 공유할 수 있느냐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루미가 질문에 답하려 할 때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저희가 답해도 될까요?”

그때 이루미가 서 있는 단상 옆으로 두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루미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부탁드리죠.”

#2

약 삼십 분에 걸친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회견장에서 나온 내용을 서둘러 전 세계 신문사로 타전하기 시작했고 곧 해당 기사들로 각 신문 메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무련천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대한민국 정부의 법무부장관과 이계자원부장관!]

[대한민국 정부 무책임한 기사 남발한 언론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세무조사 착수 약속! 최악의 경우 언론사 폐쇄까지 고려]

[대한민국을 좀먹는 고질적인 적폐세력들! 그들에 대한 새로운 정부의 칼질이 시작되는가. 대한민국 헌터사무국도 사정의 칼날을 피해 나갈 수 없을 듯...]

[대한민국 궁신을 끌어안기 위한 초법적인 특혜를 담은 9성 헌터에 대한 특별법안 긴급 발의...최단 시간 국회 통과!]

틱...

화창한 햇살 아래 가부좌를 하고 앉아 태블릿에 뜬 기사를 읽고 있던 청년이 태블릿을 덮으며 말했다.

“음, 꽤 떠들썩하게 끝내셨네요.”

그의 말에 시립해 있던 이루미가 공손히 답했다.

“네. 이참에 권제님께서도 실패하신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언론권력들과 헌터사무국 내의 반대세력들을 일소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쁘지는 않네요.”

이루미의 대답에 제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고 있었지만, 언론사들은 언제 제황을 물어뜯었냐는 듯 그에 대하여 찬양 일색이다. 웃기는 건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정론지라고 떠드는 언론사들의 칼럼들이다. 할 줄 아는 건 말장난밖에 없고 가진 건 용기밖에 없는 이름 모를 논객들이 터진 주둥이에서 나불대는 헛소리가 가소롭다.

“참 철판이네요. 이 와중에도 언론탄압이라니...”

“어차피 저들도 그 나물에 그 밥 들입니다. 정부 쪽에서 확실히 정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믿어봐야죠.”

대현그룹과 붙어먹던 이형우대통령이 전격 탄핵됨과 동시에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의 정부는 아마 이루미가 내민 제안이 아마 불감청고소원이었으리라. 그들에게도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적폐세력인 언론권력은 처리해야 할 일순위 세력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뭐 좋네요. 세금도 적어지고 그런데 너무 정부에서 받기만 한 것 아닌가요?”

국내 레이드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대한 세금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수익과 관련하여 9성헌터에 대하여 파격적인 세금감면 혜택이 내려졌다. 기존의 세금이 통상적으로 수익의 30프로라면 제황은 그보다 훨씬 적은 5프로다.

“저들은 제황님이 국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으로 충분할 겁니다.”

제황의 국적포기설은 이루미가 비밀리에 뿌린 것이었다.

“저는 어차피 국적포기할 생각이 없는데요?”

수련하기에 가장 좋은 무적성을 떠날 생각도 없고 본가도 대한민국에 있으니 굳이 골치 아프게 국적 포기를 할 생각이 없는 제황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많은 헌터들이 국적을 포기했으니까요. 전 정권이 이룩한 업적이라면 업적이랄까요. 덕분에 쉽게 제 요구사항들이 먹혔습니다. 그리고 세금감면 혜택은 이미 문상님께서 물밑 접촉 중이셨습니다.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세금 혜택은 이루어지셨을 겁니다.”

이루미의 말에 제황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벌어들일 돈을 단순히 손에 쥐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새로운 사업 구상을...”

“그게 아닙니다.”

“그럼 어떤...”

“지금 이루미님이 기부하고 계신 곳이 있지요?”

이루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루미가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을 몬스터에게 터전을 잃은 실향민이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전부 기부하는 것은 워낙 오래되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야기다.

“복지재단을 설립해 주세요. 앞으로 제가 벌어들일 수입의 10프로를 투입하겠습니다. 사업 진행은 이루미님이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선별하셔서 맡기시고요.”

수입의 10프로라는 말에 이루미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는 고작 10프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곧 있으면 중국 측으로부터 들어올 수입도 천문학적인 금액이라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단 한 명이지만 그 한 명이 제황이다. 그 혼자서 이미 수십 개 공격대를 뛰어넘는 실적을 만들어내는 레이드의 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9성 헌터, 어쩌면 중국쪽에서 넘어올 돈은 그가 앞으로 벌어들일 돈에비하면 껌값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런 거금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루미가 선택한 사람을 통하겠다는 건 이루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루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루미를 내려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은 제황이다.

“그리고 도쿄 레이드 준비를 서둘러 주세요. 아, 세계헌터사무국에다 연합 공격대는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 말씀은 설마...”

놀란 이루미가 고개를 번쩍 들며 반문했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이 햇살에 빛난다.

“네, 혼자 먹기도 부족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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