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도쿄 멸망-2
#1
제황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가운데 몬스터자원팀장만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터지다니요? 저걸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대외업무팀장이 물었다. 그러자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가 답했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최대 크기는 남미에 있는 직경 243미터짜리 게이트지만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가장 거대한 크기는 이곳이 아닌 남극에 있지. 저번 학술회의에서 그쪽에서 연구하는 지인들에게 들은 바로는 직경만 339미터였고 도쿄에서 측정된 마나농도와 남극에서 측정된 농도를 비교해 볼 때 최대 크기 300미터 정도로 예상되었었다네.”
“아니 그럼 그런 내용을 일본에 전달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사정이 있어 다른 친구를 통해 전달은 했지. 그렇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언론에 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은근히 협박까지 했다는데 별수 있나. 다행히 그나마 일본에 사는 지인들에게만 말해서 한국으로 대피하도록 했지만 말이야.”
“사람들의 생명이 걸린 일인데 일본 정부가 어째서...”
“예상뿐이니까. 예상이라는 건 어차피 확률의 문제일 뿐이지 않은가. 행여 내 말이 틀렸을 때의 여파가 있으니 나도 입을 가볍게 열 수는 없어. 그리고 일본인들은 자국 정부의 말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네.”
“후,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내부적인 불안요소가 많은 일본이었다. 한정된 땅덩어리에 몬스터와 방사능에 오염된 땅으로 인해 일본은 망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그런 이유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기 위해 국민에 대한 세뇌를 더욱 강화한 일본이었다.
아니 오히려 몬스터의 출현으로 무기 규제가 사라지면서 공공연히 과거의 영광을 떠드는 극우 일본인들이 많아지는 실정이다. 물론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일본은 산소호흡기를 쓴 환자일 뿐이지만 말이다.
“뭐 일단 우리는 돌아가죠. 일본 쪽으로부터 레이드요청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괜한 동정심으로 도와봤자 좋은 소리 못 듣는 나라니까요.”
“그렇죠.”
희생당할 사람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남의 나라 레이드에 무작정 끼어들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레이드 당사자인 제황은 이미 8티어 몬스터 레이드를 마쳤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속은 모르는 법이다.
“그보다 제황님.”
이루미가 제황에게 물었다.
“네.”
“슬슬 저희 부서의 공식 명칭을 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루미의 말에 제황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식 명칭이 필요한가요?”
“아. 네. 사실 지금 시스템은 공격대 지원시스템입니다. 보통은 공대장이 공대원들과 의견을 수렴하여 공격대의 이름을 정하고 그 공격대의 이름을 쓰는데 저희는 제황님 밖에 안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제황님의 함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건 그다지 듣기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루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황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녀 말대로 ‘천제황공격대’ 따위로 불리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
“괜찮은 이름 의견 있으신 분 계신가요?”
제황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자 모두 고심은 하지만 딱히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대외업무팀장이 입을 열었다.
“제황님의 원소속이 무적성이니 만큼 무적성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건 안됩니다. 일단 무적성에서 운영하는 공격대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있고 그 이름으로는 무적성의 이름만 드높일 뿐입니다. 권제님께서는 무적성이 제황님의 위명에 기대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이루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활로 절대자가 되셨으니 궁성 어떻겠습니까?”
몬스터자원부팀장의 의견이다.
그때였다. 제황의 귓가로 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련천가로 해.
뜬금없이 튀어나온 본가의 이름에 제황이 반문했다.
-어째서?
-일단 해봐. 새로 업그레이드 된 내 술법을 보여줄게.
“흠...”
궁기의 의견이니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이긴 할 테지만 무작정 믿기에는 그녀가 워낙 엉뚱한 구석이 있어서 조금 미덥다. 게다가 가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건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문의 이름과 직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을 좀 더 그의 일에 깊숙이 개입시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네 말대로 한다면 이들을 우리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해.
-모두 괜찮은 녀석들인데? 미덥잖은 거야?
-아니, 단지 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
-믿어. 괜찮은 녀석들 같구만. 너에 대한 충성심은 아직 모르지만 그건 네 하기 나름 아닐까?
-그건, 그렇지.
궁기의 말에 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어 함께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한 번 돌아봤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분도 확실하고 그 능력도 뒤를 맡길만한 인재들이다.
게다가 이들과는 아주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가게 될 것 같다.
“이름은 무련천가로 하겠습니다.”
“무련천가요?”
제황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깊은 현기가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나온 연유가 궁금한 것이다.
“제 뿌리가 되는 가문의 이름입니다..”
“아!”
제황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디바우저로 각성한 이들 중에는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가 유독 많았다.
제황 또한 그러려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가 밝힌 그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제황이 말을 이었다.
“제가 가문의 이름을 내걸었다는 건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저희 가문의 명예와 직결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곳에 있는 이들을 가문의 일원과 같이 본다는 의미도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저와 공동운명체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제황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흘렀다. 무려 9성 헌터가 하는 말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분야에 일가견을 이루기는 했지만, 이 일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격의 상승을 이루는 것이다. 모두가 감격에 휩싸여 차마 입을 열지 못한다.
피식 웃은 제황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곧 무련천가라는 마음으로 각자 맡은 일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무련천가의 가주 천제황입니다.”
#2
두두두두두...
거체의 헬기가 서서히 무적성의 권역에 들어설 때였다.
이루미의 전화가 울린다.
상대를 확인한 이루미는 인상을 묘하게 변하더니 그냥 꺼 버렸다.
그러자 다시금 두 번 세 번 울려댄다. 한참을 지켜보던 그녀가 곧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천제황님을 보좌하는 무련천가의 사무장 이루미입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름이지만 능숙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다. 특이한 것은 무적성이라는 이름을 빼고 오롯이 무련천가의 이름만을 말했다는 것이다.
-음, 이루미양. 나 대한민국 헌터사무국 사무국장 배현준이오.
“네. 안녕하셨습니까.”
권제를 보좌하며 자주 마주쳤던 이다.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우두머리이며 그 본인은 5성의 헌터다. 헌터로써의 무력보다는 정치에 밝아 오랜 기간 헌터사무국의 수장자리를 지켜온 남자다.
-허허, 안녕하다마다요. 덕분에 요즘 우리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높아집니다.
“아닙니다.”
몇 차례 쓸데없는 인사치레가 오가고 곧이어 배현준이 본론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초거대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에서 동맹국인 일본에 헌터병력을 파견하려 하는데 이번 파견에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인 9성헌터 천제황님과 함께 파견하기로 의결되어 이렇게 직접 전화를 했소이다.
“예?”
그의 말에 이루미의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중국 쪽의 레이드로 다소 피곤한 줄 알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일 좋은 기회...
“잠시만요.”
이루미가 그의 말을 잘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파견을 의결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하, 그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대한민국 헌터들의 위용을...
“아뇨. 제 말은 그걸 왜 대한민국헌터사무국에서 결정하시는 겁니까?”
-허허, 이루미양.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이번 일은 단지 일본의 문제뿐만이 아닌 자칫 대한민국에 위해가 끼칠 수 있기때문에 몬스터와의 전선이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확대되기 전 조기에 격퇴하기 위한... 무적성이 이념에도 부합되는...
“사무국장님?”
그녀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끊는다.
“음?”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천제황님의 일은 천제황님이 결정하신다는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냉기가 팍팍 묻어난다.
-흠흠, 이 사무장. 굳이 대한민국 헌터법을 들먹여 대한민국을 위하여 힘써야 할 의무를 강조하지는 않겠소. 그렇지만 권제께서는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의 수석원로시며 그중 가장 모범이 되는...
“저희 무련천가는 무적성의 하위 조직이 아닙니다. 그러니 권제님의 뜻에 저희를 포함하기에는 무리가 큽니다. 또한, 저번 일본 정부에서 저희 천제황님을 세계헌터사무국에 소환한 것에 대해 우리나라 헌터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이 취한 입장을 보면 저희도 그리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아니군요.”
스마트폰의 마이크를 손으로 막은 이루미가 제황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뜻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제황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련천가의 일원으로 인정한 만큼 그녀의 판단을 존중할 생각이다. 게다가 그녀는 마치 그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의 뜻을 잘 헤아리는 것 같다.
“우리 무련천가는 일전 일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가 없으면 일본레이드를 고려할 생각도 없습니다. 비록 그 일로 인하여 일본국민들이 받을 고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굳이 그런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설 정도로 저희 천제황님은 한가롭지 않으십니다.”
-이봐요. 이사무장. 당시 일에 대해서는 우리 쪽에서도 공식발표를 준비 중이었소. 그 일로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은데 내 최선을 다해 제황님을 도울 테니 이만 화를 푸시오. 이런 모양새가 우리 사무국 뿐만 아니라 무적성에도 그리 좋은...
“하고 싶은 대로 해.”
-뭐...뭐?
이루미의 반말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버벅댄다.
“하시라고요. 우호적인 신뢰 관계는 이쪽에서 거절입니다. 모든 것은 상호 주고받는 위치에서 출발하는 거죠.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이 우리 제황님께 해줄 게 있나요? 해줄 게 없다면 수평적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요? 아직 당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모든 걸 해도 좋습니다. 물론 해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죠. 후회는 언제는 늦어서 후회니까요.”
-이...이보시오!
뚝...뚜뚜뚜
자신의 할 말을 마친 이루미는 그대로 전화를 꺼버렸다.
“아! 시원하다.”
제황이 놀란 얼굴로 이루미를 바라봤다. 항상 차분하게 대응하던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니다.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 아닙니까?”
대외업무팀장이 감정이 격앙되어 보이는 이루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나 이루미는 언제 그렇게 화를 냈냐는 듯 생긋 웃으며 답한다.
“첫 단추가 중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건 저들이죠. 아쉬운 쪽이 기어야죠.”
“행여 권제님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뇨. 오히려 좋아하실 겁니다. 저 사람이 바로 권제님과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우두머리거든요. 사사건건 권제님을 방해하더니 필요해지자 달라붙는 게 눈꼴시려서요. 언제 한 번 이렇게 밟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허술하군요.”
“아마, 항상 말없이 권제님을 보좌하던 제가 상대니 손쉽게 봤던 모양이죠. 아무튼 제황님 덕분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네요.”
이루미의 말에 제황도 피식 웃었다.
사실 제황도 대한민국헌터사무국의 저번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 컸다.
신경 쓰지는 않았다지만 실망한 건 사실이다. 말은 단순한 참고인 소환이라고는 하지만 거대 클랜의 수뇌부가 증발한 사건의 참고인이다. 쉽게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 헌터사무국은 대한민국 헌터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그 취지는 대한민국 헌터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것이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어서 가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