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사거리 100만-188화 (188/301)

# 188

낚시꾼과 물고기의 사정-1

#1

이루미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본 쪽의 레이드요청들은 그 내용이나 조건 등을 불문하고 모조리 캔슬 시켰는데 캔슬 통보를 보냄과 동시에 이번 일의 경위를 언론을 통해 소상히 밝혔다. 굳이 구설수를 남길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녀가 하지 않아도 무책임하기로 유명한 일본언론이 침묵할 리 없기에 선수를 친 것이다.

[적반하장 일본 9성헌터에게 외면당하나···.]

[앞에서는 구조요청? 뒤로는 소환요청?]

[9성 헌터 역대 최초 텔레포트 능력 보유 의심? 분신술인가? 일본언론의 황당한 주장]

[방사능에 오염된 땅도 모자라 몬스터에게 빼앗긴 땅이 전 국토에 60프로에 이르는 일본의 강단 있는 선택!]

[몬스터에 고통당하고 정부에 분통 터지는 일본국민들···. 정부 규탄!]

-일본 정부 헛발질? 총리 사퇴각?

-일본병X들은 곧 죽어도 자민당이야. 천년만년 해 처먹어라. 캬캬캭

ᄂ 쟤들은 몬스터가 쳐들어와 안방에서 밥 먹고 있어도 안 변해. ㅋㅋ아주 그냥 웃겨 미치겠다. 지금 온 나라가 한국 쪽 보면서 예쓰 외치는데 혼자 노라고 하고 있어. 아주 그냥 용감해! 이 정도면 역대급인데?

-대체 뭔 깡으로 레이드 요청서를 보낸 걸까?

ㄴ 쟤들도 몰랐겠지. 손발이 안 맞는거야. 정부에서 저런 짓을 할지 알았겠냐...ㅋㅋㅋㅋㅋ~

-아, 이러면 나가린데... 일본 좀 불쌍하다.

ㄴ뭔 소리야.

ㄴ그렇잖아. 현재 엘어스쭉 구도가 한국이랑 일본이랑 붙어 있는 형태인데 일본이 얼른 내부정리를 해야 엘어스 쪽 후방이 안정화돼서 우리나라도 마음 편히 북쪽으로 진출할 텐데···. 가장 큰 암 덩어리들인 8, 9티어 몬스터들이 해결 안 되면 일본은 쪽도 못 쓸 거 아냐. 그냥 대승적인 차원에서 레이드 해주면 안 되나? 일본 애들도 머리가 있으면 두고두고 고마워하겠지.

ㄴ뇌피셜 오지고요. 병X 이냐? 뒤로 딴짓하는 놈들 뭐가 예쁘다고 그걸 치워줘. 저 원숭이 새끼들 말 바꾸는 거 하루 이틀이냐? 그렇게 도와주면 뭐!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예전에 무적성에서 원정까지 가서 일본 도와준 적 있는데 쟤들 그거 교과서에 한 줄도 안 올렸다.

요즘 일본 애들 그거 아는 애들 없어.

ᄂ 그건 맞는 말···. 그리고 저 새끼 아무래도 일본놈 같아. 그리고 막말로 이제 9티어몬스터가 무섭지 않은 9성 헌터가 있는데 그냥 일본 쪽 엘어스 영토까지 싹 밀어버리고 국기 꽂아버리면 게임 셋인데 뭔 개소리야.

국내언론은 물론이고 여론까지도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본 쪽에서도 친정부적인 각 언론에서 반박기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아닌 최대한 한국을 달래는 논조였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극히 적었다.

그들의 말을 간추리면 이런 것이다. 이번 요청은 단순한 참고인 조사일뿐이다. 일본 제1 클랜인 천황 클랜의 수뇌부들이 한날한시 증발해 버린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일본 헌터 계는 지금 대혼란상태다. 이대로는 일본 내의 몬스터들로 인해 일본 국민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결론은 일본국민들을 위해 좀 화나더라도 참아달라는 것이었지만 이 흥미진진한 사태에 각국의 언론들이 1면 대서특필하면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국민의 목숨을 빌미로 용서를 구한다? 일본의 이중적 행태]

[‘뺨치고 어르기’의 전형···. 한국 이대로 참을 것인가?]

[인류 최초 9성헌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는 언제?]

한창 대한민국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세계언론들은 앞다투어 그것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한국에 최대한 우호적인 국가라고 앞다투어 경쟁해야 할 판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현재 한국만이 유일하게 9티어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9성 헌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보일 거리만 찾던 그들이기에 모두 대한민국의 편에 서서 일본을 비난하기 바쁘다.

#2

“반응이 참 뜨거워. 허허허”

“너무 과열분위기로 가면 안 좋은데 저는 오히려 걱정입니다.”

권제의 화통한 웃음에 조용기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권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넌 일하는 게 애로사항이 꽃피겠다?”

권제의 말에 조용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에도 과부하된 미국 지부의 지부장들을 달달 볶아버리고 온 참이다.

“대체... 후우”

말도 나오지 않는 조용기다.

“평소에도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괴물일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용기는 약 한 시간 전 버지니아 주정부로부터 받은 이번 레이드 정산내역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조용기는 기업관리 부분을 맡고있는 실정이기에 제황의 활약에 대해서는 그냥 그놈 참 대단하다 하고 한마디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평안남도 수복 때 한번 반짝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무적성 전력의 5할이 투입된 경우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묻혔었다.

그런데 이번 버지니아 콜로니에서 발생한 몬스터사태에서 9티어몬스터 베히모스를 제외한 나머지 몬스터에 대한 버지니아 주정부에서 온 정산내역을 보는 순간 제황이 가진 능력이 단순한 9성헌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하루 만에 웬만한 공격대 일주일 치의 몬스터를 처리해 버릴 수 있는 겁니까?”

“흐흐, 뭔 하루? 한 5분 걸렸지?”

권제의 첨언에 조용기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무적성의 절대자인 권제라 하더라도 5분 안에 400여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하지는 못한다. 커버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아예 틀린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건 400마리의 몬스터를 애피타이저마냥 씹어먹고는 곧바로 9티어 몬스터 베히모스를 레이드 해버렸다는 것이다.

본디 엠페러가 유인 중인 것을 잡은 것이긴 하지만 드론에서 촬영한 영상을 검토한 많은 전문가가 전체 데미지의 80프로를 제황이 담당했다고 의견을 모았다.

“만약 저 불가사의한 속도와 사거리···. 그리고 몬스터 탐색 능력을 갖추고 온종일 유지하며 몬스터를 잡아댄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추정치일 뿐이지만 그렇게 레이드를 해댄다면 제황만을 위한 공룡급의 사체처리기업을 만들어야 할 판이다.

흔히 헌터를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고 부르는데 제황은 중소기업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굵직한 원천기술을 보유한 초거대기업 수준이다. 고작 5분 만에 잡아버린 400마리의 몬스터 정산금만으로 미국법인의 해외운영지원팀이 과부하가 걸렸다.

“용기야.”

“예. 형님.”

“그래서 말인데 너도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예? 어떤...”

뜬금없는 권제의 말에 조용기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권제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조용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머리가 많이 떨어졌다? 슬슬 은퇴각도기 들이대는 중이냐? 참신하게 은퇴 당하게 해주랴?”

“아, 아닙니다.”

권제가 말하는 은퇴가 단순한 은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조용기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은퇴를 한다와 은퇴를 당한다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말 그대로 자기 분수 모르고 엉덩이 붙이고 있으면 친히 칼을 들이대 주겠다는 소리다. 아무리 권제와 사석에서는 형동생이라고 해도 무적성의 일이기에 권제는 칼질에 가차 없다. 무적성의 대물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 자신마저도 아직 독신이 아니던가. 물론 애인들이야 많지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조용기가 이내 손가락을 딱 튀기며 말했다.

“아, 세금...”

“그래. 빠르네. 네가 한 번 만나봐라. 정부 애들...”

권제의 의미심장한 말에 조용기의 머릿속에 매번 갈 때마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무적성에서 지원 좀 해달라고 징징거리는 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 죽어도 돌릴 예산 없다고 배를 째라고 드러눕는 인간이라 매번 허탕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쥐어짤 건수가 생긴 것 아닌가.

조용기의 입가에도 권제와 비슷한 미소가 그려졌다.

“마른수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도록 쥐어짜고 오겠습니다.”

“옳지. 이제야 무적성의 문상답군.”

흐뭇하게 웃으며 권제가 차를 들었다.

요즘같이 하루하루가 살맛 나는 것들로 가득하기는 그도 참 오랜만이다.

#3

9성 헌터의 탄생을 축하하며 온 세계가 들끓었지만, 막상 그 당사자인 제황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물론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들이 제황을 얼굴을 볼 때마다 황송하다는 듯 차려자세로 고개를 직각으로 숙이지만 이건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다.

단지 그 차이가 제황의 숙소나 개인수련실 복도뿐만 아니라 무적성 중앙에 있는 대광장에서도 벌어진다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은근히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지만, 제황은 언제나처럼 아침 수련을 마치고 다른 일반 헌터들과 같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배식을 해주는 아가씨의 미모가 어제보다 오늘 더 화장술이 발달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눈치 못 챈 듯싶다.

서운해하는 배식직원의 표정을 무심히 지나친 제황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참선에 들어갔다.

그러나···. 참선에 들어간 지 약 30분이나 지났을까 제황의 미간이 꿈틀한다.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매우 익숙한 기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그냥 지나가 줬으면 싶지만 역시나 제황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지 문이 벌컥 열리며 거대한 그림자가 제황의 숙소로 침범했다.

“야! 야! 아우 숨차!”

들어오자마자 제황의 냉장고를 벌컥 열더니 2리터짜리 생수를 하나 꺼내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한다. 생수 한통을 원샷한 거한이 냉장고를 재것처럼 뒤지며 혀를 차며 말했다.

“새끼···. 삭막한 냉장고하고는...아주 냉장고도 지 주인 닮아서...”

무아지경에 빠져들기 직전에 깨버린 제황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넌 노크도 없냐?”

“노크? 그게 뭐냐? 먹는 거냐?”

심기가 불편한 제황의 말을 이렇게 가볍게 씹을 수 있는 건 무적성에 몇 명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 아침에는 재수씨랑 바쁘다고 자랑질을 하더니?”

“어? 허허... 뭐 요즘은 좀 한가해.”

“왜? 너무 무리하게 써서 정력이 달리냐?”

덩치로 보자면 절대 그럴 일 없지만, 은근히 부아가 치밀도록 염장질을 해대는 동철이기에 나오는 제황의 말이 곱지 않다.

“아니, 임신했거든.”

함께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임신인가. 둘이 아직 식도 안 올린 것으로 안다.

물론 제황은 별로 관심 없다.

“어, 축하한다.”

“그래. 고맙다. 아, 내가 온 건 그게 아니라···.”

축하한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은지 헬렐레하고 표정이 풀어지는 동철을 보며 제황이 피식 웃었다.

“이거 봤냐?”

동철이 불쑥 내민 태블릿을 엉겁결에 받아든 제황이 화면에 뜬 걸 바라봤다.

[도쿄 대혼란! 피난길에 오른 도쿄시민들로 인해···.]

[천황 클랜 클랜 하우스 전격 폐쇄! 클랜 앞마당에 발생한 게이트?]

[게이트 전문가들 예상으로는 역대급 크기! 일본 초긴장!]

[게이트 파장 분석 결과 다크어스행 게이트 추정]

수십 개의 일본발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다.

기사를 모두 읽은 제황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동철이 신난다는 표정으로 제황에게 말했다.

“꼬시지 않냐?”

“글쎄...”

천황 클랜의 클랜 하우스 지하로부터 발생한 다크어스 게이트다. 참으로 공교로운 시점이다. 그렇기에 백린의 소행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 제황이었다. 백린에 대한 데이터가 하나 더 쌓였다.

인위적으로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역대급이랜다. 역대급... 씨X 역대급 크기면 9티어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 크기잖아. 아주 그냥 그쪽 지방은 깡그리 멸망각이야.”

“일본국민들이 들으면 너 칼 맞는다. 걔들은 무슨 죄냐.”

“씨X 몰라. 수지 년도 이용당한 거긴 하지만 결론은 그 새끼들 때문에 죽은 거잖아. 씨발 천벌 받은 거지.”

속정이 깊은 동철이기에 제황을 버린 수지에 대해 항상 욕을 달고 살았지만,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기에 한수지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하던 게 동철이었다.

“너 얘들이 도움 요청하면 갈거냐?”

동철이 제황을 흘겨보며 말했다. 간다고 하면 한차례 욕이라도 할 판이다.

“그다지 안 당겨. 방사선도 무섭고···.”

어깨를 으쓱한 제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헌터이기에 방사능에도 강하기는 하지만 도쿄 부근에서 레이드 했던 헌터 중에 무정자증에 걸린 사례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는 제황에게 일본은 그다지 매력적인 레이드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쁜 짓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신경을 긁어대는 일본이다.

“그렇지? 역시···. 흐흐.”

제황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동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싱겁기는...”

피식 웃은 제황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백린의 의도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다가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제황이었다.

굳이 떡밥 뿌린 곳으로 가는 멍청한 짓은 사양이다. 물론 자신은 물고기 따위가 아니다.

“재미있는 새끼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물고기가 낚시꾼을 사냥해 버릴 수도 있다.

빙그레 미소지은 제황은 잠시 후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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